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앤더슨의 <끝없음에 관하여 About Endlessness>(2019): 겨울에 다가가지만 도달하진 않는 영화

1.

로이 앤더슨의 최근작 <끝없음에 관하여 About Endlessness>(2019)는 일종의 극한(lim) 개념이 담긴 영화다. 극한 개념? 우선 영제목의 ‘Endlessness’. 사전적 정의로 끝없음, 영원함, 무한함 등을 뜻한다. 영화 내에서 설렘, 후회, 강박, 사랑, 우울 그리고 폐허, 전쟁, 무덤, 살인, 폭력 등의 이미지들이 서로 대조되면서 공명하고, 이 이미지들과 이미지들 사이사이에 삽입된 (특히 페이드-아웃될 때의) 검은 화면, 이런 것들이 생과 사, 끝과 끝없음의 경계를 직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기에, 이런 지점에서 영원함 혹은 무한함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는 있지만, 사실 단순히 이런 이미지들의 나열 혹은 이미지 내의 잠재적(암시적) 역량과 그로부터 명상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Endlessness’의 뜻 중 ‘무한함’으로부터 떠오른 개념. 극한 개념. 즉 어떤 유한값에 무한히 다가갈 때, 이 다가감의 결과값은 (수렴할 때의) 극한값을 가질 뿐 그 다가감의 대상이 되는 값에 완벽하게 도달하지 않는다는 개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가가지만 도달하지 않는다’는 동사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이 동사적 행위를 이행하는 영화다.


2.

오프닝 타이틀 이후 총 32개의 프레임(여기서 나는 의도적으로 숏이나 씬 말고 키아로스타미의 <24프레임>(2017)을 계승하여 ‘프레임’이라는 표현을 쓴다.)으로 이루어진 <끝없음에 관하여>는, 노부부인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 중 여성이 날아가는 새를 보며 “벌써 9월이네.”라는 대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첫 번째 프레임). 계절을 암시하는 단어, 9월. 가을의 시작. 일견 영화는 가을에서 시작해 점차 겨울을 향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계절이란 화두를 꺼낸 이유. 우리는 영화에서 계절이 주는 감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 영화를 통해 인지하고 있다. 가령 오즈 혹은 로메르의 사계절 연작 등을 통해서 말이다. 꼭 언급한 감독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영화에서 계절적 배경, 혹은 그 배경 속에서 인물이 어떤 의복을 입고 있는가는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겨울'로 향해간다는 사실이다. (이 향해 감은 불가항력적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겨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겨울에 다가가는 것은 단순히 회색빛의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울과 비애, 패배와 실패, 그리고 죽음에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점차 겨울에 다가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눈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28번째 프레임부터다. 치과에 환자가 누워서 치과의사를 기다린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다. 창문엔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치과의사는 예민하게 구는 환자를 치료하다 떠나고(28번째 프레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음악이 깔리면서 다음 프레임으로 넘어간다.), 어느 술집에 도착하여 턱스크를 한 채 홀로 술을 마시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29번째 프레임). 옆에 이름 모를 남자가 창밖에 눈이 펑펑 내리는 광경을 보며 “환상적이지 않나요?”라는 말을 건네도 치과의사는 그 말을 무시한다. 오히려 그 말을 들은 술집의 다른 남자가 “뭐가요?”라고 반문한다. 이에 이름 모를 남자는 “전부요.”라고 답한다. 그런 뒤 이름 모를 남자가 치과의사에게 “내 생각엔, 적어도요.”라고 반복해서 말하자, 그제서야 치과의사는 마지못해 “알겠어요.”라고 답해준다. 그다음 패배한 군대의 이미지가 펼쳐진다(30번째 프레임). 눈보라가 치는 대지 위 끝없는 행렬을 따라 패배한 군인들은 포로수용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다음, 가정집이 나온다. 노인은 학창시절 자신보다 능력이 없었던 친구가 세월이 흘러 박사학위를 따고 심지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아내에게 하소연을 한다(31번째 프레임). 또 다른 노인은 차에 문제가 생겨 혼자 수리를 해보지만 실패하고, 도움을 줄 누군가가 지나가지 않을까 두리번거리지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32번째 프레임). <끝없음에 관하여>는 가을의 쓸쓸한 분위기, 겨울의 냉혹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적극 끌고 들어오는데, 그래서인지 영화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낙관적인 분위기의 프레임보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의 프레임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이 암울한 분위기는 겨울에 다가가면서 살인(21번째 프레임), 폭력(22번째 프레임), 체념(24번째 프레임), 우울과 불운과 배척(25, 26, 27번째 프레임)의 프레임에 의해 심화되고, 눈의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이제 겨울에 다다른 것 같다고 볼 수 있는 시점에 이르러선(28~30번째 프레임) 절정에 이른다. 다시, 겨울에 다가간다, 는 표현으로 돌아가보자. 겨울? 겨울은 한 해의 끝이다. 따라서 겨울에 다가간다는 표현을 바꿔 말하면 끝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선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물론 겨울이 끝나면 새로운 한 해, 그리고 봄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겨울에 다가간다는 것은 곧 진짜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것 같다. 아니 앤더슨은 이미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끝없음에 관하여>엔 앤더슨의 일종의 종말 의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3.

