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 Le Parc〉(2016)

• 참고1: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은 마테리알(ma-te-ri-al) 5호에 실린 나의 글이다. 

• 참고2: 현재 해당 글은 마테리알 홈페이지에서 열람 가능하다. 링크를 아래에 첨부해둔다. 


본문 링크

영화 링크

[리뷰] 침묵을 통한 침묵 들여다보기: 킥 더 머신 다큐멘터리 콜렉티브의 〈침묵 Silence〉(2020)

• 참고: 〈침묵 Silence〉(2020)은 옵/신 스페이스에서 2021년 10월 29일부터 2021년 11월 14일까지 감상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 ☞ 옵/신 페스티벌 사이트)


2021년 10월 29일 금요일 13시, 옵/신 스페이스에서 킥 더 머신 다큐멘터리 콜렉티브(Kick the Machine Documentary Collective)의 〈침묵 Silence〉(2020)을 봤다. 〈침묵〉은 〈메모리아 Memoria〉(2021)와 더불어 올해 본(혹은 ‘체험’한) 것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광주 ACC의 의뢰를 받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이끄는 팀)이 제작한 침묵은 ’1976년 10월 6일 탐마삿대학교 학살 사건’에 관한 2채널 영상설치작품이다. 한 스크린(왼쪽 스크린)에는 다종다양한 사진, 영상 푸티지들을 비롯한 무빙-이미지가, 다른 스크린(오른쪽 스크린)에는 (디스토피아적 소설의 분위기를 풍기는) 텍스트-이미지가 주로 나열된다. 

두 개의 스크린은 옵/신 스페이스 지하, 어두운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이미지는, 물론 한 공간 내에 존재하긴 하지만, 물리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즉, 여기 이미지와 저기 이미지는 일견 ‘직접적으로/상호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두운 공간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두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이기에, 자연스럽게 혹은 어쩔 수 없이 그 두 이미지를 이어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어본다’라는 행위다. (문득 2018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아피찻퐁이 선보인 장소특정적 미술작품 별자리 Constellations의 감상 방법이 떠오른다. 구 국군광주병원 내 특정 공간, 사물, 이미지 등이 ‘별’이라면, 여러 개의 별을 이어서 하나의 ‘별자리’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관람객의 몫이다.) 어두운 공간에 붕 떠 있는 듯한 두 스크린의 이미지들을 이어보는 것은 순전히 나의 문제, 정확히는 나의 의지의 문제다. 그런데 일견 ‘직접적으로/상호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이미지를 이어보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천하면, 그 두 이미지가 기묘하게 공명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침묵의 초반부. 왼쪽 스크린에는 누워 있는(그러나 죽은 것인지, 잠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자의 이미지가 나열되고, 오른쪽 스크린에는 ‘어느 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은 텍스트-이미지가 나열된다. 이 이야기(의 초반부)는 대강 다음과 같다: ‘그 누군가가 꿈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잠을 자며 꿈을 꾸려고 한다. 그러다 전국 꿈 대회가 열린다. 그 누군가의 꿈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왼쪽 스크린의 이미지와 일견 무관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무관하진 않다. ‘어쩌면 이 일련의 이야기는 왼쪽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기반으로 아피찻퐁이 픽션화한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느낌’이 불쑥 든다. 

계속 여기 이미지와 저기 이미지를 이어보다 보면, 어떤 링크 지점을 마주하게 된다. 그 지점은 바로 ’욕설=음악 코드’를 표기한 텍스트-이미지가 나올 때다. 이때부터 왼쪽 스크린과 오른쪽 스크린이 동기화된다. 이미지가 양쪽 스크린에서 번갈아 나오기도, 동시에 나오기도 한다. 그러다 오른쪽 스크린에는 더 이상 이미지가 나오지 않고(즉, 블랙아웃 상태가 되고), 왼쪽 스크린에만 점점 확대되는 빨간 원의 이미지가 나온다. 이 압도적 순간 이후에, 왼쪽 스크린에 ’10.6 사태’ 영상 푸티지들이 가감 없이 연쇄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오른쪽 스크린에 나타나는 텍스트-이미지의 이야기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이야기(의 후반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가 어둠 속으로 도망친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 불꽃놀이에 예산을 모두 쓰고, 다른 사람들은 그 불꽃놀이 소리 때문에 귀를 막는다. 그 누군가는 더 이상 이미지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다.’

죽임을 당한 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고, 죽인 자는 침묵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강제된 침묵과 의도적으로 선택된 침묵. 여기에 아피찻퐁은 또 다른 침묵, 즉 수면이라는 축을 추가하여 ‘침묵을 통한 침묵 들여다보기’를 행한다. 결국 침묵은, ‘수면의 정치적 아이디어’[1]를 근간으로 하는 픽션을 (무빙-이미지화하지 않고) 텍스트-이미지화하고, 이를 학살의 가해자들이 숨기려고 했던 ‘바로 그 이미지’와 이어보게 만듦으로써 잊힌 기억과 역사를 지금, 여기에 적극적으로 (재)소환하는 작업이다. 침묵은 학살의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이 학살을 방관한 자들, 혹은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 모두를 저격하고 있다. 욕설을 드러내는 데 마다하지 않는 태도, 혹은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 그대로 투영된 침묵은 아마도 아피찻퐁의 가장 노골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주

[1] ‘수면의 정치적 아이디어’, 이는 아피찻퐁의 표현이다.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수면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영화, 어둠에 잠긴 방 안의 장치와 연관되어 있어요. 우리는 수면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미지의 세계 내부로 들어갈 수 있죠. 그 안에서 깨어있는 삶에 대한 실마리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맞아요. 어떤 의미로는 수면은 무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들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Cahiers du cinéma, janvier 2019, 번역문)

※사진

All photos were taken by KIM Do-Hyung (in Ob/Scene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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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 『투명기계』 저자 김곡의 강의: 영화와 화이트헤드(2018.12.13.)

 

▲"『투명기계』 출간 기념 김곡 저자 님 특강 : 영화와 화이트헤드"(2018.12.31.) https://youtu.be/g5rMI2t8eow

• 참고1. 본문은 유튜브 채널 "다중지성의 정원"에 2018년 12월 31일에 전체공개로 업로드된 김곡의 『투명기계』에 관한 강의의 전사(轉寫)다. (영상과 강의의 저작권은 다지원과 김곡에게 있다.)
• 참고2. 단, 영상의 앞부분(서론, 약 10분)과 뒷부분(질의응답, 약 30분)은 제외하였다. 또한 문어체를 채택하였으며, 강의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 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  ] 안의 내용은 내가 추가한 정보다. 마지막으로 전사의 특성상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양해를 구한다.
• 참고3. 베르그송의 원뿔도식을 김곡은 뒤집어서 사용한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김곡의 답변(영상 1:38:20 지점)을 참고하라.


-들어가기에 앞서, 여담(혹은 사담)- 

나는 2018년 11월 『투명기계』를 구매했다. 구매 직후 책을 펼쳤더니, 김곡이 끊임없는 철학적 용어의 나열을 통해 (성찰적 태도를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며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끔 '유혹lure'을 하고 있길래, 거의 미친 듯이 '홀려haunted'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당시에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완독을 하진 못했다. 크게 두 가지의 난점 때문이었다: 하나는 (이 책의 핵심 두 축인)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철학. 다른 하나는 언급되는 방대한 수의 영화(작품, 비평, 이론 등). 따라서 『투명기계』의 가치와 퍼텐셜은 충분히 인지했으나,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난점 때문에 『투명기계』의 철학에 관해서는 피상적인 이해만 할 수 있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철학과 학부생 수준에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심도 있게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책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영화를 단번에 다 보기 위한 일련의 '여건datum'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다시 『투명기계』를 읽게 된 것은 2019년 10월 벽제 경찰학교 입교하면서부터다. (벽제에서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도, 영화를 마음대로 볼 수도 없는데, 이 책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자대 배치 후, 일경(一警)이 되고, 『투명기계』의 보론(補論)인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이 발행되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의 선물.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을 읽으니, 『투명기계』란 타이틀의 작업이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즉 김곡의 의도가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군 복무 기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을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투명기계』에 관한 강의가 유튜브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강의를 본 적은 없었다. 『투명기계』의 강의, 지금 내가 전사한 이 강의를 집중해서 처음으로 본 것은 전역을 석 달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그전까진 졸업 요건인 DELF 시험 패스를 위해 공력을 몰빵해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느라, 많은 시간을 철학과 영화 공부에 투자할 수 없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투명기계』를 완전 정복'할 수는 없다. 이 강의는 말 그대로 '트레일러trail-er'에 가까운 강의다. 달리 말해, 김곡이 이 강의에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매력적으로 (그리고 아마 내가 아는 한 어떤 논문이나 입문 서적보다 쉽게) 설명해서, 그 둘의 철학을 공부하게끔 '유혹lure'한다는 것이다. 마치 김곡은 (다소 유치한 표현이지만) 철학 전도사 역할을 이 강의에서 기꺼이 맡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강의는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경유하여 다시 『투명기계』 내로 들어가게끔 인도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강의의 후반부는 (『투명기계』 철학의 핵심 중 하나인) '내러티브narrative'에 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나는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있다. 이제, 전사한 『투명기계』 강의록을 탐독하면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경유한 후 『투명기계』 안으로 다시 들어갈 일만 남았다. 『투명기계』는 여러 번 반복해서 (재)입장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강의록- 

