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본문에서 사용된 영화 이미지는 합법적으로 다운받은 영화 파일에서 캡쳐한 것이다.
0.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 중 스포일러에 민감한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쓴 취지를 한 문장으로 적자면 다음과 같다. 바로 ‘<지구 최후의 밤 地球最后的夜晚>(2018)이 극장에 걸려 있는 동안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최근 네이버에서 <지구 최후의 밤> VOD 스트리밍/다운로드 서비스가 시작된 것으로 보아 극장에 오래 걸려 있을 것 같지 않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1.
올해, 현재까지의 시점을 기준으로,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처음 본 작품 중에서 혹은 국내 정식 개봉한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흥미로운 작품을 하나 고르라면, 단연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을 뽑을 것이다. <지구 최후의 밤>은 2018년 칸 국제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고, 국내에선 7월 25일에 정식으로 개봉하여 극소수의 상영관에서 상영 중이다.
(여담. 만약 이 작품 외에 몇 개를 더 뽑는다고 한다면, 그 목록엔 장 그레미용의 영화들, 장-마리 스트라우브의 <호수의 사람들>(2018), 아녜스 바르다의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2019), 하마구치 류스케의 <심도>(2010)와 동일본 대지진을 다룬 다큐멘터리 3부작, 야마모토 아키라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줘>(2018),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브루노 뒤몽의 <꽥꽥과 잉여인간>(2018), 마리아노 이나스의 <라 플로르>(2018),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2019),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2018), 봉준호의 <기생충>(2019) 등이 포함될 것이다.)
2.
사적인 기억. 저번 달 영상자료원에서 호기심 반, 의심 반인 상태로 <지구 최후의 밤>을 처음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보고 나서 이 영화에 즉각 반하게 되었다. 반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특히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나의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영화를 보고 노트에 적었던 것을 취합해서 다시 정리한 것이다.)
3.
먼저, 영화를 보고 있으면, 2부 구성(엄밀히 말하면, 프롤로그까지 포함해서 3부 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선 프롤로그 이후에, 타이틀이 뜨기 이전과 이후를 각각 1부와 2부라고 정했다.)이나 숏의 구도, 롱테이크 등의 형식적 측면에서, 그리고 물(혹은 비), 폐허, 기차, 기억, 시간 등의 소재적 측면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는다는 서사적 측면에서 여러 영화/감독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실 이는 비간이 의도한 지점 같기도 한데, 예를 들어 데이빗 린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알랭 레네, 왕가위,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허우샤오시엔의 경우, 엔딩 크레딧 중 'THE DIRECTOR WISH TO THANK'에도 이름이 적혀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타르코프스키를 교집합으로 해서, 비간(의 카메라)과(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왕빙'도 종종 떠오른다. 왕빙은 여러 인터뷰에서 타르코프스키를 언급했고, 심지어 집에 『봉인된 시간』을 두고 자주 읽는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 등이 떠오른다. 물론 이런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인용들(혹은 오마주의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작업 자체는 별로 생산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유운성 평론가의 지적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 최후의 밤>의 세계에서 이런 인용들은 정합적으로 해석이 가능하게끔 평화롭게 공존해있는 상태가 아니다." "사실은 전체적으로 해체가 되어 있다." "문화적 산물들을 가져와서 지금 영화의 상태에 상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식의 요소들, 사물들, 인물들이 평화롭게 혹은 정합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영화로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 말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솔직한 영화다." 결국 <지구 최후의 밤>은 파편화된 기억과 인용들(혹은 오마주의 이미지들)의 나열(1부. 두 개의 시간대가 평행적으로 진행되는 서사)과 그 종합(2부. 한 개의 시간대, 즉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일종의 꿈의 서사)으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나 <인랜드 엠파이어>(2006)를 처음 보고 느꼈던 충격과 감흥을 <지구 최후의 밤>을 보면서 느꼈던 것 같다.
한편, <지구 최후의 밤>은 비간의 장편 데뷔작 <카일리 블루스 路邊野餐>(2015)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오히려 <지구 최후의 밤> 2부에서의 대담함(특히, 새가 그려진 탁구채를 돌렸을 때 돌연 1인칭 시점 숏으로 전환된 뒤, 카메라가 날아오르는 그 순간)은 <카일리 블루스> 때보다 더 나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카일리 블루스> 역시 수작이며, 특히 중후반부에 카메라가 갑자기 오토바이를 따라가는 것을 그만두고 샛길로 빠졌다가 다시 쫓아가는 그 순간은 잊지 못한다. 이처럼 촬영하던 피사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움직이는 카메라 무빙은 <지구 최후의 밤> 엔딩에서 반복된다.) 어쨌든 비간은 자신이 영화나 문학 등지에서 배운 것들을 '시네마'의 영역에 끌고 들어오는데, 그 방식이 21세기, 특히 2010년대의 현재 시네마의 상태, 즉 부서진, 위태로운 상태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방법론을 비간은 <카일리 블루스>에서 처음 시도한 뒤 <지구 최후의 밤>에서 변주, 반복하고 있다.