하지만 앤더슨은 이 종말 의식에 잠식당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 근거는 바로 31번째와 32번째 프레임이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겨울에 다가가지만 도달하진 않는 영화다. 단적으로 영화의 마지막인 31번째, 32번째 프레임은 겨울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두 프레임은 직전의 프레임과 계절적 배경이 다른가. 잠시 우회. 사실 첫 번째 프레임에서의 여성의 말 속의 단어 ‘9월’ 그리고 28~30번째 프레임에서의 눈의 이미지를 제외하고, 그 사이의 프레임들 속에서 계절적 특징, 특히 점층적으로 계절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만한 특징을 발견하긴 어렵다. 다만 실내에서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두 남녀가 나오는 23번째 프레임을 제외하곤(물론 이 역시 가을이지만 실내라서 반팔을 입고 있다고 생각할 여지는 충분하다.) 대부분의 프레임에서 인물들은 긴팔 티셔츠 혹은 외투를 착용하고 있고, 여기에 일관된 회색빛의 채도가 주는 분위기까지 더해지는 것을 고려했을 때, 첫 번째 프레임과 28번째 프레임 사이의 각 프레임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기적 구분의 문제는 차치하고) 계절적 기준에서 봤을 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베리에이션에 걸쳐있다고 가설을 세워볼 순 있다. 이런 가설의 맥락에서, 영화는 28~30번째 프레임에서 완연한 겨울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겨울에 도달했다, 고 단언할 수는 없다. 31번째, 32번째 프레임, 얼핏 보더라도 이 두 프레임은 겨울, 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이 두 프레임을 두고, 30번째 프레임 이후에 나온 것들이니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가시적으로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고 쉽게 말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후반의 두 개의 프레임은 초반의 두 개의 프레임과 대응하기 때문이다. 먼저 31번째 프레임. 이 프레임에서 등장하는 노년의 남자는 이미 두 번째 프레임에서 등장했던 사람이다. 물론 믿음을 잃어 십자가를 이고 언덕을 올라가는 악몽을 꾸었던 성직자 역시 몇 개의 프레임에 걸쳐 등장했기에 반복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의 깊게 상기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 프레임에서의 내레이터의 말이다. 그 말에 따르면, 노년의 남자는 아내를 놀래키기 위한 근사한 저녁식사를 위해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다시 31번째 프레임. 누가 봐도 장을 보고 돌아온 그 노년의 남자가 아내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며, 준비 과정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아무리 실내라고 하지만, 겨울에는 입지 않을법한, 그래도 초가을에는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팔 전체가 드러나는 민소매 옷을 아내가 입고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31번째 프레임은 두 번째 프레임과 같은 시기, 같은 계절이다. 즉, 우리의 가설 속에서라면 적어도 31번째 프레임의 배경은 겨울이 아니다. 그다음 32번째 프레임. 또 다른 노년의 남자가 한창 고장난 차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하늘 위로 새들이 날아간다. 우리는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첫 번째 프레임에서도 본 적이 있다. 비슷한 새들의 무리의 반복 등장. 만약 이 새들이 겨울을 피하기 위해 날아가는 철새들이라면 계절이 다 바뀐 뒤에도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사실 여기에 힌트가 있다. 첫 번째와 마지막 프레임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새들은 '겨울'을 피하고 있다.) 따라서 32번째 프레임은 역시 첫 번째 프레임과 같은 시기, 같은 계절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마지막 프레임의 계절 역시 겨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30번째 프레임을 마지막으로 겨울에서 벗어났다. 마치 영화는 겨울, 아니 겨울의 무력함, 잔인함, 무서움을 마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듯이 갑자기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겨울에 다가가지만 도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시 가을로 원점 회귀하여 끝나는 영화다.