[영상 10:35 시작] (...)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비교하면서 시작하고 싶다. 왜냐하면 (둘은) 너무 대조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우리의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사로잡고 있다. 한 20년째 말이다. 그 개념들에 우리가 가장 익숙하다. 말하기 좋게 하기 위해 베르그송을 이용했다. 사실 이 책[『투명기계』]은 베르그송과 큰 관련은 없다. 중간중간 베르그송을 인용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나는 베르그송을 정말 좋아한다. 옛날에 공부 좀 해보겠다고 깝죽대던 시절에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책이 『물질과 기억』 1장이다. 너무 충격이었다. 영화로 치면 제이슨 본 시리즈 보는 느낌? 정말 액션 영화에 가까웠다. 그때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더 빡센 영화를 봤다. 그게 화이트헤드다. 물론 베르그송에 비해서 액션 영화는 아니다. 여하간 둘을 비교하면서 시작해보겠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철학자다. 베르그송이 등장하기 전까지 엄청났다. 운동을 부정하는 경향이 말이다. 기원전 500년 전부터 내려오는 문제가 있다. 엘레아 학파의 제논의 역설이다.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의 여러 가지 변주가 있다. 내가 알기로 스무 개 이상이 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형태만 하나 추출하겠다. 화살을 쏴도 날아가지 않는다는 문제다. 여기 목표 지점이 있고, 여기 시작점이 있다. 이쪽에서 화살이 이리로 가려면 절반(M1)을 지나야 한다. 또 이 지점(M1)을 가려면 절반(M2)을 지나야 한다. 또 절반(M3)을 지나야 한다. 이런 M은 무한하다. 그런데 시작점에서 목표점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은 유한하다. 유한은 무한보다 작다. 무한은 유한보다 크다. 그래서 화살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제논의 역설의 핵심이다. 운동은 없다는 것 말이다. 이 논쟁에 많이들 도전했다. 물론 누가 화살을 쏴서 죽는 것을 보여주면 '화살이 날아갔구나' 인정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존재 일원성의 문제이다. 운동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는 하나다. 이것의 보조 논증으로 등장한 문제다. 파스칼이나 콩디약 등이 도전했다. 그중에 최고가 바로 베르그송이다. 가장 잘 돌파를 해서 빅히트를 쳤다. 흥행대박이다. 나도 보고 감탄했다. 베르그송의 논파는 이것이다. ‘너는 운동이 지나가는 궤적과 운동 자체를 혼동하고 있다.’ 한마디로, 무한과 유한은 다른 층위로서 비교 불가능하다. 이것이 논파의 핵심이다. 전제를 깐 것이다. 반대로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지속은 분할 불가능하다. 이것을 많이 혼동한다. 지속은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말이다. 지속은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속은 분할하면 그 본성이 바뀌는 것이다. 한마디로, 순수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동과 시간은 또 다르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공간적인 표현을 뜻한다. 이런 것들을 개념적으로 분류하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이것이 실제로 논파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가 논파했다고 하면 검증하는데도 10년 정도 걸린다. 베르그송의 책들이 읽히면서 슬슬 검증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생각했다. 베르그송에 대한 인기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드디어 빠져나왔다. 유럽인들이 환호했다. 훌륭한 논파다. 

 베르그송이 진짜 말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 강의 주제가 아니다. 일단,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르그송은 생명이 궁금했다. 생물학자에 가깝다. 책들을 읽어보면 말이다. 진화론에 대한 사유 등. 『물질과 기억』을 요약해보면, 생명은 기억하는 물질이다. 이게 그 책의 주제다. 기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온 것이 혁명적이었다. 기존에는 대부분 자극반사, 신체, 무의식 이런 것을 다뤘는데, 베르그송은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오히려 피한다. 자신의 선배들과(프로이트 등) 차별점을 두기 위함이 아닌가. 어쨌든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빅히트를 쳤다.

 『물질과 기억』 3장에 나온 그 유명한 원뿔 얘기를 해보겠다. 원뿔이 혁명이었다. 이 책[『투명기계』]에서 나오는 원뿔은 베르그송의 원뿔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도 다 이렇게 생겼다. 원뿔은 영화한테 지배적이다. 영화는 이 원뿔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원뿔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 책[『투명기계』]을 쓴 것도 아니다. 이 원뿔은 존재의 감옥이다. 우리도 못 빠져나간다. 우주로부터 이미지 (베르그송은 이미지라고 말하는데) [즉,] 자극들이 온다. 생명체는 자기한테 필요 없는 것은 투과하고 필요 있는 것은 쟁여둔다. 굴절, 반사라는 표현을 쓴다. 매질로 표현한다. 빛이 이렇게 오다가 굴절을 하는데 어느 순간에는 반사가 되지 않겠느냐. 임계각, 이것이 잠재성의 탄생각이다. 요즘 말로 하면, 잠재태의 탄생각이다. 반사되면 반사상이 남는데, 고게 우리가 말하는 잠재태다. 잠재태가, 생명이 진화하면 진화할수록, 많은 잠재태가 쌓인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이 더 많아지고, 사유와 행동이 더 복잡해지고, 행동의 체계가 더 다각화되기 때문이다. 잠재태가 계속 쌓이기 시작한다. 파일 폴더에 우리가 작업을 많이 할수록 네이밍이 쌓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잠재태가 쌓이면 쌓일수록, 근데 이것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대류 운동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들끼리 대류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이렇게 와서, 이렇게 빠져나가는 것이다. [영상 18:43 참고. 김곡이 원뿔에 그린 그림.] 그래서 지속이다. 이것을 밝혀낸 것이 혁명이다. 그전까지는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사유와 운동』과 『물질과 기억』에서 계속 비판한다. 경험론, 합리론을 다 깐다. 칼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자토이치가 눈감고 다 썰어내는 것 같다. 장난이 아니다.

 그전에는 지속을 부분만 채가서 단편, 파편들만 채가서 대상을 재구성하거나, 이것이 경험론이다. 자아의 동일성을 재구성하거나, 이것이 합리론이다. 칸트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다. 얘네들의 모순을 막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칸트다. 다 쪼갰다. 이 둘은 서로 싸우지만, 베르그송이 보기엔 똑같았다. 지속을 잘라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제논이 하던 짓을 고스란히 철학에 옮겨왔다. 그래서 베르그송이 비판한 것이다. 베르그송이 시간이 이렇게 와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와 관련 해선 첫 번째 논문과 두 번째 논문에선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물질과 기억』에서 실증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기억이다. 시간이 왔다가 돌아서 나간다. 끊기는 법이 없다. 다만 얘네들이 행동체계가 복잡・다양화할수록, 이것이 더 내려가서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부분까지 내려간다. <인셉션> 생각하면 된다. 층수가 막 이렇게 있는 것. 충분히 내려가게 되면 밑에는 추상화가 진행되어서 이것들은, 베르그송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스스로 확장하고 있다.' <인셉션>으로 치면, 빌딩이 막 날아다니는 것이다. 흐물거리는 것이다. [원뿔이] 무한히 팽창하면, 여기는 우리가 도저히 갈 수 없는 평면이 생긴다. 평면이라는 말은, 베르그송의 용어를 따온 것이다. 신기하게도 쁠랑[plan]이라는 말을 쓰는데, 꿈의 평면, 즉 쁠랑 뒤 헤브[plan du rêve]라는 말을 한다. 쁠랑은 프랑스말로 샷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이 번역을 많이 오독했다. 구도, 기획, 계획 등으로 말이다. 사실은 샷이다. 들뢰즈, 가타리도 그 표현을 쓴다. 쁠랑 드 꽁시스땅스[plan de consistance], 즉 일관성의 샷…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일관성이라는 말은 부족한 것 같다. 모든 것이 하나로… 우주의 모든 것이 다들 참여할 수 있는 공통의 판, 이런 것을 뜻한다. 다 같이 참여하는, 모든 존재자들이 다 같이 참여하는 것이다. 이 무한한 평면이, 원뿔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베르그송은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들뢰즈의 얘기다. 얘네들이[원뿔들이] 하나의 판으로 다 이어졌을 때 이것이[이어진 밑면이] 쁠랑 드 꽁시스땅스이다. 공속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이 든다. 굳이 번역하자면, 공속샷이다. 하나의 롱샷인데, 영화로 표현하면, 하나의 롱샷이 있는데, 거기 있는 모든 존재자들이 공통적으로 속해있는 공속샷이다. 베르그송에게 이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다. 주관적인 극한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튀어나오는 건가 거기에 관심이 있다. (…)

 [원뿔 윗면에] 행동의 평면, 쁠랑 드 락씨옹[plan de l'action]과 [원뿔 밑면에] 꿈의 평면이 있다. 이 꿈은 너무 꿈같아서 나중에 기억도 안 된다. 회상이 안 된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끄집어내지 못한다. 행동의 평면은 기억을 이용하긴 한다. 단, 이용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이용한다. 나한테 필요한 것만 이용한다. [예를 들어,] 길 가다가 첫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한다. 줌인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왜 그럴까? 요즘 내가 외로운 것이다. 필요한 것이다. 첫사랑의 그 모습이.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기억을 소환해낸다. 그것이 회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뿔 밑면에] 순수기억이 있다. 기억이라는 말을 회상이랑 잘 구분하지 않고 썼다. 그것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나는 이 구분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화이트헤드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원뿔 안에 ‘회상’을 적는다.] 어쨌든 시간은 돌아나가는 지속이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하고자 했던 구도다. 순수기억은 잠재태다. 왜 순수한가? 회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이것이 왜 이쪽으로 못 올라오는 것인지에 대해서 베르그송이 많은 말을 하진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그것이 억압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사회적인 측면에 관심이 없었다.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순수기억이 왜 안 떠오르느냐에 대해선 형이상학적인 답만 내놓는다.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다. 다 형이상학자들이다. 

 지속, 변화, 생성. 왜 생성하는가? 이것 자체가 생성이다. 기억을 쟁이고, 새로운 기억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겠다…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과 (내가 앞으로 할 즉,) 나에게 주어질 시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동, 생성이다. 그것이 하나의 존재의 출현이다. 그것들을 내가 더 적극적으로 할 때, 능동적으로 할 때, 그것을 생명이라고 말한다. 돌멩이에게도 기억이 있는가? 기억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돌멩이는 기억이 없다. 분명히 말한다. 베르그송은. 이것은 생명의 특권이기도 하다.