4.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도 이어지는데, 바로 2부에서 펼쳐지는 시공간이다. 개인적으로 파편화된 1부보다 이를 봉합한 2부가 더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봉합의 방식이 바로 '롱테이크'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2부는 약 59분 동안의 롱테이크로 진행된다. '59분 동안'이라는 시간이 지속된다는 것. 끊어지지 않는 숏들을 통해 시공간의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것. 더 나아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최대한 미루려고(혹은 회전하는 집에서 사랑을 나누기엔 너무 짧은 밤을 최대한 늘리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의 중반부에 뤄홍우(황각)는 당마이에 가서 완치원(탕웨이)을 찾는다. 밤 9시에 그녀의 공연이 있다하여 그때까지 시간이 빈 뤄홍우는 어느 극장에 들어간다. 극장에 앉은 뒤 3D 안경을 쓰고 벽에 기댄다. 이때 갑자기 '지구 최후의 밤' 타이틀이 뜨고 뤄홍우는 어둠 속을 헤쳐서 어느 집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추후 '꼬마 백묘'라고 부를 12살짜리 소년을 만난다. 뤄홍우는 그 소년에게 자기가 극장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어두운 미궁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년은 탁구 시합을 해서 이기면 이곳에서 나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뤄홍우가 탁구 시합에서 이겨서 소년은 뤄홍우를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케이블을 타는 곳까지 안내해준다. 뤄홍우는 케이블을 타고 당구장이 있는 곳까지 내려온다. 그곳에서 완치원인 것 같아 보이는 (그러나 '카이전'(카일리의 진주라는 뜻)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만난다. 타이틀이 뜨고 뤄홍우가 어둠 속을 헤쳐나가는 그 순간부터 영화는 계속 롱테이크로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이 2부는 과연 무엇인가? 흔히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 이후에 진행되는 이 2부부터가 곧 '영화'인 것인가? 실제로 뤄홍우가 극장에 들어가서 3D 안경을 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부는 뤄홍우가 본 영화인가, 아니면 뤄홍우가 영화를 보다 잠들어서 꾼 꿈인가. 또 다른 질문. 약 59분 동안 숏이 단절되지 않으면서 1부에서 언급되었던 정보들과 묘사되었던 소재들이 변주되어 2부에서 반복되고 있는 전개 방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과 관련해서 데니스 림의 언급은 참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데니스 림은 2부를 "한밤의 꿈"(a nocturnal dream)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비간의 롱테이크를 두고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압축' 개념, 한 숏 안에 쌓이는 강도를 우리가 아는 형태로서 현실의 보호벽이 파열되기 직전 그 한계까지 밀어붙인다"고 보고, 이에 "비간은 정신적 영역을 창조하는 동시에 육체적 감각을 전달하는 영화의 잠재력에 관심이 있다"고 덧붙이며, 결국 2부는 "생생한 꿈, 자유로이 부유하는 의식의 체현이라는 다른 유형을 모의하"며 "(...) 카메라를 돌리며 움직이는 인물들과 회전하는 방, 덧없음의 상징임에도 터무니없이 오래 타는 폭죽을 보여주"고 "(...) 그 모든 게 실은 일종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각성을 유보하기 위한 안간힘"이라고 평한다.
5.
