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 알랭 기로디와의 대담 (카이에 뒤 시네마 2024년 10월호 수록)
Rendre possible l’improbable (Entretien avec Alain Guiraudie)
Q1. <미세리코르디아>의 도입부는 <스테잉 버티컬>의 도입부를 연상시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전혀 속해있지 않은 환경에 도착해 그곳을 혼란에 빠뜨리게 됩니다.
A1. <스테잉 버티컬> 속 주인공은 어디에서도 완전한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레미는 귀환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영화, 특히 서부극에서의 고전적 인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가난한 자에게 햇살을>에서도 그런 인물을 만들었습니다. 관객과 영화 사이를 오가며 이 작은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중개자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이기도 합니다. 뭐랄까, 제가 작은 시골 마을로 돌아온 것이기도 하죠. 말하자면, 혼란은 제레미의 존재와 그가 왜 머물고 있는지 우리가 궁금해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뱅상의 실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프랑스 3에서 방영된 <살인 사건…>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처럼 시작됩니다. (웃음)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상태로 이행하기 전에는 범죄물의 느낌이 들기도 하죠.
Q2. 대사에서도 희극적인 게 느껴집니다. 가령, 꽤 긴장되는 순간이 지난 뒤 신부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라고 말할 때요.
A2. 영화관에서 그런 대사를 들은 지도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고, 괴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오래전부터 써 온 수사적 표현입니다. 가령, 경찰관이 “행복하길 바랍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커플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신화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을 섞고, 큰 실존적 충동 속에 있고, 일상적인 것, 즉 어렸을 때 들었던 표현을 다시 도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늘 일반 상식의 힘, 격언 속에 들어 있는 심오함의 힘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Q3. 인물의 반복적 등장이 희극적인 면을 더해주기도 하죠.
A3. 네, 인물들이 마치 마법에 의한 것처럼 나타납니다. 이러한 연극성은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완전히 현대적이지도, 완전히 고대적이지도 않은, 일종의 시대를 초월한 마을의 전형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전개됩니다. 사람들은 시나리오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그게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우려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저는 이 영화의 인위적 측면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휴대전화 없이, 가끔은 모르는 마을에서, 우연한 약속으로 만나는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언젠가 궁금해한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시골에서는 그런 일이 더 잘 일어나는 것 같아요. 항상 누군가를 만나게 되죠. 그리고 저는 시나리오상으로 지극히 우연적이고 믿을 수 없어 보이는 것이 영화의 완성도를 전혀 훼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임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그것이 작동되게 하기 위해 연출의 측면에서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관객과의 계약은 계속 유지되죠.
Q4. 이러한 즉흥적 등장[이라는 방식]을 통해 준(準)-조합적 차원에서 인물과 욕망의 촘촘한 망을 짤 수 있었군요.
A4. <노바디즈 히어로>와 <오래된 꿈>에서 그런 방식을 많이 썼죠. 하지만 저는 도식이나 계획을 종이에 적어 가며 작업하진 않습니다. 물론 저는 몇 가지를 미리 결정하기는 했습니다. 가령, 결말부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계획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저는 어떤 행동이 그 이전에 했던 것으로부터 비롯될 때를 좋아합니다.
Q5. 마지막 대사 이후에 유보적 결말을 재차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A5. 네, 상영회에서 사람들이 “앗, 끝난 건가?”라고 말하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스테잉 버티컬>의 경우가 더 유보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해결책이 없다’는 아이디어, ‘영화 이후(un après le film)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선호합니다. 저의 방식은 지적이고 연역적인 만큼 직관적이기도 합니다. 저는 또한 이전 영화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제레미와 월터의 관계가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데, <스테잉 버티컬>에서 다미앙 보나르가 연기한 인물과 아버지 장-루이 사이의 관계가, 돌이켜 보면, 조금 억지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죠.
Q6. 월터가 등장한 순간부터 그에게서 어떤 동요가 느껴집니다. 특히 월터가 고정된 채 제레미를 묘하게 응시하는 클로즈업 장면에서요.
A6. 제 영화는 타자를 ‘붙잡는/이해하는 것(appréhension)’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저는 ‘붙잡다/이해하다(appréhender)’에 함축된 이중적 의미가 마음에 듭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길] 무서워하는 것, 즉 욕망과 두려움 말입니다. 월터에게는 호기심은 있지만, 욕망의 응시는 없습니다. 그는 솔로이긴 하지만, 게이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왜 이 남자에게 끌리는지 의아해합니다. 월터는 제게 통속적인 상식의 화신입니다. 그의 반응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며, 그는 스스로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집니다. 제레미의 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월터는 결국 그를 거부하는 유일한 사람이죠.
Q7. 월터는 제레미에게 날카롭게 반응한 뒤에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일견 성립할 수 없어 보이는 커플이 된 제레미와 신부를 경찰관이 마주했을 때처럼요.
A7. 지금은 2024년입니다. 우리는 이미 시골 곳곳에 있는 게이 신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도 옳은 것입니다. 그런 것에 인물이 놀라게 만드는 영화는 일차원적이며, 인물의 수치심(pudeur)이나 최소한의 염치(discrétion)조차 존중하지 않는 나쁜 텔레비전용 영화일 것입니다. 저는 최소 공통분모에 기반한 상투적인 캐릭터, 즉 권위를 지나치게 받드는 바보 같은 경찰관을 설정하는 그런 저속함을 거부합니다. 근무 중일지라도 파스티스를 마시는 경찰관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그렇긴 해도, 범죄 이후 제레미의 반응은 완전히 비정상적입니다. 그리고 마르탱이 그를 받아들이는 것도 정상이 아니죠.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과 비교하면 모순적인 부분이 많아요. 하지만 제가 근본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현실을 가지고 작업하지만, 그것을 재창조하는 것이죠.