 내가 화이트헤드를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베르그송을 약 올리는 것인지, 다 반대로 얘기한다. 시간은 소멸이다. 시간은 무엇보다도 소멸이다. (화이트헤드) 자신이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플라톤과 로크로부터 이 테제를 취했는데. 시간은 소멸이다. 시간이 흘렀음을 어떻게 알까? 사진 한 장을 본다. 왜 사진을 보면 우리가 우수에 젖는가? 애도의 시간을 갖는가? 그 존재는 과거로 흘러가버려서다. 그 사진은 그 자체로 현장부재증명 같은 것이다. 지금 이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왜 푸티지 영화들 보면서 애도의 감정을 갖는가? 파운드 푸티지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혹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왜 애도를 하는가? 영화 전체가, 혹은 절반이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는. 심지어는 그 플래시백이 하도 빈번하고 과다해서 어디가 현재고... 현재에서 과거로 회상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이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다. 심지어 분장을 안 하고 있을 때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얘기하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님은 세계 최고의 플래시백 작가이다. 그냥 위대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짝코> 같은 것을 보면, 배우들이 나이를 먹은 것을 똑같은 동일 인물이 연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플래시백이 하도 교차, 과다, 빈번해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지 않고, 옷 갈아입고 공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이 사람이 왜 저기 와 있지?’ 이런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그만큼 현재와 과거가 막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임권택 영화의 특수성이다. 80년대 이후를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왜 그런 것을 보면서 애도의 시간을 갖는가? 흘러가 버려서다. 그런 의미에서 소멸이다. 시간은 생성 아닌가? 생성이 맞는데? 소멸도 맞다. 이제 미치고 팔짝 뛰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 얘기를 특히 안 한다. 약간 약 올리려고 하는 것 같이 나는 사실 느껴진다. 개념들이 다 반대로 간다. 지속이 아니라 영원을 얘기하고, 변화가 아니라 불멸을 얘기하고, 생성이 아니라 소멸이다. (이것은 내가 쓰는 단어가 아니라 화이트헤드가 쓰는 말이다.) 불멸, 소멸, 영원.

 사실 베르그송이 영화적, 시네마토그래픽끄[cinématographique]라는 말을 쓸 때는 너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라, ‘나쁜 놈아’ 이런 뜻으로 쓰는 것이다. 영화적이라는 말을 언제나 욕처럼 쓴다. 베르그송은. 내가 막말하는 것이긴 하다. 일종의 베르그송이 우리의 사유의 방식이 했던 깡패짓을 얘기할 때 언제나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왜 영화적인가? (아까 말을 했던) 엘레아 학파나 칸트나 경험주의자나 등등이 했던 짓거리. 이 부분들을 쪼개서 합치면 진짜 운동이 나온다는 재구성. 순간을, 부동적인 것을 가지고 운동을 만들어낸다는 이 행패를, 베르그송은 영화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시네마토그래픽끄[cinématographique], 영화적, 영화론적, 번역할 때는 기계론적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실제로 ‘cinématographique’라고 썼다. '영화적'이라는 말은 베르그송이 경멸할 때 쓰는 말이다. 왜 이게 영화적인가? 영화의 필름스트립을 생각하는 것이다. 필름스트립은 어떻게 생겼는가? 베르그송이 바로 혐오하는 그 방식으로 생겨먹었다. 신기한 것이다. 베르그송이 출현할 때, 영화도 함께, 거의 함께 출현했다는 것은, 되게 우연과 필연 중간쯤 되는 운명 같은 것이다. (…) 베르그송이 많이 화가 났다. 우리가 기계론적 사유, 영화적 사유에 사로잡혔다고 봤다. 시간의 공간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바로 요거로부터[필름스트립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선[베르그송] 욕을 먹던 것이 여기선[화이트헤드] 왕이 된다. 필름이 후루룩 지나간다. 테이크 업 쪽으로 계속 잡아당긴다. 이쪽으로, 과거쪽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소멸이다. 하지만 여기 게이트가 있다고 치면, 소멸하는 것은 그냥은 못 죽는다. 어떤 사람도 그렇지만, 그냥은 죽지 않는다.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죽을 때 무슨 제스처라도 하고 죽는다. 피라도 한 번 뿜고 죽는다. 소멸할 때 그냥 죽지 않는다. 필름스트립도 마찬가지다. 잔상이라도 남긴다. 이것을 ‘불멸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정확한 표현은, ‘객체적 불멸성’이라고 부른다. 이 사태를 말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다. 왜 불멸하는가? 이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소멸하는 것은 영원히 불멸한다. 얘가 그다음 포토그램 위에 오버랩, 그러니까 이중노출… 위로 얹어진다면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원히 남는다. 마치 우주의 한 켠에 거대한 서버실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나가 딱 사라지면 계속 챙기는 것이다. 이것이 객체적 불멸성이다. 이것은 현실태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포토그램을 현실적 존재라고 부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태라 생각하면 된다. 이 용어를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화이트헤드의 용어라서이다. 너무 낯설다. (…) 잠재태라는 말은 되게 익숙하다. 이것과 똑같은 뜻으로, 사실은 다르지만, [화이트헤드는] 영원한 객체라는 말을 쓴다. 어색해서 그렇지 읽다 보니 괜찮다. 불멸하는 사태는 하나의 영원한 객체를 꼭 불러들인다. 그것이 잠재태다. 하나의 영원한 객체로서만 간다. 신기한 것이 왜 ‘영원’이라는 말을 쓰는가? 왜 영원한가? 얘는 시간 바깥에 있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애써 설명했는데, 화이트헤드는 바깥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베르그송이 애써 다 만들어 놨더니, 여기 하나 더 있다고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이다. 시간의 바깥을 항상 상정한다. 화이트헤드가 말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아직도 플라톤주의의 위대한 계승인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플라톤주의를 막 까고 있지만, 화이트헤드는, 사실은 플라톤주의의 가장 그 초근대적 사유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이 있다면, 시간은 소멸된다면, 소멸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게 영원, 영원한 객체다. 얘는 소멸하지 않는다. 

 퀴즈. A.E. actual entity, 현실적 존재다. 오영환 선생님은 현실적 존재라고 번역했다. 영원한 객체[영원한 대상], E.O. eternal object. 나는 한 50년 뒤에는 죽을 것이다. 나는 현실적 존재다. 소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잘살았다면 이름이 남을 텐데, 이름으로서의 나는 영원한 객체다. 이런 식이다. 별로 어렵지 않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베르그송의 원뿔도식을] 화이트헤드가 변용하는 방식이다. 영원한 객체는 (되게 이상한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러면 굳이 왜 시간 안에 넣지 않고, 원뿔 안에다 넣지 않고, 원뿔 밖으로 왜 자꾸 빼려고 하는가? (…) 순수한 잠재태라는 말을 쓴다. 화이트헤드식으로 영원한 객체도 순수한 잠재태. 단어도 똑같다. 'virtualité[잠재태]'. 그런데 순수하다. 꼭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기한 말을 많이 하는데, 투명하다고 말한다. 물론 진입 방식에 있어서의 투명성이다. 베르그송은 반대로 말한다. 순수기억, 얘는 빛을 쬐도 안 올라오는 놈이다. 한마디로 이쪽으로[원뿔 아래쪽으로] 갈수록 어두워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존재는 빛을 쪼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일종의 계몽주의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다. 이것은 내 표현이 아니다. 빛을 쬔다는 표현은 베르그송 본인의 표현이다. 빛을 쬐어, '너 걸렸어?' 그러면 빛을 쬐는 목적: '내 앞에 대상이 나타나서 첫사랑을 기억해야겠다.' 왜냐하면, '내가 외로우니까.' '나의 첫사랑.' '95년 그날 우린 행복했었지.' 소환해서 [행동의 평면 쪽으로] 착 붙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재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불투명하다. 그런데 내가 혹시 못 보고 지나쳤거나, 내가 너무 나의 일상생활에는 상관이 없어서, 이 불투명성이 너무 어두워지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깜깜이로 파묻히는 것은 결국 소환이 안 된다. <인셉션>에서의 그 수면기계가 발명되지 않는 한. 그런 의미에서 잠재태는 빛난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보면 과장이다. 베르그송이 빛난다고 표현할 때는 순수지각론에서 한정해서만이다. 불투명이다. 빛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가 빛난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빛에 별로 관심이 없다. 투명하다고 말한다. 순수하다. 이런 말을, 이상한 말을 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영원한 객체를 머리에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무한히 떠올려 봐라. 이것은 영원한 객체의 모든 것이라고 떠올려도, 거기에는 항상 남는 여분이 있다. 이런 말도 (있다), '신도 영원한 객체를 창조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영원한 객체의 무한 집합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가 태동할 때, 그것은 무한 공급된다. 물론 여기도 원뿔이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을 가지고 와보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그림대로 화이트헤드를 설명해보는 것이다.

 (…) 베르그송은 [원뿔 윗면에서 중앙, 아래로] 이렇게 와서, 요렇게 잠재태가 계속 세이브하는 것이다. 여기는[화이트헤드는] 세이브의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로딩의 과정이다. 이 로딩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주관적인 극한과는 상관없이, 좀 막말로 해보자면, 우주 저 한 켠에서 무한 공급되고 있다. 막 빨려 들어오는 것이다. 왜 무한 공급이 될 수 있을까? 얘네는 시간 바깥에 있다. 우리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리고 얘네들은 그 각자가 너무 투명해서 그 안에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커피컵을 들고] 빛깔이 이렇게 돈다고 해보자. 여기가 좀 어둡고 여기가 좀 밝다. 영원한 객체를 빛깔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다. 저 설악산은 천재지변에 의해 무너진다. 영원한 객체는 아니다. 소멸하니까 현실적 존재다. 하지만 설악산의 색깔은 어떤 산에도 나타날 수 있고, 설악산에 지금도 나타나고, 그 설악산을 내가 떠올려도 계속 또 나타난다. 동일한 그 모습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걔는 시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저 뒤에서 신이, 내가 필요하면, 뭘 계속 던져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뒤에서 막 던져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된다. 영원하다는 뜻이 그런 것이다. 여기서 돌면 색깔이 밝은 데서 진한 데로 쫙 움직였다. 이것을 하나의 지속이라고 말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보면, 하나의 지속이 아니라, 무한계의 영원한 객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왜 투명한가? 이 갈색이 변해서 저 갈색이 된 것이 아니다. 변조되지 않는다. 영원한 객체는. 이 갈색은 이 갈색이고, 그 갈색은 그 갈색이고, 진한 갈색은 진한 갈색이고, 옅은 갈색은 옅은 갈색이다. 하나의 지속이 변조되는 게 아니라… (말하기가 진짜 어렵다.) '순간'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순간의 반대다. 원자론의 가장 궁극의 교훈은 마지막 원자는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모든 것을 원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촤라락 바뀌었는데, 그러면 바뀐 수만큼의 원자가 존재하고, 바뀐 수만큼의 영원한 객체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냥 무한이라고 표현한 것이지, 사실 무한도 아니다. 그것을 무한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순간을 상정하게 되고, 순간이라고 말하면 또 다른 고정되어 있는 원자를 상정하게 된다.

