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누아르의 <밑바닥 Les Bas-fonds>(1936)에 관한 단상



"보드빌과 비극, 리얼리즘과 패러디, 고리키와 르누아르 간의 이러한 믿겨지지 않는 숨바꼭질은 그럼에도 단지 매혹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작품(<밑바닥>) 우리에게 선사한다. 오직 <게임의 규칙> 작가만이 감히 그처럼 거침없이, 우스꽝스러움을 스쳐지나가는 가운데 우리의 감정을 자아낼 있을 것이다."(앙드레 바쟁) <밑바닥>(1936) <랑주씨의 범죄>(1935), <인생은 우리의 >(1936)(그리고 <시골에서의 하루>(1936)) <거대한 환상>(1937) 사이에 제작된 영화다. 원제는 "Les Bas-Fonds" 직역하면 '밑바닥', '최하층' 등의 의미이다. (한편, 국내 출간된 바쟁의 저서(『장 르느와르』)에서 번역한 제목은 "밑바닥 인생"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직업 도둑 페펠( 가방) 바실리사(수지 프랭) 불륜 관계에 있다. 바실리사는 코스탈브(블라디미르 소쿠로프)라는 부랑자들이 머무는 여관을 운영하는 노인과 결혼한 상태다. 하지만 바실리사는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에서 떠나고 싶다며 페펠에게 노인은 죽을 테니 당신과 함께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한편 바실리사에겐 여동생 나타샤(주니 아스트로) 있다. 나타샤는 성실하고 집안일을 도맡아서 한다. 주변 남자들(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남자, 형사 ) 나타샤에게 치근덕 대며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타샤는 처음엔 도둑질을 해서 돈을 버는 페펠 역시 좋게 바라보진 않는다. 그러나 나타샤는 페펠이 유치장에 수감되었을 찾아가 먹을 것을 주는 페펠에게 어느 정도 관심은 있다.

페펠이 유치장에 가게 이유는 남작(루이 주베) 집에서 동상을 훔친 것으로 오해받았기 때문이다. 남작네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간 페펠은 우연히 집주인인 남작을 마주치게 되고 그가 도박 문제로 파산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다 서로가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둘은 밤새 카드 놀이를 하면서 친해진다. 페펠이 떠날 남작은 그에게 선물로 자신이 대회에서 얻은 동상을 준다. 그래서 이후에 남작이 직접 유치장에 찾아가 해명하고 페펠을 풀어주게 된다. 하지만 파산한 남작은 결국 코스탈브가 운영하는 여관에 들어와 살게 된다. 여관에는 정신이 나간 듯한 '배우'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 죽을 같은 노인, 연애 소설을 읽으며 몽상을 꾸는 매춘부 등이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코스탈브는 아내 바실리사와 의논하여 나타샤를 강제로 형사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어쩔 없이 나타샤는 형사와 일요일 점심에 데이트를 하는데, 페펠이 사실을 알고 찾아가 형사를 쥐어팬 나타샤를 끌고 나온다. ( 장면은 자크 베케르의 <황금투구>(1952) 초반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나타샤는 바실리사와 코스탈브로부터 폭행을 당하게 되고, 결국 화가 페펠이 코스탈브를 끌고 나와 때리다 그를 죽이게 된다. 하지만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경찰이 왔을 , "살인자는 페펠이 아니라 지하방 사람들(밑바닥 인생들)"이라고 말한다. 이후 정신이 나간 듯한 '배우' 매달아 자살하게 되고, 바실리사도 떠나게 되며, 여관에서 머물던 남작은 매춘부랑 가까워지고, 페펠은 나타샤와 함께 길을 떠난다.