잠시 우회. 데니스 림의 "비간은 정신적 영역을 창조하는 동시에 육체적 감각을 전달하는 영화의 잠재력에 관심이 있다."는 표현으로부터 기인한 생각. 사실 '육체적 감각을 전달하는 영화의 잠재력'에 관심이 있는 감독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독은 바로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다. (물론 앞서 잠깐 언급했던 '왕빙'의 영화들, 예를 들어 <철서구>(2003), <중국 여인의 연대기>(2007), <세 자매>(2012),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 <타앙-경계의 사람들>(2016), <사령혼>(2018) 등도 떠오르긴 한다.) 임재철 평론가는 <너무 이르거나/너무 늦은>(1982)을 두고 풍경을 보여 주는 장면이 지나칠 정도로 길어서, 보는 것 자체가 거의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들을 통해서 스트라우브-위예가 노리는 것은 보는 것의 고통을 통해서 결코 주관적인 의미로는 환원되지 않는 이집트의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의 신체적으로까지 감지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거의 신체적으로까지 감지하도록 하는 것'에 밑줄.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는 카메라(비간) 혹은 오랜 시간 동안 고정된 카메라(스트라우브-위예)를 통해 '거의 신체적으로까지 감지하도록 하는 것'. 달리 말해, 비간과 스트라우브-위예는 분명 서로 다른 방법론을 자신의 영화에 적용하지만, 궁극적으론 그 둘 모두 "물질화된 감각"(태그 갤러거)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는 비간이 <지구 최후의 밤> 2부를 후반 작업에서 3D로 컨버전한 사실과 겹쳐볼 때 보다 확실해진다. 원래 비간의 의도대로라면 영화의 중반부에서 뤄홍우가 3D 안경을 낄 때 관객들 역시 3D 안경을 끼고 2부의 시작을 맞이해야 한다. (국내에선 안타깝게도 2부를 3D로 상영하는 극장은 없다.) 이처럼 중간에 감상 방식을 바꿈으로써 관객과 영화 속 인물인 뤄홍우를 동일화시키는 전략은 곧 "물질화된 감각"을 관객에게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간이 스트라우브-위예의 방법론을 계승해서 영화를 찍고 있다고 볼 순 없다. 일단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들은 임재철 평론가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크게 '번역의 영화들'과 '탐구의 영화들'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탐구의 영화들' 계열의 스트라우브-위예 영화들(<역사 수업>(1972), <쇤베르크의 영화 반주 음악 입문>(1973), <구름에서 저항까지>(1979), <너무 이르거나/너무 늦은> 등)에 국한해서 생각해보면, 스트라우브-위예는 어떤 공간에 직접 간 뒤, 그곳에서 마주한 평화로운 풍경 등에서 저항과 투쟁의 흔적을 읽어낸다. 이런 식으로 스트라우브-위예는 어떤 공간의 객관적인 현실에서 기인하는 감각들을 물질화하는 데 관심이 있고, 이것이 바로 스트라우브-위예의 이미지의 (정치적) 목적이다. 임재철 평론가가 언급한 바대로 스트라우브-위예는 "(본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 자체에 대해 고민한 고다르와 달리) 보는 것에 대한 성찰 이전에 보는 것 자체에 집중하며, 그러한 보는 과정을 통해서 보는 방법 자체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 감독이다. 그래서 스트라우브-위예는 카메라에 잡히는 사람들을 전혀 방해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이런 맥락에서 가장 완벽한 '도덕적인 지점'(moral point)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비간 역시 어떤 공간에 직접 간다. 바로 자신의 고향 카일리에 말이다. 여태까지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거의 조명된 적이 없는 카일리. 이곳이 바로 비간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다. 비간은 <카일리 블루스>를 두고 "사적인, 개인적인 작품"(a private, personal piece)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달리 말해, 비간이 자신의 첫 영화에서부터 카일리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아마 그곳이 자신이 잘 아는 공간이고 또 자신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여기서 스트라우브-위예와 차이가 있다. 비간은 자신이 잘 아는 공간, 아니 자신이 살았던 공간으로 직접 간 뒤, 그곳에서 자신의 기억과 마주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지역과 관련한 기억'(예를 들어, 먀오 전통문화(죽관악기 생황 등)나 인물, 장소에 대한 기억. 특히 어머니는 미용사고 아버지는 운전수였던 기억)과 '시네필리적인 기억'(예를 들어, 영화 수업이나 다운로드해서 봤던 영화 등에서 배운 것) 모두를 함축한다. 기억은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가면서 필연적으로 흐릿해지고 또 왜곡된다. 여기서 비간은 기억 혹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 아니 그것을 붙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불가능함을 깨닫는 "각성"(데니스 림)의 순간을 최대한 늦추는데 효과적인 매체로 영화를 택했다. 그리고 비간은 그 늦추는 방식으로 롱테이크를 택하는데, 이 방식을 통해서 기억과 시간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피찻퐁이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비간의 숏(들)에서 아피찻퐁이나 타르코프스키적 이미지가 아른거린다면 그건 단순한 오마주의 맥락 이상으로 비간이 그들의 태도와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6.
기억과 역사에 관한 짧은 노트. 유운성 평론가는 '개인적 추억이나 공동체적 기억의 상상적 집합'과 '역사'를 구분하면서 "역사는 무한에 대한 사유, 무한한 잠재적 기억들과 추억들까지도 포괄하는 보편적 사유이며 따라서 앞서 언급한 상상적 유한집합으로부터 역사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도약'이 필수적이다. 역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역사는 가상이고 환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실재의 행위와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상이요 환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불필요한 허구는 아니"며 “역사를 발견한다는 것은 윤리적 탐색을 가능케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고 덧붙인다. 만약 역사를 가상이 아니라 실체라고 믿고 단지 도덕적 교훈을 담은 이야기들의 더미로 보는 태도로부터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단지 "무용담이나 음모의 스릴러가 될 수밖에 없다."