 화이트헤드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하나의 원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필름스트립처럼 존재한다. 얘네들은 끝이 없다. 얘네들은 언제나 절단 가능하다. 아니, 절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절단되어 있다. 이미 절단되어 있다. 이것들을 붙이는 게 영원한 객체다. 약간 뚜쟁이 같은 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을 모아서, '우리 잘 미팅해서... 우리 스터디 클래스 하나 만들어볼까?' 계속 객체화시키는 것이다. 얘네들을 뚜쟁이로 해서, 얘네가 모여서 하나의 샷이 나오고, 요렇게 모이면은 그다음 샷이 나오고, 이런 식이다. 우리가 발생하는 존재의 개체 수만큼의 그보다 더 이상의 영원한 객체가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무한 공급되고…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얘가 언제나 잘린 상태로 존재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원자는 잘리지 않는다. 영원히. 그래서 원자다. 그런데 영원에 의해서만 잘린다. 그래서 원자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객체다. 무슨 말인가? 원자들을 결합시키고 헤어지게 하는 것이 다 영원한 객체다. 우리의 능력치대로 우리는 헤어졌다 모였다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영원한 객체는 그런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 어둡지 않다. 투명할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의해] 베르그송주의자들이 슬슬 열 받기 시작한다. 얘기를 다 거꾸로 하니까. 이렇게 설명해야 할 것을 왜 굳이 이렇게 설명하는가? 여기서부터 신기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왜 얘가 바깥에서 계속 오는가? 어떤 원자도 고립되어 있지 않다. 어떤 원자도 항상 옆에 원자가 있고, 자기 안에도 원자가 있다. 라이프니츠를 생각하면 된다. 물론 라이프니츠는… 합성 문제는 굉장히 아직도 골치 아픈 문제이다. 이 원뿔 안에도 원뿔이 있고, 원뿔 옆에 항상 다른 원뿔이 있어야 한다. 원자는 항상, 외로운 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자론을 화이트헤드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진리는 원자론뿐이다.'라고 얘기할 때는, 그 원자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원자론이 아니다. 이 원자론의 가장 핵심 테제는 외로운 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궁극의 원자, 즉 마지막으로 쪼개지지 않는 원자도 없다. 영원한 객체만 나타나면 걔는 쪼개지고 다시 붙는다. 영화랑 비슷하지 않은가? 

 베르그송 구도로 친다면, 원뿔이 다시 있어야 한다. 베르그송은 원뿔 옆에 원뿔은 잘 얘기하지 않는다.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분은 이것을 그냥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퉁친다. 왜 환경이 원뿔로 안 보였을까? 걔네들은 기억하지 않아서다. 화이트헤드는 왜 환경이 원뿔로 보일까? 돌멩이도 기억한다. 이것은 막말이다. 화이트헤드는 진짜 이렇게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를 재해석하는 실재론자들은 그런 말도 한다. 돌멩이도 기억한다. 왜 기억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영원한 객체의 공급은 누구를 가리지 않는다. 평등하게 제공한다. 무한히 공급되고 있고… 그렇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단순 정위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라는 말을 쓴다. 근대적 사유의 가장 큰 오류다. 뭐냐하면 이런 것이다. 뉴턴 공간을 생각하면 된다. 어떤 물체가 저기 있다는 생각, 이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다. 왜 오류인가?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말하자면… 사실 이것도[원뿔도식을 가리키며] 단순 정위의 오류다. 화이트헤드한테는.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원자들로 쫙 조밀하게 차 있는 세계다. 여기에 하나 빈틈이 없다. 빈틈이 있으면 이 세계는 무너진다. 빈틈이 있을 리가 없다. 아직 안 무너졌기 때문이다. 얘네들은 무한히 결합과 분할을 반복하면서 막 우글댄다. 베르그송은 여기에서만[원뿔 아랫면을 가리키며] 우글댄다. 화이트헤드는 이 자체가 우글대고 있다. 왜냐하면 얘[원뿔]도 하나의 원자이기 때문이다. 이 원뿔들은 현실적 존재의 개수만큼 확 펼쳐져 있다. 막 있어야 한다. 단순 정위의 오류는 무엇인가 하면, 얘네들을 사상시켜놓고, 한마디로, 진공을 만들어 놓고 물체가 거기에 딱 있다고 생각, 요 생각의 습관을 단순 정위의 오류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실체 속성 같은 것이다. 그리고 뉴턴의 공간 같은 것. 막 이런 말을 한다. 아니, 중력으로부터 물체개념을 연역하지도 않고, 그냥 절대 시공간에 놔버렸네. 이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다. 한 마디로, 얘네들이 조밀하게, 언제나 조밀하게 있는 놈들인데, 다 사살시켜놓고, 요놈 하나 잡아 놓고 나서, 추상적인 시공간에 딱 놔두고, 이제부터 이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이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라는 것이다. 근대적 사유의 아주 악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베르그송도 단순 정위의 오류다. 이런말 하면… 위험한 말이긴 하다. 베르그송한테 이렇게 말하진 않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그냥 내 생각이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받아서 하는 생각이다.

 화이트헤드는 원뿔 자체가 여러 개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얘네들이 쭉 붙어 있다. [원뿔 3개(아랫면)를 이어 붙인다.] 얘네들도[원뿔의 꼭짓점끼리] 교류하고 있다. 이런 세계다. 그러다 보니, 얘네들을 사진을 하나씩 찍는다고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영상 47:30 참고.] 이것이 필름스트립이다. 이 사이, 요놈이, 이 밑에 판에서 올라오는 지점인가? 그렇다. 올라오는 지점이다. 그것이 잔상이다. 운동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세계가 말이다. 재밌는 것은, 베르그송은 거꾸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분할이라서 운동이 안 나온더니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가? 이에 베르그송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환영을 보고 좋아하느냐? 바보도 아니고. 정말로 움직였으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그 대답은, 아주 미약하게 대답을 한다. 한 강연록인데, 『사유와 운동』 각주처럼 쓱 지나가는 문장인데, 본인도 막 설명을 하려다가, '좀 그렇네…', '운동은 실재하는데', '운동까지 환영'이라고 해버리면, 스스로 까는 것 같으니까… 이런 말도 한다. 그 운동은 영사기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베르그송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무엇인가? (내가 베르그송을 너무 욕하는 것 같다…) 영화를 이렇게만[(정지된) 필름스트립으로만] 본다. 사실, 얘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얘가 움직일 때는 영사기가 필요하다. 그것을 보는 관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볼 때는 어둠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극장이라는 환경이 필요하다. 극장이라는 환경이. 얘 한 줄만 움직이는가? 한 줄만 움직이는 영화는 없다. 마치 여러 줄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생각해봐라. 과거랑 현재가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임권택 감독님이 너무 가깝다면, 멀리 가도 된다. 영화의 탄생을 알린 <국가의 탄생>을 한번 돌이켜보자. 그리피스. 평행 편집을 드디어 개발했다. 내러티브가 출현한다. 내러티브는 언제나 평행이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내러티브 공식들 말이다. 사적, 공적 플롯의 분위기. 심리와 상황의 분위기. 공공성과 사사성… 영화는 가장 반하버마스적인 매체다. 이 분기는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의 기원을 파고들어가보면, 평행 편집이다. 그리피스의 평행 편집은 무엇인가? 소녀가 막 처형당하려고 한다. 흑인 폭도들한테. KKK가 막 달려간다. 소녀가 처형당하려고 한다. KKK가, 백인 진압단이 막 달려간다. 얘네들이[필름스트립 두 개가] 수렴할수록 얘네들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언제나 필름스트립은 두 개 이상이다. 어떤 영화이건 간에. 

 베르그송에게 오류가 있다면, 단순 정위의 오류인데, 정말 이것[필름스트립] 하나만 놓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사실 얘는 옆에 하나씩 더 있어야 한다. (강의 말미에 얘기하려고 했던 것인데) 사실 현대영화는 얘네들이 계속 늘어나는 경향이다. 홍상수 영화 생각해보자. 항상 몇 명의 관점을 교차하기 시작한다. 홍상수 감독이 아주 운명적으로 부뉴엘주의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그분이 리얼리즘인척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차이밍량 영화를 예를 들어보자. 항상 골방에 사람들이 갇혀있다. 그리고 소통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원자화되는 경우는 계속 심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더 이상 소통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조금 이후에 말하도록 하자.) 계속 늘어나는 이 경향만 보더라도 베르그송은, 지금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선생님, 영화 한 편 보러 가시죠.' 하고 싶다. 

