Retour au primitivisme (Entretien avec Mariano Llinás)
Entretien réalisé par Nicolas Azalbert
à Buenos Aires, le 27 janvier.
- 참고: 본문("프리미티비즘으로의 회귀")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2019년 3월호에 수록된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저작권은 1차적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에 있습니다.
Q1. 이 미친 프로젝트는 어떻게 탄생한 건가요?
-> 프로젝트 처음에 꽃 그림이 있습니다. 포스터에 그려져 있는 거요. 이 꽃이 당시의 시작점이자 곧 전부였습니다. 저는 4기통 비행기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결론을 갖지 않은 4개의 에피소드에 의해 진행되는 영화에 대해서도요. 이 영화는 중간에 캡슐(une capsule)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모든 이야기들을 위해서 어떤 단 하나의 결말(un seul finale)로 종결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미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것이 영화에서 가장 대담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작동하기 위해선, 의도적으로 클리셰적이고 유치하며 거의 원시적인 시작점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계(le système)가 붕괴되었을 겁니다. 저는 산업적 맥락(un contexte industriel) 바깥에선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냉소주의(cynisme) 없이 미라를 찍는 것 같은 거요. 이것은 제게 놀랍고 대단히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꽃 그림과 미라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Q2. 영화의 쟁점들 그리고 영화가 제기하는 도전들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저희에게 당신이 속한 그룹 ‘엘 팜페로’(El Pampero)에 대해서 소개해주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 그룹에 대해선 저희가 2012년 카이에 뒤 시네마 680호에서 언급한 적이 있죠.
-> 제 첫 영화 <Balnearios>(2002) 직후에, 저희—알레호 모귈란스키, Agustín Mendilaharzu, Agustina Limanbí-Campbell(이후에 다른 길을 택한 사람)와 저—는 영화 제작을 실험하는 그룹을 결성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때가 2003년이었는데, 당시는 소위 ‘새로운 아르헨티나 영화’(le nouveau cinéma argentin)라고 불리는 경향이 가장 강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이미 이 시기의 영화 제작이라고 하는 것은 훨씬 더 산업적인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였습니다. 그래서 엘 팜페로는 우리에게 일종의 피난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험하고 작은 영화들을 계속해서 찍을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반-프로페셔널한(antiprofessionnelle) 입장에서 작업한 덕택에 이 아이디어는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Balnearios>는 아르헨티나에서 찍은 첫 번째 영화였는데요.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영화 연구소(l’IN-CAA, 즉 아르헨티나의 프랑스중앙영화청(CNC)같은 곳, 편집자 주(l’équivalent argentin du CNC, ndlr))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완전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선보였죠. 그것은 오만하게 주변적 대상(un objet marginal)이 될 권리를 주장했던 영화입니다. 우리는 몇몇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또 지도자 없이 일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우리는 우리에게 적합한 제작 방식의 주인이 되어갔습니다. 우리는 실험하기 위한, 그리고 제작하는 것을 배우기 위한 목적하에서 영화를 연출했습니다. 그럭저럭 성공했죠.
<Balnearios> 4년 뒤에 <기묘한 이야기들 Historias extraordinarias>을 연출하는 시점까지, 저희는 훨씬 더 야심을 갖게 되었고 또 이러한 제작 포맷 하에서 영화들을 찍을 수 있음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로라 시타렐라가 합류해서 엘 팜페로의 지위가 확장되었고, 이는 내러티브와 관련한 거대한 포부가 있는 이 영화—영화 산업에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그리고 우리에게 맞는 장비를 가지고 잘 활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연출된 영화—와 관련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아르헨티나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엘 팜페로는 기반이 공고해지고 다음과 같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알레호 모귈란스키의 <카스트로>(2009), <더 패럿 앤 더 스완>(2013), <더 골드 버그>(2014), <더 리틀 매치 걸>(2017) 그리고 로라 시타렐라의 <오스텐데>(2011), <독 레이디>(2015) 그리고 우고 산티아고의 신작 <더 스카이 오브 더 센토어>(2015)가 그것들입니다. 이와 동시에 저 또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엘 팜페로와 함께 저의 세 번째 영화 <라 플로르>를 연출했습니다.
Q3. 이 영화는 독립 연극배우 4명, 즉 피엘 드 라바(Piel de Lava)와의 협업에 기반한 작품입니다.
-> 피엘 드 라바는 자기 자신들의 작품을 제작, 저술, 연기하는 4명의 배우 그룹이고요. 저는 이들과 <기묘한 이야기들> 때부터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함께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검토한 후에 저는 다원적 구조의 영화(un film pluriel)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는 <기묘한 이야기들>의 방식이지만 오히려 그녀들에게 집중하는 방식이고, 이 방식 하에서 그녀들은 영화의 소재(la matière)이자 서사(le récit)가 되는 것이죠.