비간이 영화에 자신의 기억을 끌고 들어왔기에 중국의 통상적인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와는 다소 달라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간의 영화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사실 얼핏 보면 비간의 영화는 단순히 비간의 기억이 파편화되어 산재된 영화 같다. 하지만 이 표현에 보다 적합한 작품은 비간의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요나스 메카스의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2000)라고 생각한다. (물론 메카스의 <우연히(...)> 역시 단순히 기억이 파편화되어 산재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메타적으로 ‘기억’과 ‘기억을 다루는 영화’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약 5시간)을 제공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메카스와 달리 비간은 두 가지 차원의 층위를 만든다. 하나는 자신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의 이야기, 즉 픽션이다. 그리고 이 둘을 섞어나가기 시작한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 그 둘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픽션의 주요 서사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카일리 블루스>의 천, <지구 최후의 밤>의 뤄홍우는 각각 자신이 사랑하지만 사라져버린 사람(전자는 웨이웨이, 후자는 완치원)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과 지나간 시간을 마주한다.’ 이런 탐색과 여정의 서사 자체에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가상의 인물들이 마주하는 기억과 지나간 시간이 바로 비간의 기억과 지나간 시간과 뒤섞여있다는 것이다. 가령 가상의 인물들이 만나는 사람들(이발사, 의사, 트럭 운전사, 경찰관 등)과 머무는 공간, 겪는 날씨 등 그리고 이런 것들을 포착하는 숏의 구도, 방식 등에서 우리는 비간의 ‘지역과 관련한 기억'과 ‘시네필리적인 기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잠시 <지구 최후의 밤>의 서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부는 두 개의 시간대가 평행하게 진행된다. 심지어 이 두 개의 시간대는 뒤죽박죽 섞여서 편집되어 있다. 두 개의 시간대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파악해볼 수 있다. 먼저 뤄홍우가 완치원을 찾는 ‘현재'의 시간대가 있다. (물론 이 시간대가 명확하게 ‘현재'인지 알 수 없으나, 기준을 잡기 위해 일단 ‘현재’로 표기한다.) 그리고 뤄홍우와 완치원이 사랑을 나눴던 ‘과거'의 시간대, 즉 2000년 여름이 있다. 먼저 현재의 뤄홍우는 카지노를 운영 중이다. 뤄홍우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카일리로 돌아간다. 카일리로 돌아가면서 친구 백묘의 죽음을 떠올린다. 과거에 백묘는 노름빚 때문에 도망 다녔다. 백묘는 줘홍위안에게 사과를 팔 예정이었는데, 뤄홍우가 나중에 듣기로 그는 갱도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카일리에 도착한 뤄홍우는 어머니 식당에서 고장 난 시계를 가지고 나와 빗물이 새는 폐가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시계 뒷면에 있는 여인의 사진을 꺼내어 본다. 누군가 담뱃불로 지진 것인지 사진 속 여인의 얼굴을 알아볼 순 없다. 이때부터 과거 자신의 애인이었던 여인, 완치원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완치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서 말이다. 타이자오메이, 완치원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왕즈청, 백묘 어머니, 당마이 술집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완치원을 확실하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당마이의 한 술집에 당도한다. 그런데 완치원의 공연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극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3D 안경을 쓰고 벽에 기댄다. (이후에 뤄홍우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극장에서 잠에 들었다.) 이것이 현재의 마지막 숏이다. 한편, 과거의 뤄홍우는 자신의 친구 백묘를 죽인 갱의 보스 줘홍위안을 찾기 위해 그의 애인인 완치원을 미행한다. 산사태로 인해 멈춘 기차 안에서 뤄홍우는 완치원에게 줘홍위안이 어디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완치원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뤄홍우는 그녀를 어머니 식당에 데려가 같이 저녁을 먹고, 계속 트럭을 타고 쫓아다닌다. 어릴 때 사라진 친어머니와 닮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둘은 가까워지고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얼마 후에 완치원은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줘홍위안이 카일리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완치원은 아이를 지운다. 뤄홍우는 아예 카일리를 떠나 멀리 미얀마로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줘홍위안에게 들켜 그 둘의 도망 계획은 실패한다. 그 둘은 줘홍위안에게 잡혀있다 도망쳐 나와 줘홍위안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뤄홍우는 극장에서 줘홍위안이 앉은 의자 뒤에 총을 가져다 댄다. (실제로 총을 쏴서 죽였는진 알 수 없다.) 이것이 과거의 마지막 숏이다. 현재 시점에서, 당마이의 한 극장에서, 페이드 아웃된 후 타이틀이 뜬 뒤 이어지는 2부. 2부는 뤄홍우가 어둠 속의 동굴을 헤쳐나가면서 시작하는데, 뤄홍우가 길을 잃은 이곳에서 뤄홍우는(혹은 관객은) 현재와 과거의 기억들이(혹은 1부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이) 뒤섞여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뒤섞임은 픽션 속 인물의 기억과 비간의 기억의 혼재다.
