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건 피셔의 <표준 치수 Standard Gauge>(1984)
(영화는 다음의 텍스트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1890년대 초, 토머스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두 대의 상호보완적 기계, 즉 키네토스코프와 수직-피드 키네토그래프를 발명했다. 전자는 동전을 투입해서 영화를 보는 장치였고, 후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모션 픽처 카메라였다. 단 하나의 키네토그래프만 만들어졌다. 두 기계 모두 근대 사진술의 혁신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스틸 카메라와 롤 필름에 사용되기 위해서 말이다.키네토스코프를 통해 단 한 사람만 필름을 볼 수 있었다. 나무 캐비닛 상단에 있는 주철로 만든 접안렌즈를 통해 필름을 내려다보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때, 아래에서 비치는 이미지는 심플 렌즈에 의해 2.5배 확대되었다.
에디슨의 연구소 직원이었던 윌리엄 딕슨이 초기 모션 픽처 실험을 했던 것처럼 새로운 기계에 관한 기술 작업을 이끌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새로운 기계의 필름의 크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했던 사람은 바로 딕슨이었다.
롤 필름은 3.5인치 크기로 제작되었다. 딕슨은 키네토스코프용 필름이 상당히 더 좁아져도, 수용할만한 품질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이미지를 담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미지의 너비를 1인치로, 높이를 0.75인치로 설정했다.
이때 이러한 크기가 채택되어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 즉 거의 40년 동안 지속된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이 명시한 비율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딕슨은 스스로 필름에 천공을 뚫어야 했기에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는 프레임 양쪽에 스프로켓 구멍을 위한 여백을 남겨두고, 가장자리에 4개의 천공(퍼포레이션)을 뚫었다. 이러한 배열은 여전히 표준이다. 필름의 너비는 1.375인치로, 거의 35mm에 가까웠다.
1894년 뉴욕에서 최초의 키네토스코프 상영실이 오픈했다.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기계가 즉각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연말까지 키네토스코프는 북미 전역에 크고 작은 도시에 설치되었다. 키네토스코프는 현대적 감각으로 영화를 상영한 최초의 기계였다.
키네토스코프를 위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그의 통제하에 남아있었다. 에디슨과 그의 동료들은 수요가 많았던 영화에 대한 공급을 독점하고, 그에 따른 비용을 청구했다.
1894년 가을에 이르러 유럽에 키네토스코프가 도입되었다. 형제인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는 사진용 건판 제조자들이었는데, 그들은 키네토스코프의 대중적 인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사업적 기회를 발견하고 영화 공급자인 에디슨 그룹과 경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작과정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가 영사의 방식을 통해서 상영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초기의 야심을 포기하고, 몇 달 만에 영화를 찍고 상영할 수 있는 기계인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
비록 뤼미에르 형제가 키네토스코프의 방식을 따르진 않았지만, 그들은 필름의 너비를 반올림하여 35mm를 유지했다. 1895년 12월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로 대중에게 영화를 상영했다.
동시에 영국의 발명가들은 이에 자극받아 키네토스코프용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먼저 고안하고, 그런 뒤 영사기를 제작했다. 이것들은 발명가들의 초기 목적에 따라 딕슨의 치수(게이지)뿐만 아니라 그의 포맷의 다른 모든 세부사항이 적용되었다.
35mm 너비는 영화 초기에 정해진 것으로, 이는 미국과 해외의 모션 픽처 산업에서 채택되었다. 다른 치수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35mm도 표준 치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original
In the early 1890s the laboratory of Thomas Edison invented two complementary machines, the Kinetoscope and the vertical-feed kinetograph. The first was a coin-operated device for viewing films, and the second was a motion picture camera to make the films for it. Only one kinetograph was constructed. Both machines were made possible by a recent photographic innovation intended for use in still cameras, flexible roll film.
The Kinetoscope showed a film to only one person, who looked down at the film through a cast iron eye-piece on top of wooden cabinet. The image, lit from beneath, was magnified two and a half times by a simple lens.
William K.L. Dickson, an Edison employee, led the technical work on the new machines, as he had led the earlier motion picture experiments at the Edison laboratory. With little doubt it was Dickson who decided what the dimensions of the film for the new machines should be.
Roll film was manufactured in widths up to 3½". Dickson determined that film for the Kinetoscope could be substantially narrower and still register images large enough to provide acceptable quality. He made the image 1" wide, and set its height at ¾".
These dimensions were adopted virtually unchanged as the standard of the silent era, which was to last nearly forty years. The proportions they express have persisted to the present day. Dickson had to perforate the film himself, so he was free to do as he liked. He provided margins for sprocket holes on both sides of the frame and located four perforations in either edge, an arrangement that is still standard. The width of the film was 1⅜", almost exactly 35 millimeters.
The first Kinetoscope parlor opened in New York in April 1894. The new entertainment machine was an immediate popular success. By year's end Kinetoscopes were installed in cities large and small throughout North America. The Kinetoscope was the first machine to show films in the modern sense.
The kinetograph, the only camera capable of making films for the Kinetoscope, remained at Edison's laboratory under his control. Edison and his associates monopolized the supply of films, for which there was great demand, and charged accordingly.
The Kinetoscope reached Europe in the fall of 1894. The brothers Auguste and Louis Lumière, manufacturers of photographic dry plates, were struck by the popular appeal of the Kinetoscope. They saw a business opportunity and set about constructing a camera that would enable them to compete with the Edison group as suppliers of films.
In the course of their efforts the Lumières came to understand that films could also be presented by means of projection. They abandoned their original ambition and within a few months had invented the Cinématographe, a machine that could both take films and project them.
Although the Lumières broke away from the Kinetoscope, they retained the width of its film, rounding it to 35 millimeters. In December 1895 in Paris the Lumières projected their films before an audience of the public for the first time.
At the same time, inventors in England were stimulated first to devise cameras to make films for the Kinetoscope, and then to construct projecting machines. Their initial purpose committed them not only to Dickson's gauge, but to every other detail of his format as well.
The width of 35 millimeters was established at the beginning of film, and it was adopted by the motion picture industry in America and abroad. As other gauges made their appearance, 35mm also came to be known as standard gauge.
[수정내역_220824 업데이트]
답글삭제표현상 다소 어색한 부분을 수정하였다.
"비록 뤼미에르 형제가 키네토스코프로부터 분리되었지만, 필름의 너비는 반올림하여 35mm를 유지했다." ☞ "비록 뤼미에르 형제가 키네토스코프의 방식을 따르진 않았지만, 그들은 필름의 너비를 반올림하여 35mm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