 그럼 왜 굳이 원자라는 말을 쓰느냐?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베르그송에게도 다시 물을 수 있다. '선생님, 옆에 이거[다른 원뿔] 진짜 없는 것입니까?' '아냐, 나도 사실 이거 얘기하려고 했지.' 할 수 있다. 왜 굳이 그러면 [베르그송은] 지속이라는 말을 쓰느냐, 그리고 왜 화이트헤드가 원자라는 말을 고수하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왜 잠재태라는 말 대신에 [화이트헤드가] 영원하다는 말을 쓰느냐.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이것이다. 순수기억이 시간의 안쪽에 있는가, 아니면 시간의 바깥쪽에 있는가. 이 차이는 엄청난 차이다. 그리고 이 차이. 이 주관적인 극한이 언제나 존재한다, 베르그송한테. 이것을 뚫을 수는 없다. 얘는 아무리 넓어져도 막혀 있다. 사실, 화이트헤드가 닫음의 철학자라고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베르그송이 닫음의 철학자다. 닫혀 있다. 이것을 뚫을 수 없다. 이걸 뚫으려면, 기억을 복제하는 수밖에 없다. 뚫리지 않는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이미 뚫려있다. 막 무한 공급되는 것 아닌가. 그게 신이든 뭐든 간에 막 공급해서 밀어 넣고 있다. 내가 아무리 본적이 없더라도, '아, 설악산의 색깔‘ 하면 떠오르는 것이다. 설악산의 색깔… 내 기억으로부터 소환되지 않는다. 걔네들은. 그리고 내가 죽어도 걔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내가 죽으면, 잠재태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일종의 소유물이다. 주관의 소유물. 이 순수기억이라는 것은 주관의, 안에 들어가 있는 애들… 한 마디로, 보따리 안에 들어가 있는… (불충분한 표현임을 용서해달라. 왜냐하면 순수기억을 물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에 속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는[화이트헤드에게는] 속해 있지 않다. 영원한 객체가 날아다닌다. 나도 받고, 너도 받고… 그러면서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주관적인 극한에 얽매이지 않는다. 절대 규정되지 않는다. 막을 수 없다. 개는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가 죽어도 거기 있을 것이고, 내가 죽고, 나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그걸 떠올리면, 거기에 반드시 나타난다. 유령 같은 애다. 화이트헤드가 되게 재밌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영원한 객체는 시간을 빙의시킨다, 이런 표현을 쓴다. 오영환 선생님은, 때의 흐름을 혼백처럼 따라다닌다. 'haunt' 이 단어다. 집 같은 것이 유령 들렸을 때, 'haunt'를 쓴다. 정말 귀신 같은 것이다. 영원한 객체가. 그래서 초시간적이다.

 이게 무슨 소용인가? 소용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항상 선택한다. 내가 볼 때 말이다. 그리고 영화 보는 데 별로 크게 영향은 안 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에 굉장한 영향을 준다. 우리는 시간을 생각하지,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언제나 영원하게 끝난다. 예를 들어,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 영화사가들이 많이 예를 드는데… 선댄스 키드와 부치 캐시디가 총을 들고나오면서 딱 끝난다. 프리즈 프레임을 딱 건다. 탕탕탕 소리가 들리며, ‘아악’ 하며 프리즈 프레임으로 딱 끝난다. 유명한 장면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 발췌 장면 참고.] 그 사람들 죽었는가? 현실적 존재로는 죽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영원한 객체로 살아남는 것이다. 바로 그게 언제나 영화에서 속편이 가능한 이유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다. 이 강의 말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인데, 영화의 대상은 시간적인 대상인가, 영원한 대상인가. 이것은 엄청난 문제이다.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소용없다. 하지만, 당신이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심지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적인 대상인가, 영원한 대상인가. 어쨌든 간에... 내가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볼 수는 있지만, 그림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걸로[베르그송의 원뿔도식] 영화를 얘기할 수 있으려면, 요놈을[필름스트립을] 없는 셈 쳐야 한다. 실제로 들뢰즈도 『시네마』 장 한구석에서 잠깐 요걸 없애고 간다. 되게 얄미운 말인데. 예술의 목적과 수단에 대해서는 두세 줄만 싹 치고 딱 넘어간다. 내 언어로 번역하자면, 자세한 문장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예술에 있어서 수단이 원자론적이라고 해서, 그 목적과 작품 자체가 원자론적이겠냐. 하하하. 아니지.’ 그리고 패스. 딱 넘어갑니다. [필름스트립을] 사상시켰다. 베르그송으로 영화를 얘기하려면, 요걸[필름스트립을] 사상시켜야 한다. 나는 거꾸로 묻고 싶다. 만약 들뢰즈가 그렇게 말한다면, '네. 붓이 그림을 규정합니다.'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모든 예술가들이 도구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라고 거꾸로 말씀드리고 싶다. 영화가 이렇게[필름스트립처럼] 안 생겼다면, 영화도 그렇게 나오지 않을 것이고, 마치 우리 신체가 이렇지 않았다면, 우리 정치 체제가 이랬을까? 마치 우리 눈이 발바닥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 체제를 가졌을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유물론자이다. 이걸로[필름스트립으로] 이렇게 태어났으면, 여기의 구조가 분명히 투영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굴뚝의 구조에 따라서 연기의 색깔이 달라지지, 그 역이 아니다. 연기의 색깔이 달라졌으면, 분명히 굴뚝의 구조에 뭔가 거기에 특이성이 있는 것이다. 나랑 화이트헤드에게 넘어오는 것은 이런 것일 테다. ‘네가 이걸로[필름스트립으로] 설명해봐라.’ 그래서 내가 이 책[『투명기계』]을 쓴 것이다. ‘영원, 불멸, 소멸로 네가 영화사 한번 읊어볼래?’ 그래서 쓰기 시작한 책이다. 

 나는 거꾸로 화이트헤드가 하려던 것, 원자론… 왜 원자론을 그렇게 주창했느냐? 이것은 내 생각인데, 누구보다도 개체화에 미쳐 있던 철학자인 것 같다. 원자는 쪼개질 수 없다. 그 자체로 영원히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오기 전까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에 의해서만 쪼개지는 그놈은, 시간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그 자체인 것이다. 쪼개지지 않는다. 개체다. individual한 것이다. 개인주의의 개체가 아니다. 개인주의의 개체와 완전히 다르다. 개인주의의 개체야말로 단순 정위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들을 다 사상시키고, 개인들의 집합까지만 딱 얘기한다. 전형적인 근대적 사유의 단순 정위의 오류다.

 (...) 아마 개체에 미쳐있던 철학자 같다. 실제로 개체라는 말을 많이 쓰지는 않는데, 되게 재밌는 말을 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얘만[원뿔 하나만] 생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동시적... (동시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동시성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계층적 도피성[영상 59:45 참고. '계층적' 뒤의 단어가 잘 들리지 않는데, 이 용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찾지 못했다.]이라는 이상한 말을 쓰는데, 얘 생성은 옆에 있는 놈의 생성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 마디로, 독자적인 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동시에, 싱크되어서 일어난다. 번역을 너무 잘했는데, 그것이 '합생'이다. 생성이 아니라 공동생성. 항상... 합생은 전 우주의 개체화다. 이런 말을 한다. 합생이, 모든 것을 쫙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주다. 다 같이 우글대면서 일어나는 사태를 생각하면 된다. 돌멩이도, 지렁이도, 빠짐이 없다. 하나라도 빈틈이 생기면, 하나라도 여기에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우주는 무너진다. 그래서 공리들에 집착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우주를, 공리 몇 개를 설명하는가, 범주들을 설명하고 그러는데... 나는 그쪽까지 전문은 아닙니다. 다른 세계라는 것을 내가 계속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진짜 추상적인 얘기를 저렇게 열심히 얘기하는가. 여러분들도...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건 상관이 없다. 사랑은 열렬히 하면 된다. 사랑의 이유와 근거와 그 방식을 물을 때는 이것은 여러분의 언어와 생각을 너무 지배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영화가 생리론자인가, 원자론자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오래된 아주 쉬운 대답을 하게 된다. 최근 30년 동안 한국의 영화적인 사유, 언어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리얼리즘이다. 툭 까놓고 얘기해보자. 할 말 없으면, 리얼리즘 말하면, 대충 끝난다. (너무 막말하나...) 사실, 그러면 리얼리즘의 리얼이 뭐냐, 거꾸로 물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원자론자라고 한다면, 스피노자주의자보다 라이프니츠주의자고, 베르그송주의자보다 화이트헤드주의자라면, '원자론으로 거꾸로 영화를 설명해라.'에 나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원자론적인 입장에서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내가 이것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안 보이던 영화가 보이고, 모르던 영화가 막 더 재밌어지고,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제이슨 본처럼 재밌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한 마디로, 실용성은 없지만, 실용성 때문에 우리가 책을 분서갱유 해야 한다면, 인류의 한 절반의 책은 분서갱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왜 이 책[『투명기계』]을 쓰게 되었는가, 그 충동에 대해서 얘기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다.

 하여튼, 이 질문에 정말 대답해야 한다. 나는 몇 가지 예를 이 책[『투명기계』]에서 든다. 개체화는 원자화와 같은 뜻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자화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원자화가 아니다. 원자화는 항상 공원자화와 함께 있다. 말도 막 만들어보는 것이다. 원자화는 공원자화를 배제할 수 없다. 맞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 범원자화를 판원자화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영화의 원자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생각보다 영화는 개체화에 미쳐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우리 드디어 몽타주의 태동 시기를 찾아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처음으로 몽타주를 발견해서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는 쿨레쇼프 효과. 물론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기록들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안성기 아저씨인 '모주킨[Ivan Mozzhukhin]'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을 딱 짓는다. 옆에 수프, 관에 누워 있는 여자, 마지막 하나는 기술에 따라 다른데, 에로틱한 여자, 혹은 어린 소녀를 놨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쨌든, 무표정이 쫙쫙쫙 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대상에 따라서 말이다. 그래서 소비에트 사람들이 열광을 한 것이다. '아, 샷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고, 그 관계로부터 의미가 나오는 것이구나.' 이렇게 보면 되게 베르그송적이다. 왜냐하면, 이 샷은 이쪽으로 쭉 열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를 보면 '말 걸어보고 싶다.' 수프를 보면 '어, 배고파.' 무표정한 얼굴인데, 의미가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과학자들도 막 달려들어서 그때 한창 논의되었다. 1920년대, 30년대 독일과 프랑스에서 말이다. 관 뚜껑 보면 '슬프다...' 얘[무표정한 얼굴]가 여기에 열린다고 설명하는 것은 굉장히 베르그송적인데, 얘가 이걸 봤을 때 이 표정이 아니고, 왜 이 표정[우리에게 보이는 표정]인지는 사실 닫음의 철학으로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보면[무표정한 표정 샷과 그다음 이어지는 샷이] 이렇게 원자화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얘와 얘는 같이 개체화되는 것이다. 배고픔이라는 영원한 객체가 와서 딱 붙어야 한다. 되게 비견한 예이다. 열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속의 개방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의 목표는 항상 닫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 철학의 가장 정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열림의 조건이자 목적은 닫음이다. 개체화다. 원자화다. 원자화가 안 되면, 이것은 이렇게 될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베르그송이, 단지 개방성으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얘가 달라졌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지, 얘가 꼭 그거여야 되냐는 필연성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 이것은 닫음이다.