2부에서 펼쳐지는 (시)공간은 뤄홍우의 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2부에서 뒤섞여 나오는 것들의 출처나 시작과 끝을 정합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비간은 픽션 속 인물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을 뒤섞은 뒤 이것들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간은 이것들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그 불가능함 자체를 노출하는 방식의 전략을 취했다. 이 방식이 곧 <지구 최후의 밤>의 서사를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이런 작업은,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영화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메타적으로 보자면, <지구 최후의 밤>의 두 가지 차원의 층위 중 가상의 서사, 즉 픽션은 비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잠재적 기억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비간은 이 기억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물질화하려고 한다. 데니스 림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간은 “구체적인 장소와 문화, 그리고 세대적 감수성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꿈과 기억에 대한 영화적 어휘를 제력하기 위한 비범할 정도로 대담하고 광범위한 원정"을 하고 있다. 즉, 비간은 구체적인 장소와 문화, 세대적 감수성으로부터 비롯한 ‘지역에 관련한 기억'과 ‘시네필리적인 기억'을 바탕에 두고 허구적인 이야기인 픽션을 직조하는데, 이 직조된 픽션 자체가 비간의 무한한 잠재적 기억 중 하나라면, 이것을 영화화(오디오-비주얼화)하는 것은 곧 가능태(잠재태)를 현실태로 발전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개인적 기억이 픽션이라는 허구적인 방식을 통해 역사로 이행하는 도약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비간의 기억’과 ‘그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들어진 픽션(은 사실상 비간의 무한한 잠재적 기억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뒤섞이고, 그 결과물인 <카일리 블루스>와 <지구 최후의 밤>은 비간이 (어쩌면 현시점에서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역사의 형상을 발견하면서 윤리적 탐색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7.
4의 세 번째 문단에서 던졌던 질문과 관련해서 5와 6에서 미약하게나마 사유해봤다. 5와 6에서 이어지는 추가적인 가설. 2부(라는 픽션)가(이) 비간의 무한한 잠재적 기억 중 하나라면, 이 2부에서 펼쳐지는 (시)공간은 무엇인가. 이 공간은, 뤄홍우가 극장에서 잠들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꾼 꿈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다. 사실 뤄홍우의 기억, 무의식, 뤄홍우가 감상한 영화, 혹은 뤄홍우가 감상한 영화와 꿈의 혼합 등으로 얼마든지 이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공간이 ‘어떤 곳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혹은 불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그래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는 작업은 뒤로하고, 오히려 중요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이 공간의 특성이다. 이 공간은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같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무시간적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왜냐하면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면 모든 사물과 사람의 움직임이 정지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간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한 정보가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지구 최후의 밤> 엔딩 숏을 상기해보자. 아니 구체적으로, 타이틀이 뜬 이후에 시작된 숏의 약 57~59분이 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뤄홍우가 주문을 외운다. 집이 회전한다. 뤄홍우와 카이전이 키스를 한다. 그리고 돌연 카메라는 그 둘을 찍고 있다가 떨어져 나와 그들이 걸어 나온 길을 그대로 다시 돌아가서 카이전이 노래를 부르려고 기다리던 대기실로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카메라가 응시하는 ‘폭죽'이다. 이전에 대기실에서 나눈 뤄홍우와 카이전의 대화 상기. 뤄홍우가 준 시계를 두고 카이전은 ‘영원'을 의미한다고 말했으며, 카이전이 준 폭죽을 두고 뤄홍우는 ‘잠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잠깐’을 상징하는 폭죽. 그런데 카메라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서 폭죽을 응시하자, 그제서야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혹은 “덧없음의 상징임에도 터무니없이 오래 탄다.”(데니스 림) 그렇다면 이 폭죽은 이 공간의 규칙을 배반한 사물인가? 왜냐하면 원래 이 공간에선 카메라가 응시하지 않더라도, 즉 프레임 바깥에선 사물과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공간의 특성이자 규칙이다. 그렇다면 폭죽은 집이 회전하고 있는 동안 다 탔어야 한다.