페펠과 나타샤가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같은 해에 나온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 마지막과 공명한다. (실제로 채플린은 에리히 스트로하임과 더불어 르누아르가 영화 감독이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영향을 사람들 명이다.) 물론 <모던 타임즈>에선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남녀가 소실점을 향해 걸어가면서 끝난다면, <밑바닥>에선 남녀가 앞으로(카메라 쪽으로) 걸어오는데, 카메라가 점점 멀어지고 프레임이 작아지면서 끝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리해보자. 오프닝 숏부터 등장했던 남작은 영화 내에서 신분적으로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화가 생긴 인물이다. 남작은 자신이 누리던 명예나 부를 도박을 함으로써 날리고 스스로 수직하강의 길을 택한다. 이는 분명 스스로 택한 결과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게 원인을 정확하게 없지만, 추측해보자면, 아마 기존의 삶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인 같다. 남작이 페펠을 우연히 만났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살아온 삶에 관심을 가지며, 실제로 그런 삶을 살기로 결심까지 하지 않았던가. 남작은 페펠이 사는 밑바닥 인생이 바로 진정한 자유로운 삶이다, 믿는 같다. 하지만 남작은 페펠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떠돌다 결국 여관에 (매춘부와 함께) 정착하기 때문이다.

반면 원래부터 떠돌이었던 페펠은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에 위치한(혹은 과격하게 표현하면노동 착취 당한다고 있는) 나타샤를 구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착취자인 바실리사와는 결별하고, 다른 착취자 코스탈브는 죽이게 된다. ( 살인은 권선징악적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코스탈브에게 악감정이 있던 사람들(무리들)로부터 지지를 얻게 된다. 이런 페펠이 나타샤를 구출한 선택한 것은 바로 다시 떠도는 (이자 살인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도망가는 )이다.

그렇다면 수직하강하여 밑바닥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삶과 떠도는 , 개의 삶에 대해서 우열을 가릴 있을까? 바쟁이 지적한우스꽝스러움’(코믹함) 다시 상기해보자. 만약 <밑바닥>에서 코믹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도박으로 돈을 날려 밑바닥에 내려와 삶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남작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밑바닥> 다음과 같이 요약가능할 것이다. ‘남작은 페펠이 되고자 했으나 (떠돌지 못하고 부랑자 여관에 정착했기에) 실패했고, 반면 페펠은 나타샤를 구출함으로써 자신의 직업, 도둑으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기에, 남작과 페펠의 상황은 역전되었다. 결국 <밑바닥> 남작에게 보내는 일종의 조롱이 담겨 있고 밑바닥의 인생들이 살아가는 사회( 구조) 풍자하는 영화다.’

일면 타당한 말처럼 보이지만, 비슷한 해에 나온 <놀라운 진실>(1937)에서 워리너 부부 사람이 바보가 정도로 곤경에 빠지게 만듦으로써( 작업은 아내, 남편 모두에게 동등하게 이루어진다. 그럼으로써 부부간의 사랑을 재확인한다. 일종의역지사지 형식 프로토타입이라고 생각한다.) 웃음을 추출해낸 레오 맥캐리의 전략을 르누아르가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 남작이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상황 자체가 남작을 조롱하기 위해서라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남작이 살게 삶과 페펠이 살게 사이에 우열을 가릴 없다. 사실 결국밑바닥에서 사는 동일하지 않은가.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남작과 페펠 사이의 우정이다. 

후반부에 나오는 숏을 떠올려보자. 프레임에 왼쪽부터 매춘부, 남작, 페펠, 나타샤가 동등하게(수평적으로) 나란히 있다. 숏은 페펠과 나타샤가 떠나기 직전에 나온 숏이다. 떠나기 전에 페펠은 남작에게 선물이 없다며 남작이 예전에 동상의 절반을 떼어준다. 그리고 둘은너는 진정한 친구야.”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사실상, 숏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작과 페펠이 서로 헤어짐에도 여전히 우정의 관계를 유지하는 . 이와 동시에 신분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이가 있다는 . 결국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삶은 사회의 (상층부가 아니라) 밑바닥에서나 가능하다는 . 그래서 밑바닥의 삶은 무조건적으로 절망적이진 않다는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 이런 것들이 바로 르누아르가 <밑바닥>에서 보여주고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조롱이나 풍자의 맥락에서 영화를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 비판적이고 게으르며 적당히 혁명적이고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사교적인 인물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와 길들여지지 않는 개인주의자들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인간 조건을 판단하지 않고 직접 체험할 있게 해주는 것이다. 르누아르의 인물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살고 갖은 불화 속에서도 우리의 사회보다 순수한 공동체를 재창조한다.” 지적한 클로드 지브레의 지적은 타당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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