 원자의 예를 몇 개 더 들어보자. 그리피스의 평행 편집. 내러티브가... 이제부터 미친 소리가 나올 것이다. '너는 영화가 닫힘의 철학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으시면,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열린 적이 없다. 영화는 열린 적이 없다. 우리는 개방, 지속, 시간을 외치지만, 아무리 누군가 와서 개방, 지속, 차이 외쳐봐도 영화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영화는 닫고, 영원하려고 하고, 개체화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게 장르다. 다른 예술 매체와 다르게 영화는 장르가 있다. 다른 것은 사조와 유파가 있지, 장르가 있지 않다. 왜 장르가 있느냐. 정형성이라는 테두리로 계속 개체화를 하는 것이다. 묶는 것이다. 다른 데, 연극배우에는 스타가 없는데, 영화배우에는 스타가 있다. 그게 개체화다. 범접 못 하는 개체화를 만드는 것이다. 연극배우는 우리가 등장인물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영화배우는 사실 등장인물의 이름 기억 잘 못한다. 하정우가 어디서 무슨 역할을 하든지 간에 하정우는 하정우다. 어떤 영원한 타입을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목표는 영원한 타입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타입이, 아무리 캐릭터의 이름이 변해도, 걔는 그것이다. 우리가 하정우를 부를 때, 강동원을 부를 때, 강동원은 강동원이라고 부르는 게 빠르기 때문에, 강동원이라고 부른다. 강동원이 나왔던 배역들의 이름을 우리는 다 기억하지 못 한다. 하지만 리어왕은 리어왕이다. 햄릿은 햄릿이다. 어떤 배우가 오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그냥 문법적인 것만 좀 더 보면 다음과 같다. 평행 편집. 얘네가 왜 평행한가? 영원히 안 만난다. 그래서 평행선이다. 시간 안에는 얘네들을 타협시킬 중재자가 없다. 여기서부터 내러티브가 발생하는 것인데. 주인공이 있고, 이게 적이든, 공공의 영역이든, 사적인 영역이든 얘네 둘은 통합되지 않는다. 막 싸우면서 가는 것이다.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화해되지 않는다. 타협 불가능하다. 단 전제는, 시간 안에서. 그래서 평행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안에서 타협되지 않으면, 시간 밖에서 타협되는가?' 그렇다. 그래서 평행이다. 무한 원점에서 만난다. 평행선은 무한 원점에서 만난다. 영원히 안 만나기 때문에... 말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기하학자들의 정리들이다. 실제로 영원한 곳에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소비에트랑 미국 평행 몽타주랑 프랑스 가속 몽타주랑 다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국가'하면 미국이랑 소비에트가 탁 나온다. 이것이 고전 몽타주의 아주 큰 전제다. 이 타협될 수 없는 두 평행 테두리를 견인해내는 무한 원점이 존재한다. 한 마디로, 거대한 단일 질량 중심이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에이젠슈테인이 견인이라는 말을 썼을 때는, 이 관념에 대해서 정확한 파악을 하고 있던 것이다. 뭔가 견인을 한다. 뭔가 끌어당긴다. 그게 영원한 객체다. 실제로 화이트헤드는 그런 표현을 쓴다. 영원한 객체는 유혹(lure)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제가 유혹한다고 말한다. 명제는 영원한 객체와 현실적 존재의 결합체이다. 어쨌든...

 (...) 얘네가 왜 못 만나느냐... 왜 영원에서만 만나야 하는가. 실제로 내러티브는 어떤 영원한 객체가 끌어당기면서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얘네들은 서로에 대해서 닫혀 있다. 얘네들은 열리면 큰일 난다. 내러티브 얘기를 좀 해보자. 내러티브는 닫음의 예술이다. '시간과 개방 아닌가요?' 아니다. (...) 한 고유한 마을이 있다고 해보자. 마을이 있다. 이러면 내러티브가 아니다. 내러티브가 안 생긴다. 고유한 마을이 있다. 뭔가 일어날 것 같다. 그러면 내러티브다. 왜 마을이 있어야 하는가? 한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고유한 마을에 늑대가 나타나 소녀를 잡아갔네? 마을 사람들이 찾는데, 소녀도 죽어 있고, 그걸 구하러 가는 와중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간다. 이것이 전형적인 내러티브다. 그러다 보니까 산에서 길을 헤매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늑대 떼가 마을을 다 휩쓸어 갔다. 한 마디로, 우리가 지키려던 것을 다 잃었다. '이제 포기하자.' '아닙니다. 마지막 한 번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경찰을 불러?' 혹은 '야, 내가 사냥꾼 수렵 협회에 전화번호 있는데, 걔네들 부르자.' 이러면 내러티브가 아니다. 부르려면 진작에 부르지. 닫아 놓고 시작한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를 생각해보자. 모피어스를 구하러 가야 한다. 키아누 리브스가. '내가 구하러 가겠어.' 결단을 한다. 그런데 '나한텐 그 힘이 없어.' '그래도 내가 가겠어.' 이게 영화의 내러티브다. '아, 내가 전화번호를 하나 아는데, 나보다 센 놈이 하나 있어. 걔를 부릅시다.' 이것은 내러티브가 아니다. 이런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되게 신기한 게, 가끔씩 영화판에 있다. 실수로 샐 때가 있다. 영화 보다 깬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이 항상 하는 게, 전문용어로 니주[にじゅう]깔기 한다. 다 매복시켜 놓는다. 한 마디로, 마을이 있다는 그 잠재적 환경 공간에 다 쟁여놓고, 거기서만 뽑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영화 중간에 필연성 없이, 쑥 들어오면, 그건 내러티브가 아니다. 걔가 뚫려서다. 잘 닫아놓고, 닫은 데서 딱 끝내야 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멜로물 중 하나인 <로마의 휴일>을 떠올려보자. 공주가 가다가 걸릴 입장에 놓였다. 왕실에서 파견했다. '너 공주인 것 다 알아.' 그때, '슈퍼맨 도와줘요.' 하면서 슈퍼맨이 왔다. 아니면, 친구한테 전화해서 '어, 나 얘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래. 나 여기에서 구해줘.' 이러면 내러티브가 안 된다. 공주가 자신이 인제까지 가져왔던 가치를 포기하면서 그 로마 안에서 끝장을 내야 한다. 뉴욕이나 밀라노로 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공주가 한 선택은, 가장 말괄량이 짓, 기타로 사람들 머리 때리면서, 가장 공주답지 않은 짓을 하면서 위기를 빠져나간다. 그런 것이다, 내러티브는. 언제나 닫혀있다.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좋아하는 영화 아무것이나 떠올려 봐라. 아니면, 싫어하는 영화 아무것이나 떠올려 봐라. 거기엔 분명히 위장이라는 사태가 있다. 영화의 아주 고유한 사태다. 다른 데는 없다. 사진에도 위장이 있다. 하지만 없는 것이 있다. 위장이 없는 사진이 있다. 보도 사진 같은 경우다. 위장이 없는 연극은 있다. 추상도가 높은 경우. 마임극이나 신체극 같은 것. 위장이 없는 미술도 있다. 위장이 없는 연극도 있고, 위장이 없는 문학도 있다. 내적 독백이 심한 경우. 위장이 없는 다른 예술은 있지만, 위장이 없는 영화는 없다. 하다못해 거짓말이라도 한다, 영화에서는. 하다못해 내숭이라도 한 번 떤다. 어디 숨거나, 숨기거나... 여러분이 좋아하는 영화 아무것이나 떠올려 봐라. 거기엔 변장, 위장, 숨기기라는 사태가 항상 있다. 왜 그럴까? 영화가 닫혀 있고, 그 안에 또 닫힌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하나의 집합] 드러내놓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여기선[다른 집합] 못 드러내놓고 다닌다. 항상 닫힌계가 두 개 이상 겹쳐 있는 것이 영화라는 것이다. 내 생각이다. 열려있지 않다. 잘 닫아 놓는다. 그래서 숨어 다니는 것이다. 닫힌계를 극대화한 것이 공포물이랑 SF이다. (...) 그리고 얘네들을[집합들을] 극단적으로 벌리는 영화적인 경향이 존재한다. 최근의 나타나는 동아시아 영화가, 멀티 내러티브 영화 같은 경우에 많이 나타난다. 1980년대 이후에 굉장히 급속도로 늘어난 사태다. 홍상수, 카우리스마키, 차이밍량 영화 같은 것 보면, 영화의 골방화라 말할 수 있다. 골방에 가둬두고, 못 나간다. 카우리스마키 생각해봐라. 부조리극이다. '잘 잤니.' '밥 먹었다.' 말이 가다 소실된다. 공간 안에서. 진공에서 증발한다. 뭘 표현하는 것인가. 단순 정위의 패러디라고도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적으로 말한다면 말이다. 카우리스마키가 화이트헤드를 읽고 삘 받아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의 닫힌계를 계속 극단화하는 방법으로 영화는 진행된다는 것이다.