잠시 우회해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앞서 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카메라로 찍은 영상물을 볼 때 아무도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멈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프레임 바깥의 세상은 언제나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 ‘카메라가 응시하지 않더라도, 즉 프레임 바깥에선 사물과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항상’, ‘매 순간’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혹은 우리는 아예 프레임 바깥의 세상을 잊은 채 프레임 안, 즉 스크린 위에서 상영되고 있는 숏의 연쇄에 집중하기에 바쁘다. (나쁘게 말하자면, 관객은 흔히 수동적으로, 프레임 안에만 시선이/의식이 갇혀 주어진 숏 너머, 즉 숏이 미처 담지 못한 시공간(세상)을 능동적으로 상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다큐멘터리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이란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한편, 극 영화, 특히 완전 픽션을 추구하는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이란 감독이 직조한 가상일 것이다. 그리고 형상-픽션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은 현실이자 가상, 아니 그 둘 사이의 미묘한 상태일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딱 잘라 구분할 순 없으며, 오히려 프레임 바깥이 현실이냐 가상이냐는 결국 정도의 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에는 현실과 가상이 모두 어느 정도는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샹탈 아케르만 같은 감독은 여러 번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며 그 구분이 중요하지도 않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실 프레임 바깥의 세상을 지속적으로, 적극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숏과 숏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여 숏이 담아내고자 하는 시공간(세상)을 하나의 일관된 시공간(세상)으로 인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레임 바깥의 세상까지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앙드레 바쟁적 의미의) ‘토탈 아카이빙적 이상(理想)’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이상은 세계를 통째로 기록해서 보관할 수 있는 가상의 기계 장치로만 실현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완전한 아카이빙'은 하나의 신화이자 규제적 이념으로서 작동하는데 그 이념을 여러 감독들이 각자의 리얼리즘을 통해 수행했다. (그럼에도 채울 수 없는 잉여가 있고, 바로 이 잉여의 자리가 미학의 자리라고 볼 수 있다.) 리얼리즘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아마도 ‘쁠랑-세깡스’(plan-sequence)일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의 숏’이 ‘하나의 장면’이 되게 만들어 숏과 숏 사이의 단절을 피하고, 그 시공간을 오롯이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쁠랑-세깡스, 즉 롱테이크에서도 여전히 프레임의 한계를 피할 순 없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운드'를 활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운드의 출처를 프레임 안과 밖 모두에 두는 것이다. 이렇게 프레임 안과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면, 관객은 프레임 바깥까지 (순간적으로) 의식하게 되고, 그 바깥 어딘가에 사운드의 출처가 있을 거라고 생각,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즉, 이런 방식을 통해 프레임 안에만 관객의 시선이/의식이 갇히지 않고 바깥으로까지 확장되며, 관객은 숏에 담기지 않은 시공간까지 상상하게 된다.
아마 이런 작업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던 사람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21세기에 들어와 돌연 단 두 대의 디지털카메라만을 차 안에 고정해서 찍은 <텐>(2002)을 내놓았다. <텐>에서 우리는 택시를 타고 움직이는 운전자와 승객 단 두 명의 얼굴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방식은 단숨에 우리를 낯선 이란의 한 택시 안으로 데려다 놓는다. 택시 창문 너머로 들리는 사운드(프레임 바깥의 사운드)와 운전자와 승객의 대화만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란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텐>의 실험을 더 밀고 나간 작품은 <파이브>(2003)이다. 약 75분 정도의 러닝타임 동안 단 다섯 개의 프레임만 나오는 영화. 각 프레임당 약 10분~30분 정도 파도와 지나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오리들을 그저 응시하는 게 전부인 영화. 이 응시의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까지 적극적으로 상상하라는 것이다. 이후 키아로스타미는 <쉬린>(2008)을 내놓았다. <쉬린>은 「코스로우와 쉬린」이란 연극을 보고 있는 여배우들의 ‘리액션'만을 카메라가 응시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프레임 바깥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상상해서 각자 재구성하게끔 만드는 영화이다. 그리고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에서 더 나아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24프레임>(2017)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물론 <쉬린>과 <24프레임>사이에 몇 개의 단편들과 두 편의 이란 바깥에서 찍은 장편 극영화가 있다. 이 두 편의 극영화는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의 숏은 주어진 세계 안에서의 입방체라고 불렀다. 