Q8. <미세리코르디아>를 통해 당신은 더 어두운 차원 역시 다뤘습니다. (『카이에』 796호에 따르면) <호수의 이방인>에서보다 어둠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요.
A8. 비용이 많이 드는 밤 시간대를 피하기 위해 그 아이디어는 뒷전으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제레미와 뱅상의 싸움을 밤에 촬영하고 싶었어요. 그랬다면 더 어두운 영화가 될 수 있었겠죠. 예전에는 훨씬 더 많은 아메리카의 밤[의사야경, 즉 데이 포 나이트 기법]과 보름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보름달이 뜬 밤을 위해 헬륨 풍선을 띄우거나, 헤드라이트를 키는 등 숏 안에 광원을 둠으로써 매우 밝아지게 된 밤의 인위성을 점점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조명을 위해 발전기가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뱅상의 시체를 파내는 장면은 해 질 녘에, 아직 빛이 조금 남아 있을 때 촬영했고, 이후 색보정 단계에서 좀 더 어둡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장면을 더 찍고 싶었어요. 언젠가는 어둠, 즉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진짜 밤을 마주해야 하겠지요. 라리외 형제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랑을 나누거나>에서 그러길 성공했습니다만, 그건 밤중에 시각장애인의 시점이었기 때문에 어둠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었죠. <호수의 이방인>의 결말은, 어둠 속에서 끝나기 위해 희미해지는 인물의 실루엣을 통해 제가 정말로 밤을 향해 다가간 순간이었어요. 아마 망막의 잔상 때문인지 그 실루엣이 끝까지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죠. 한편, 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완전히 어둡거나 단지 달빛만 비치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어렵네요. 클레어 매튼과 함께 <스테잉 버티컬>에서 아기를 떡밥(appât)으로 쓰는 시퀀스를 찍었는데, 그때는 운이 좋게도 하늘이 맑고, 달이 너무 늦게 뜨지도, 너무 일찍 지지도 않아서 촬영할 수 있었죠.
Q9. <호수의 이방인>에서 밤의 존재는 죽음의 존재와 맞닿아 있습니다.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설교하는 신부의 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A9. 신부가 양심과의 타협을 한탄할 때, 그건 그를 통하여 제가 얼마간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늘 프랑스인 한 명의 죽음이 왜 팔레스타인인 4만 명의 죽음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은 현재 살아있는 자들을 그래도 염려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정말 죽음 없는 삶을 꿈꿀 수 있을까요? 서유럽과 미국이 ‘제로 리스크’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집단보다 개인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 즉 우리는 죽어서는 안 되는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 사고, 심지어 살인이 없는 세상에 제가 결국 관심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소중합니다.
Q10. 신부는 파멸로 향하는 세상에 대한 다소 가혹한 전망을 내놓습니다.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A10. 저는 영화를 만드는 것 또는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뼛속까지 부정하기는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인류가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인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먼저, 영화는 분명히 제 생계 수단입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영화를 찍는데, 사실 이는 완전히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그것이 거대한 대문자 역사(Historie)에 얼마간 편입되기를 바라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혼자서 살아남겠다는 이러한 생각은, 삶이 조만간 끝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사라지게 되겠죠. 그 미래가 이렇게 가까워진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사람은 트럼프, 네타냐후, 미셸 바르니에와 같은 이가 아닙니다. 칠레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 제가 참석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아비 모그라비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죠. “아니요. 다행히도 현재 배설되고 있는 온갖 똥을 보면 말이죠.” 가장 많이 팔리는 영화는 대개 흑인과 아랍인 적을 상대로 승리하는 전쟁 영웅주의를 찬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모도바르와 모레티의 영화는 제게 힘이 되었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영화는 솔직히 세상, 타인들을 이해하는 데 쓸모가 있긴 합니다만, 우리가 겪고 있는 재앙, 특히 생태적 재앙 앞에서는 그저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Q11. 초창기에는 영화 속 연기가 상당히 정형화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절제하면서 좀 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습니다.
A11. 저는 아주 단순한 연기로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를 좋아합니다. 카트린 프로의 경우, 우리는 [촬영] 시도를 여러 차례 하진 않았으나 리허설을 가졌고, 그녀는 통속극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매우 빨리 이해했습니다. 그녀처럼 연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연출할 때는 얼마간 그 사람을 빼내려고 시도해야 하는데, 그녀가 종종 제게 이렇게 묻더군요.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요?” 또한 편집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배우들의 방향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특히 테이블을 중심으로 하는 장면들에서 말입니다. 거기서 편집은 레이스를 짜는 것처럼 섬세하게 이뤄졌죠. 젊은 시네아스트일 때, 그리고 작가적 욕망(velléité)이 있을 때 독단적이게 됩니다. 초창기에 저는 [자신이 맡은] 배역과 거리를 두고 단조로운 리듬을 “해석”하지 않는 배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란 상호 침투하는 두 개의 독백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특히 <오래된 꿈>에서는 모든 것을 원 테이크나 투 테이크로 찍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카이에』처럼 말하기 위해 열렬한 브레히트-로메르주의자이기도 했죠. 나중에는 그런 성향이 누그러지게 되었습니다.
- 본 대담은 2024년 9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로맹 르페브르에 의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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