 <인셉션>은? <인셉션>은 겁나 닫았다. 층수도 나눴다. 닫힌계에 말이다. 물론 이게 독특한 생각은 아니다. 부뉴엘이 하고, 펠리니가 하고, 한국 뉴웨이브가 겁나 하던 짓이다. 물론 각기 다른 방식과 다른 목적과 다른 근거로 말이다.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은 펠리니와 부뉴엘 영화다. [<자유의 환영> 발췌 장면 참고.] 어떤 여자애가 놀이터가 앉아 있다. 바바리 맨 같은 사람이 사진을 보여준다. '봐봐. 죽이지 않냐.' 여자애가 막 놀래서 엄마한테 간다. 관객한테 아직 이 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봐도 노출증 환자구나, 바바리 맨 같은 사람이라서 포르노 사진을 소녀한테 보여주고, 자기가 성적 쾌락을 느끼고 튀었구나... [라고 생각할 텐데.] 그래서 부모님이 보더니, '너 올라가 있어.' '더러워.' 막 이런다. 그러다 카메라가 딱 넘어가면, 뭐가 있냐면,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 에펠탑, 개선문,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 조형물 사진이 쫙 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포르노처럼 보는가? 어떤 곳에서 포르노인 것은, 어떤 곳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세계인 것이다. 얘[커피컵]는 이 세상에서는 화장실인데, 배설구인데, 이쪽에서는 이게 먹는 것이다. 요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닫힌 세계... 이게 멀티 내러티브의 전통에 아주 강고한 생각이다.

 알트만의 영화를 보면, 사실 각 에피소드 간에 인과법칙이 거의 없다. 여기 인과법칙이 있으면 큰일 난다. 그러면 멀티 내러티브가 아니다. 여기에 인과법칙이 있는 멀티 내러티브 영화는 내가 본 것 중엔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가 없다는 것은 이 사이에 시간이 흐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알트만의 영화나 부뉴엘의 영화에서, 특히 알트만의 영향에서 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감금시켜 놓았는가? 얘네들을 통합할 영원한 객체가 아직 오직 않았다. 그게 이 현대사회의 불행이다. 화이트헤드적으로 말하면, 알트만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불행은 현실적 존재들은 너무 많아지고, 너무 복잡・다양해졌는데, 한 마디로, 우리 삶은 너무 다양해졌는데, 이것들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없네... 쉽게 말하면, 이렇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영화만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가져다 쓴 것은 맞다. 알트만이. 레이먼드 카버도 굉장히 잘 표현한다. 문학 작품 중에 가장 영화적인 문학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이렇게 쪼개서, 편집할 수는 없다, 레이먼드 카버조차. '파편화'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대부분은 파편화로 혼동한다. 모더니즘 비평은 이걸 파편화로 혼동한다. 옛날 모던 시네마로 말하는, 1970년대, 80년대... 모더니즘 비평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무엇인가 하냐면, 이것들이 너무 보기 싫어서, 자기도 싫어하는 것에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모더니즘 비평의 문제다. 옛날 영화하면, 그 사람은 꼰대이다. 한 마디로. 요즘 영화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장르 영화도 분명히 예술 영화 이상의 것이 있다.

 (...) 이게 3부 2장 내용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나도 신기하고, 이 책[『투명기계』]에서 너무 불친절하게 설명한 것 같아서, 이 시간에 꼭 설명하려고 했다. 원뿔로 하겠다. 한 마디로, 내러티브는 하나의 원뿔만 가지고 성립되지 않는다. 언제나 두 개 이상의 원뿔을 필요로 한다. 얘네들은 각각 다른 시간 내에 놓여 있다. 평행 편집을 생각하면 된다. 내러티브가 평행 편집에 의해서 태동되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영화사적 사건이다. 내러티브는, 좀 막말하자면, 영화에만 존재한다. 소설은, 특히 비트[beat] 이후 세대는,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데 오히려 주력했다. 내러티브는 버려도 되는 데다. 문학은. 문학은 내러티브를 버려도 된다. 닫아놓지 않아도 된다. 내적 독백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는, 그냥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볼 때, 영화에서 내러티브 이론은 내레이션 이론과 너무 혼동되어 왔다. 내레이션 화자 분류한다고, 내러티브 법칙이 나오지 않는다. 내러티브 법칙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내러티브의 가장 간편한 공리는, 우리나라 고바우 영감 같은 네 컷짜리 보면 바로 나온다. '뭘 막 하려고 한다.' '내가 저 대상을 좇아. 혹은 잃어버렸어.' '저것을 찾아야 해.' '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졌다.' '벌떡 일어나 보니까 우연히 그것이 눈앞에 보여. 혹은 벌떡 일어나는 그 의지가 다시 그것을 나에게 불러왔어.' 요게 내러티브다. 네 컷짜리만 해도 언제나 있다. 한 마디로, 초기 평형이 깨지고, 뭘 하려다가 바닥점을 치고,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우리가 지키려던 목적 다 버리고', '내 영혼 버려', '내 모든 것을 걸어', 내기. 그리고 결단. 클라이맥스. 이런 법칙. 주체는 주체 자신의 소유물, 혹은 자기 자신을 버릴 때 그것을 찾는다는 것. 요게 내러티브의 기본이다. 안 그러면 영화 있으면 대봐라. 모든 영화가 그렇다. 1920년대부터 그랬다. 이 내러티브 법칙은 내레이션으로 다 환원되지도 않거니와... 문학에도, 문학도 하기는 하는데, 그것은 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특히 최근 소설들이 그렇다. 영화화하기 좋게 다 쓴다. 한 마디로, 내가 포기해야 그놈이 온다는 것. 내가 현실적으로 걔를 놓아야 그놈이 알아서 온다는 것. 영화가 가장 총애하는 문학은 『고도를 기다리며』다. 물론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게 영원한 대상의 엿장수 마음이다. 오지 않는다. 내 마음이다.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다. 대부분의 흥행을 노리는 내러티브 영화라면 와야 한다.

 세 점. 초기 평면이 깨지고, 막 그것을 찾으려고 달려가는데, 끝내 못 찾는, 그 과정을 원뿔로 잠깐 설명하자면... [영상 1:24:05 참고. 원뿔 두 개를 꼭짓점끼리 맞붙게 하여 위아래로 붙인다.] 얘랑 얘가 만나야 한다. 꼭짓점 두 개가 만나야 한다. 그런데, 장력이 존재해서, 계속 못 만나게 한다고 생각해봐라. 그것은 아마 영원한 대상의 부재일 것이다. 우리가 뚜쟁이를 아직 못 찾았다. 여기[두 꼭짓점끼리 맞붙기 직전의 부분]는 진공이다. 막 만나게 하려고 하는데, 얘네들이 흔들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요게 우리가 어느 영화에서도 보든, 그 1막이다. 초기 평면에 뭔가 흠집이 나서, '나는 그것을 열렬히 추구하거나 찾는데, 못 찾겠어.' 그게 요것[원뿔 두 개가 맞붙지 않는 상황]이다. 우리가 뭔 짓을 하는가? 막 노력을 하다가, 그냥 꼭 바닥점이 나타난다. 뭘 해도 안 되는 점이 나타난다. 이런 것은 시나리오 잘 쓰기 책에 안 나온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안다. 그 책 안 읽어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화 보면서 그 지점을 항상 통과한다. 되게 재미있는 것은, 언제나 유명한 장면이나 클라이맥스만 기억나지, 이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바닥점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이 책[『투명기계』]에서 2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뭘 해도 헛발질을 하는, 즉 바닥을 쳐서 이제 다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항상 나타난다. 에선 무엇이었는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전거 타는 거밖에. E.T.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장면이 있다. E.T.가 죽었다. 얘를 살리려면, 저기 NASA 그 양반들을 불러야 한다. 와도 아무 말도 못한다. 한 마디로, 다 잃었을 때. <매트릭스>에선 무엇이었는가? 바닥점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이다. '내가 모피어스를 못 구하러 가겠네. 왜냐하면 나는 원[the One]이 안 돼.' 이것이 바닥점이다. 내가 인제까지 추구하던 목표를 다 포기할 때. 한 마디로, '그러면 원이 아닌데, 내가 뭔 짓을 하든 안 된다.' 이 지점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다.

 원뿔로 치면, '에라 모르겠다', 안 맞으니까, '위에 가서 한번 찌그러트릴까?' '그러면 어떻게든 맞겠지.' 찌그러트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얘랑 얘랑 붙는가? [두 개의 꼭짓점이 맞붙지 않아 생긴 진공 상태를] 불연속점이라고 본다면, 불연속점이 점점 더 늘어날 뿐이다. 안 붙었는데 눌러서 그렇다. 눌러도 안 붙는다. 이것이 바닥점이고, 여기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생각을 고친다. '아,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되겠구나. 버려 버려...' 이 현실적인 점[꼭짓점]을 부정한다. '아, 알았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내가 원 아니어도 되니까, 나 모피어스 구하러 가야 해.' 자기가 찾으려고 하던 목적을 내팽개치면, 그다음에 온다. 고도가 와주신다.

 원뿔을 다시 해보면, 이런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모르겠고, 내가 인제까지 하려던 점을 포기하고, 나 자신에게 충실할래.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죽겠다.' 하는 지점. 한 마디로, '나는 여기서 있지 않고, 밑으로[아래 원뿔로] 내려갈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되게 재미있는, 원뿔의 꺾임 현상이 일어난다. 한 마디로, 그때 대상이 온다. '원을 포기할 때, 내가 원을 포기하고 모피어스를 선택했더니 내가 원이 됐어.' 이것을 생각하면 된다. [영상 1:28:03 그림 참고.] 원뿔이 이렇게 된다. 한 마디로, 여기로 통하게 된다. 거꾸로 갔더니, 붙어있으니 이쪽으로 갔다. 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상 쪽에서도 뒤로 갈래, 해서 붙어있기에 돌아온다. 불연속점이 아니라 붙은 점이 된다. 이것이 내가 3부 2장에서 말하는 내러티브의 비유클리드적 변형이다. [한편,] 어디로 가도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 내가 로바체프스키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다른 한편,] 내가 어느 쪽으로 가도 이 점으로 가서, 아까 우리가 만나기 불가능했던 그 점에서 만나게 된다. 그때는 뭘 해도 난 만나게 된다. 이것을 리만 공간이라고 부른 것이다. 내가 멋있으려고 이것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러티브를 이렇게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얘네들이 그래도 닫힌계 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가 얼마나 닫힌 공간 안에서 시작되었고, 두 개의 닫힌 애들, 두 원자가 만나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리고 그것들이 휘고 굽고 할지언정 전혀 지속에 의존하지 않고, 한 마디로, 여기서 시간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시간을 포기할 때 그 시간이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모든 내러티브가 그렇게 생겼다.