그래서 모든 숏은 6개의 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롱테이크가 영화를 보는 사람이 주제 전체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정성일) 요컨대, 키아로스타미는 프레임의 한계를 한계라고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이것이 영화를 예술로 만들어 주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키아로스타미는 프레임 안을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응시하고, 또 듣는다면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으로 프레임 안을 바깥까지 확장하여 넓힐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그에 따르면,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각자의 능동적인 상상의 참여가 동반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고정된 숏을 보면서도 그 숏이 미처 담지 못한 시공간을 상상한 다음 그 시공간에 몰입해서 영화의 주제 전체를 체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을 전적으로 믿었던 감독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시네마는 VR의 흐름을 타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다. VR과 관련한 이론이 아직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았고, 여전히 VR을 영화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네마의 VR로의 흐름 자체를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2D 스크린 위에 상영하는 포맷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 중 키아로스타미의 계보를 잇는 감독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을뿐더러 더욱이 관객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프레임을 오랜 시간 응시하면서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달리 말해, 키아로스타미가 믿는 것처럼 관객들은 프레임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비교적 젊은 시네필인 비간은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 등의 경로를 통해 영화를 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비간은 자신의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키아로스타미가 믿는 그런 관객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비간이 관객들이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다고 믿는 회의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비간은, 키아로스타미의 노선과는 다르지만, 관객들이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보다 쉽게 인지하고 상상할 수 있게끔 그들에게 친숙하지만 기존의 영화들에서는 아직 본 적이 없는 그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마치 VR 영화에서나 볼법한 그런 공간. 곧 ‘VR적 공간'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그런 공간. 그렇다. 많이 우회했지만, 다시 돌아가서 <지구 최후의 밤>의 2부에서 펼쳐지는 이상한 공간의 특성을 파악해보면 이는 곧 ‘VR적 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구 최후의 밤>은 2D 스크린 위에서 상영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를 착용하고 감상하는 VR 영화만큼 프레임의 한계를 벗어나 영상이 전달할 수 있는 정보량을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비간은 이 VR적 공간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하나의 숏, 즉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종종 1인칭 시점 숏(케이블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이나 탁구채에서 새를 소환하여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2부를 마치 VR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를 두고 비간이 <지구 최후의 밤> 2부에서 VR 영화를 스크린 위에서 펼쳐 보이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고 말한다면 이는 과언일까?
VR적 공간을 사유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게임 속 공간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어느 공간에 진입하면 그 공간의 사물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즉, 게임 속 공간은 무시간적 공간인데 다만 플레이어가 머무는 동안 내내 돌아가는 그런 공간이다. 이것이 게임 속 공간의 특성 혹은 규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의 시각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NPC나 다른 플레이어 등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며 예민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끊임없이 인지하려고 노력한다. 요컨대,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잠재적인 이미지, 정보, 자극들에 포위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공간을 영화에 끌고 들어온다면, 관객은 게임 속 플레이어처럼 자기가 보고 있는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항상', ‘매 순간' 돌아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고,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구성하기 시작하며 결국 프레임 안과 밖에 걸쳐있는 공간을 하나의 일관된 공간으로 인지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바로 이런 지점을 비간이 노린 것이며, 이런 이유로 2부에서 펼쳐지는 공간이 VR적 공간의 특성을 띠게 만든 것이다. 덧붙이자면, 뤄홍우가 겪는 일들도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처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들이 많다. 가령 뤄홍우가 처음 도달한 집에서 마주한 12살 소년을 게임 속 NPC로 볼 수 있다면, 이 소년이 제시한 제안, 즉 ‘탁구 시합을 해서 자기를 이기면 나가는 곳을 알려주겠다'는 것도 일종의 플레이어가 해결해야 하는 퀘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예를 들어 탁구채를 돌렸더니 새가 소환된다든지, 폭죽이 오랫동안 타는 것 등 역시 이 공간의 규칙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공간이 VR적 공간(이자 게임적 공간)임을 입증하는 증거들로 봐야 할 것이다.
8.