4.

만약 <끝없음에 관하여>의 시작이 봄이었다면, 그리고 각 프레임들의 배경이 봄에서 겨울까지 사계절의 베리에이션에 걸쳐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영화는 다시 봄으로 원점 회귀하여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가을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가을로 원점 회귀하여 끝났다. 그렇다면 왜 가을일까? 여기서 우리는 내레이터를 고려해야 한다. 내레이터는 전지전능한 존재인 것 같다. 내레이터는 프레임 속 인물을 보면서 코멘터리를 말하는데, 이 코멘터리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I saw …”).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프레임들은 내레이터의 회상일 수 있다. 내레이터가 봤던 것을 우리가 다시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기준에서 미래의 일인 것으로 보이는 폐허가 된 도시 위를 두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부유하는 14번째 프레임 역시 내레이터에겐 과거의 일이다. 내레이터는 미래보다도 더 미래에 존재하는 자이다. 이런 내레이터는 온갖 것을 봤을 것이다. 그중 우리는 내레이터가 기억해낸 32개의 프레임만 보는 것이다. 이 기억들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다. 내레이터의 기억들 속 인물들은 실수하고, 집착하고, 실패하고, 슬퍼하고, 고통받는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것은 이 인물들은 모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계절의 경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왜 가을일까? 우선 겨울이 끝, 종말을 은유한다고 볼 때, 가을은 봄과 여름보다 더 끝, 종말에 가까운 계절이다. 내레이터가 보기에,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이미 가을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미 종말에 가까워졌다. 그렇기에 내레이터의 회상-프레임의 배경은 가을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14번째 프레임에서 보여준 폐허가 된 도시는 우리의 근접한 미래일 수 있다. 이런 의식하의 내레이터의 회상-프레임에 봄과 여름의 자리는 있을 수가 없다. 활발함, 생동감, 생에의 의지가 넘치는 봄과 여름의 단계는 이미 진작에 지나가 버린 것이다. 여기서 봄과 여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아니 겨울을 통과하여 다시 봄을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일말의 낙관주의는 남아있다. 가령 우리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11, 13, 26번째 프레임), ‘남녀 간의 사랑’(14, 15, 16번째 프레임), ‘밝은 분위기 속 여성들의 춤사위’(19번째 프레임) 등의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가을에서 겨울로의 변이는 불가항력적이다. 겨울에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순 없다. 이건 제아무리 전지전능한 내레이터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레이터는 겨울에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럼에도 그 다가감을 최대한 지연시킬 수는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시, 30번째 프레임. 내레이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향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목도한 뒤(기억과 목도, 이 두 개의 동사는 분명 선후관계에 있다. 프레임이 등장한 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레이터는 코멘터리를 말하기 시작한다.) 이 죽음은 어떻게든 유예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듯 겨울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다시 가을로 돌아간다. 의도적으로 다시 가을을 떠올린다. 의도적으로 다시 가을의 프레임을 배치한다. 다시 떠올릴 수 있다, 다시 배치할 수 있다, 이는 앤더슨의 '영화에 대한 믿음'이다. 다가감이 도달함으로 변이되는 그 순간, 즉 다가감이 끝이 나는 그 순간을 유예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 이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돌아간 원점은 시작할 때의 원점과 다르다. 이미 한번 겨울에 도달할 뻔했다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노년의 남성은 아내에게 “짜증난다.”고 말하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또 다른 노년의 남성은 차를 수리하지 못하고 도와줄 사람도 주변에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이 여전히 종말 직전하의 우리의 삶이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가을로의 원점 회귀, 혹은 기억의 배치, 혹은 프레임의 배치라는 소박한 저항에서. 물론 이것이 우리 시대의 암울함을 해결할 수 있는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앤더슨일지라도 섣불리 해결책을 내놓을 순 없다. 만약 앤더슨이 전지전능한 내레이터를 내세워 그런 것을 시도하려 했다면 이 영화는 교만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앤더슨은 그러지 않았다. 앤더슨은 겨울에 다가갈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앤더슨은 그 다가감을 유예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니 영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 소박한 믿음. 그리고 소박한 결단. 소박한 저항. 소박하지만 우린 여기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 결국 <끝없음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희망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건 단순히 몇몇 낙관주의적 분위기의 이미지 내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앤더슨이 전지전능한 내레이터를 도입하여 30번째 프레임까지 기억해내고, 마주한 뒤에 31번째, 32번째 프레임을 배치했다는 것, 즉 양의 무한대로 다가가고 있던 것을 어떻게든 음의 무한대로 방향을 전환하고자 하는 결단을 내렸던 앤더슨의 태도에서다.