Q4. <라 플로르>는 <기묘한 이야기들>보다 더 야심찬 것으로 보입니다. <라 플로르>는 더 많은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고 있죠. 여기서 우리는 <기묘한 이야기들>이 『야만스러운 탐정들』(로베르토 볼라뇨)과 비교해 봄직 한 것처럼 <라 플로르>가 『2666』(로베르토 볼라뇨)과 비교해 봄직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볼라뇨의 그 두 소설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네요.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과잉의 서사적 메커니즘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소설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2666』에서 소설을 종합(total)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죠. 그런데 <기묘한 이야기들>과 <라 플로르>를 ‘어느 작가의 의도의 투영’(les projections de l’intention d’un auteur)으로 읽는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작가 개념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칼럼들에서 그(개념)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두 영화가 작가주의라는 개념을 위기에 빠뜨리게 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제가 상상하고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제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것들이 어떤 반대의 방향, 즉 일종의 상호부조주의(mutualisme)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엘 드 라바의 4명의 배우들과 했던 협업이 바로 그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단적으로 그녀들은 영화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영화가 그녀들에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이 영화는 영화가 아닌 다른 영역을 탐구하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는 영화, 연극, 회화, 문학의 경계를 한층 더 뚜렷하지 않게 만들려고 한 것 같아요.
현행의 시스템이 스타 감독(réalisateur-vedette)들이 세계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라 플로르>는 엘 팜페로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적 비전(la vision d’un auteur) 이상의 영화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입니다. <라 플로르>는 이러한 관념에 저항하고 보다 구체적이고 감독으로부터 탈중심적인 어떤 형상을 옹호합니다. <라 플로르>는 우리가 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현대 영화’(cinéma contemporain)보다 오히려 더 ‘할리우드의 역사’(l’histoire d’Hollywood)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습니다. 건방져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라 플로르>는 작가적 영화(un film d’auteur)가 되기를 열망하지 않고 오히려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가능성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Q5. 사실 <라 플로르>는 영화에 관한 믿음적 행위(un acte de foi)같아 보입니다. 저희는 여기서 어떠한 노스탤지어 없이 특정 종류의 영화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어떤 부활(résurrection)을 목격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비록 ‘부활’이라는 단어가 극단적인 것이긴 하더라도, 분명 재정복(reconquête), 즉 재정립(refondation)이라는 아이디어는 있습니다. 이것이 전혀 일어날 수 없다면, 초창기에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산업적 제작 방식 속에서 만들어졌을 겁니다. 그러나 저희는 산업을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이에 대한 염려는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 자신에게 맞는 제작 방식을 갖는다는 것이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산업, 그리고 영화와 산업이 근본적으로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의 사고방식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개인적으로 요나스 메카스가 쓴 “영화의 반(反)-100년 선언”(1996)을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계의 현 상태를 볼 때, 이전에 없던 각성을 요구한 이 선언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선언의 효력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혁명적 선언이 압도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이는 카메라가 있어 영화(적인 것)가(이)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장소에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Q6. 오늘날의 문제는 사실 제작이 아니라 배급입니다. <라 플로르>라는 14시간짜리 영화가 프랑스에서 배급된 엠 팜페로의 첫 번째 영화라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 킹콩이 거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도시로 이송했죠. 만약 그가 작은 원숭이였다면, 정글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저는 이 영화의 배급을 담당한 ARP에 분명히 감사하지만, <라 플로르>는 이런 배급 메커니즘에 종속되지는 않습니다. 영화들이 배급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보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개봉 첫날 모두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계속해서 보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배급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존재합니다. 배급의 아이디어는 환상(mensonge)에 기반하고 있는 거죠.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카메라는, 기계식의 장비 덕분에, 영사기(projecteur)로도 쓰일 수 있었습니다. 카메라와 영사기는 하나의 장치에 혼합되었고, 따라서 촬영하고 영사하는 것이 별도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한 업무들의 구분, 즉 누군가는 연출하고 누군가는 영사하는 구분을 받아들이나요? 영화에는 형체가 없는 거의 무명의(anonyme) 무엇인가가 있어요. 저는 모든 것을 해체한다는 아이디어, 즉 관객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만드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보다 직접적인 ‘스펙터클(spectacle)로서의 시네마(cinéma)’로 돌아가는 아이디어에 매우 매료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영화를 공연 예술, 즉 서커스, 연극, 춤과 같은 것으로 알려진 스펙터클의 영향 하로 돌려보내는 것이죠. 적어도 그것이 우리가 엘 팜페로에서 열망하는 것이고, 그래서 끊임없이 회화적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즉, 프리미티비즘으로 회귀하는 것이죠.
Q7. <라 플로르> 중 무성의 파트들에서 그러한 ‘프리미티비즘으로의 회귀’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물론 그렇죠. 영화사는 완전히 제국주의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였어요. 즉, 타자들을 상대로 강요되었던, 그리고 그들을 배제했던 경향의 역사인거죠. 유성영화가 출현했을 때 왜 무성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그만두었을까요? 왜 두 가지 양식은 공존할 수 없을까요? <라 플로르>의 무성의 파트들은 타란티노의 경우처럼 노스탤지어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의제기(protestation)와 같은 거에요. 왜 더 이상 무성영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