1부에서 완치원은 뤄홍우에게 “우주가 아닌 이상 우린 함께 살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마따나 과거에 뤄홍우와 완치원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현재의 뤄홍우는 완치원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찾아다녔으나 결국 만날 수 없었다. 만나기 직전에 극장에서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나게 된 2부의 공간은 ‘우주'와 같은 공간인가? 달리 말해, 현실 속의 공간은 아닌 어떤 곳. 앞서 말한 것처럼 VR적 공간의 특성을 띠고 있는 어떤 곳. 이런 공간에서나 뤄홍우는 완치원과 재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곳에서 뤄홍우가 만난 여인은 완치원이 아니다. 완치원 같아 보이는 그녀는 사실 카이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을 떠올려보자. 여기서 ‘지구 최후'는 정말 지구가 최후를 맞이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루의 끝인 ‘밤’과 더불어 종말 의식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실제로 뤄홍우는 종말 의식을 갖고 있다. 잠에 빠진 뒤 길을 잃어 도달한 이 미궁 같은 공간에서 뤄홍우는 오늘 밤 안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완치원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현실에 돌아가서, 가라오케는 아마도 철수해서 완치원은 떠났겠지만, 다시 완치원을 찾으러 가면 되는데, 뤄홍우는 이상하게도 다시 못 만날 것 같다고 믿는다. 혹은 뤄홍우는 완치원을 다시 만나고 싶은데 이 미궁 같은 곳에 빠졌다는 절망적인 심정에서 다 끝났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다 포기하다시피 한 순간에 뤄홍우는 당구장에서 완치원과 똑 닮은 카이전을 만나게 된다. 당구장에 갇히게 된 둘은 탁구채에서 새를 소환해서 빠져나오는데, 이때 뤄홍우는 카이전에게 다짜고짜 “지금은 그냥 당신이 그 여자(완치원)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카이전은 뤄홍우에게 “그 여자나 찾아가요.”라고 말하며 더 이상 자기를 쫓아오지 말라고 말한다. 즉, 카이전은 자기가 카이전으로 인정받길 원하지 완치원의 대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뤄홍우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 여인 역시 백묘의 어머니인 것 같지만 백묘의 어머니는 아니다. 이 여인은 뤄홍우에게 남편이 항상 거짓말을 하지만 “적어도 저 남자는 내게 달콤한 꿀을 주었다.”며 따라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뤄홍우는 남편을 총으로 협박해서 여인을 데려가게 한다. 그 보답으로 뤄홍우는 여인으로부터 고장 난 손목시계를 받아낸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려고 대기 중인 카이전에게 찾아간다. 뤄홍우와 카이전, 둘은 서로 시계와 폭죽을 주고받고 날이 새기 전에 붉은 머리 여인과 남편이 살던 (그러나 타버린) 집으로 간다. 뤄홍우가 주문을 외우고 집이 회전하자, 뤄홍우와 카이전은 키스를 하기 시작한다.
2부가 시작되면서부터 쉴 틈 없이 인물을 쫓아다니거나 종종 인물의 시점이 되기도 했던 카메라는 이때 처음으로 찍고 있던 인물들에서 벗어나 타고 있는 폭죽이 있는 대기실로 홀로 돌아간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타버렸어야 하는 폭죽을 얼마간 응시한다. 이 공간의 규칙을 어긴 듯한 이 폭죽은 이 공간이 사실상 ‘가상 공간'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즉, 이 공간은 뤄홍우가 현실로 돌아가면 사라지는 임시적인 공간이며, ‘지구 최후의 밤'이 은유하는 것처럼 종말적 상황에 놓여있다. (아마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뤄홍우는 현실로 돌아가지 않을까.) 카이전이 말한 것처럼 뤄홍우와 그녀 사이의 관계는 잠깐 뿐의 관계로 종결될 것이고, 결국 뤄홍우와 카이전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뤄홍우와 카이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가 애틋하다면, 그 이유는 단순히 그 둘의 만남이 잠깐이라서라기보다는 뤄홍우가 더 이상 완치원을 만나지 못한다는 종말 의식을 갖고 그녀와의 만남을 포기한 채 (그녀와 닮긴 했지만 분명히 다른) 카이전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 사랑이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인지 비간은 뤄홍우와 카이전이 키스를 하기 시작할 때 카메라를 돌림으로써 이 영화 속에서 그 둘이 키스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겨둔 채 그 둘을 퇴장시킨다. 그리고 뤄홍우와 카이전이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게 하기 위해서인 듯 타들어 가는 폭죽을 더 오래 응시하고자 한다. “그 모든 게 실은 일종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각성을 유보하기 위한 안간힘"(데니스 림)의 순간. 이는 아마 비간이 뤄홍우와 카이전 커플에게 보내는 소박한 위로가 아닐까.
※참고자료
1. 임재철, 「스트라우브-위예의 세계로의 입문」, 『장 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 2004, pp. 24-32
2. 태그 갤러거, 「물질화된 감각」, 『장 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 2004
3. Abbas Kiarostami, 『Lessons with Kiarostami』, Ed. Paul Cronin, 2015
4. 정성일, “당신은 벌써 제 곁에 없습니다 - 정성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추모하다”, 씨네21, 2016년 7월 18일
5. 유운성, “역량과 유령 - 영화에 대한 두 개의 가설", 연속 강좌: 지금, 영화란 무엇인가?, 시네마테크 영화학교, 2017년 9월 12일
6. 유운성, 「파편들」 중 '역사', 『유령과 파수꾼들』, 2018, p. 24
7. 오큘로 편집부, 「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 『오큘로 OKULO』 8호, 2019
8. 데니스 림 Dennis Lim, 「시간을 가로지르는 운동 Moving Through Time」, 『필로 FILO』 9호, 2019, pp. 88-104
8. 데니스 림 Dennis Lim, 「시간을 가로지르는 운동 Moving Through Time」, 『필로 FILO』 9호, 2019, pp. 88-104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