5.

어쩌면 <끝없음에 관하여> 가까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24프레임>(2017), 루나 루나슨의 <에코>(2019) 등이 아니라 비간의 <지구 최후의 >(2018) 있다. 종말 의식하에서 이별, 끝남을 어떻게든 유예하고자 하는 태도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유예는 영화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영화에의 믿음. 그리고 다른 믿음. 무슨 믿음? 종말에 다가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 종말이 오기 전까지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고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하는 것만 가능하다는 믿음. 종말이 오기 전까진 에너지는 형태를 달리 하여 끊임없이, 무한히 존재할 있다는 믿음. 이는 소년이 소녀에게 설명했던 열역학 1법칙이다(23번째 프레임). 이에 덧붙여 했던 소년의 , "이론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는 수백만 뒤에도 다시 만날 있어." 믿음하에서라면 에너지들은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다시 만날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바로 사랑. 사랑에 의해서만 각기 다른 에너지가 서로에게 끌려 다시 만날 있다. 만난 뒤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서로 부둥켜안아야 한다. 부둥켜안을 수만 있다면 거의 종말에 가까워져도,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거기에서 벗어나 부유하며 종말로 다가가는 것을 무한히 유예할 있는 그런 시간 속에서 있을 것만 같다. 이제 프레임 너머로. 오래된 비유. 중력 법칙을 무시한 둥둥 떠다니는 부둥켜안은 커플의 이미지는 마치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유리병 편지 같다. 커플의 이미지는 심지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이전에도, 영화의 포스터, 트레일러 등에도 차용되고 있다. 마치 <끝없음에 관하여> 자체가 유리병 편지처럼 어딘가 계속 부유하고 있는 같다. <끝없음에 관하여> 누군가 꺼내 때까지 유예된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앤더슨은 믿고 있는 같다. 영화가, 수백만 년이 지나더라도, 누군가와 반드시 만날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와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시 가을로 원점 회귀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