 여기서[마지막에 그린 그림에서 만나는 점] 우리를 찾아와주는 대상, 이것은 현실적인 대상인가, 영원한 대상인가. 이것이 가장 궁극적 질문이다. 영화가 맨 처음에 카메라가 생겨서 딱 누군가를 찍었을 때, 머이브릿지가 걸어가는 사람을 찍었을 때, 시간에 속한 대상인가, 시간 바깥에 속한 대상인가. 우리가 영화를 충분히 즐길 때는, 그것이 영원한 대상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영화에는 속편이 가능하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죽지 않았다. 걔네들은 돌아온다. 아직 안 만들어졌는데? 우리가 그 노래를 들으면 기억나는 형태로, 혹은 어느 제작자는 지금도 리메이크 판권을 넣었다 뺐다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걔는 언제나 반복가능하다. 동일자다. 대상에 관련해서만큼은 영화는 차이의 철학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영원한 동일자가 계속 반복된다. 그렇다면, 차이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인가? 대상에 관련해선 그렇다.

 <로마의 휴일>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보자. '가장 이번에 즐거웠던 도시는 어딥니까?' '로마'라고 공주가 대답한다. [<로마의 휴일> 발췌 장면 참고.] 기자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선다. '나는 그녀의 현실태를 잃었지만, 로마는 우리 마음에 남았다.' 그 로마는 영원하다. 그 로마는 다른 로마가 아니다. 이 동일자는 아무리 모습을 바꿔도, 우리는 그게 그것인 줄 안다. 그래서 정말 무서운 놈이다. <첨밀밀>을 예로 들어보자. <첨밀밀>에서 등려군이라는 것은 노래 가사의 목소리로도 나오고, 대사의 이름으로도 나오고, 누구의 친척 관계로도 나온다. 막 나온다. 그런데 길거리에 나왔을 때, 딱 등려군이 그 등려군인지 우리는 다 안다. 그리고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홍콩의 변혁을 같이 견뎠던, 기둥 같던 사람이 저기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등려군이 아니다 실제로. 대역 배우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그게 영화다. 상관이 없다. 진짜 등려군인지 아닌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제까지 말해왔고, 느껴왔던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라는 것이지, 그 등려군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역 배우를 써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제까지 처음 보는 등려군의 형태인데, 소군이 등을 돌리니까 뒤에 등려군이라고 써있네. 거기서 왜 장만옥이 헤딩을 해서 클랙슨을 울리는가? [<첨밀밀> 발췌 장면 참고.]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라서.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 아니면, 우리는 그렇게 애닳지 않는다. 그 로마는 그 로마고, 그 등려군은 그 등려군이다.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 관람차가 온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을 보여준다. 온 마을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회피하는 아버지도 있다. '시나 쓰자.' 벌집만 연구한다. '합리성으로 어떻게 분해가 안 되나.' '아빠, 괴물이란 뭐야.' '야, 몰라도 돼.' 하지만 프랑켄슈타인 괴물은 온 마을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끝내 그녀는 길을 잃는다. 진짜 프랑켄슈타인 괴물이 나타난다. 명장면이다. [<벌집의 정령> 발췌 장면 참고.] 그 제임스 웨일의 그 <프랑켄슈타인>의 배우가 아니다. 닮지 않았다, 솔직히. 하지만, 그 프랑켄슈타인 괴물이 그 프랑켄슈타인 괴물인 것을 안다. 돌아온 것이다. 영원한 대상은 반드시 돌아온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고도는) 끝내는 등장하지 않게 했지만, 이 고도는 등장해서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이 반복됨에는 차이를 파생시킬지언정 걔 자체는 차이가 없다. 아까 내가 설명한 것처럼, 이 갈색은 뒤의 갈색과 다르다. 이 갈색은 동일하게 이 갈색이고, 저 갈색은 동일하게 저 갈색이다.

 영화의 태초로 올라가보자. 머이브릿지가 맨 처음에… 니엡스가 맨 처음에 8시간짜리 노출 사진[1826년의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 본 조망"]을 하나 딱 찍었다고 생각해보자. 이것은 영원한 대상인가? 아니다. 스러져가는 어떤 잔상을 찍은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 존재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두 개를 연속해서 찍으면… 머이브릿지의 그 유명한 걸어가는 사람 얘기하는 것이다. 딱 병치되는 순간, 얘가 이쪽으로 걸어가야 된다는 압박을 느낀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설령 뒤에 이것이[두 번째 사진이] 10년 뒤에 찍은 사진이고,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이게[첫 번째 사진의 사람] 이거[두 번째 사진의 사람]라는 우리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배운 적이 없다. 영원한 대상이 반복된다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왜 느낄까? 이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게 영원한 대상이다. 대상은 반복된다. 영원히.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영화는 막 노는 것이다. 굳이 <인셉션>과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을 같이 예를 든 이유는, 여기에 구분 자체는, 예술 영화, 장르 영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는 소기의 목적이 돈을 버느냐, 영화제를 가느냐의 차이… 그런 차이일 뿐이다. 영화에서 영원한 대상을 삭제한다면, 우리는 영화 자체를 파기하는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물어야 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위상이다. [영상 1:35:30 끝]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 Wheel of Fortune and Fantasy>(2021) 소고, 혹은 트레일러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 Wheel of Fortune and Fantasy>(2021)을 볼 수 있는 경로(이스탄불국제영화제)를 알려준 친구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자나 깨나>(2018) 이후 하마구치 류스케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Our Apprenticeship>을 경유하지 않고 (대신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2020)에 각본가로 참여한 뒤에)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두 작품을 만들었다. (하나는 베를린과 이스탄불에서, 다른 하나는 칸에서 공개되었다.) 이중 먼저 공개된 <우연과 상상>(2021)의 구성은 간단하다. 세 개의 단편 모음. 오프닝 타이틀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시피 <우연과 상상>은 하마구치의 '단편집'(短編集)이다. 각 35분(제1화), 45분(제2화), 40분(제3화) 정도로 구성된 세 개의 단편은 별 기교 없이 차례로 이어진다. 심지어 (얼핏 보면, <우연과 상상>에서 최근 일련의 홍상수 영화의 분위기가 감지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와 달리) '같은 배우'가 세 개의 단편에 걸쳐 반복 등장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독립된 세 개의 단편이 나열된다. 여기서 '독립'이라는 단어는 주의해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 개의 단편이 아무 연관성 없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잠깐. 논의할 주제를 계속 확장하지 않고, 좁혀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우선적으로 밝힐 것이 있다. 바로 이 글은 <우연과 상상>에 관한 전방위적 분석이나 비평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이미 제목에서 밝힌 바대로, 이 글은 <우연과 상상>에 관한 하나의 소고(小考), 혹은 이 영화 안으로 입장(入場)하는 것을 돕는 트레일러(trail-er)가 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트레일러는 아니다. 따라서 이 밑으로는 스포일러가 가득하다.

 다시, 논의의 폭을 좁히겠다는 말로 돌아가 보자. 이 글에서 특기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바로 대화의 '장소'와 단편들의 배치 '순서'다. 그런데 이 두 개의 항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아무래도 각 화(話)의 제목과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먼저, 제목. 제1화는 '마법 (혹은 덜 확신하는 것)', 제2화는 '활짝 열린 문', 제3화는 '다시 한번'이다. 그다음,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제1화: 메이코, 츠구미, 카즈아키가 중심인물이다. 패션모델 메이코와 모델 어시스턴트 츠구미는 절친이다. 한편,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의 사장인 카즈아키는 메이코의 2년 전 남자친구이며, 최근 츠구미와 만남을 가졌고, 그 만남을 이어가려고 하는 상황이다. 

 길거리에서 메이코는 화보 촬영을 한다. 촬영 일을 다 마치자 저녁이 되고, 메이코와 츠구미는 같이 택시를 타고 귀가한다. 이때 둘은 대화를 쉬지 않고 하게 되는데, 대화의 주된 내용은 츠구미와 카즈아키 간의 만남에 관한 것이다. 츠구미는 카즈아키와 대화가 잘 통했으며, 서로 성적인 에로틱함을 느꼈으나, 더 진도를 나가지 않았는데, 이것이 아쉽다고 메이코에게 토로한다. 이에 츠구미는 진도를 나가지 못했던 것이 카즈아키의 상처, 즉 2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 때문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인다. 츠구미는 카즈아키와 보낸 시간이 '마법 같은 시간'(magical time)이었음을 강조한다. 츠구미가 택시에서 내린 직후, 메이코는 기사에게 같은 길을 돌아갈 수 있는지 묻는다. 그렇게 아오야마 지역에 도착한 메이코는 카즈아키 회사 사무실로 들어간다. 다소 즉흥적인 사무실 방문의 계기는 바로 메이코가 츠구미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츠구미가 말하는 카즈아키가 자기가 과거에 사귀었던 그 카즈아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들이닥친 메이코는 카즈아키에게 다짜고짜 (그가 츠구미와 보냈던) '마법 같은 시간'을 조롱하듯이 얘기한다. 그리고 둘은 과거 연애에 관한, 그리고 서로의 진심과 숨겨진 진실에 관한 입씨름을 계속한다. 결국, 충동적으로 카즈아키가 메이코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메이코는 "너는 나랑 맞지 않아. 너랑 (츠)구미가 좋은 커플이 될 거야."라고 답하며, 이에 "마법보다 덜 확신하는 것을 감히 믿어 볼래?"라고 덧붙인다. 이 말 직후 카즈아키는 메이코를 포옹한다. 그 순간 퇴근했던 직원이 돌아온다. 메이코가 사무실 밖으로 부리나케 뛰어나가고, 카즈아키는 그녀를 쫓아가려다 포기한다. 3일 뒤로 점핑한다. 한 카페에서 메이코와 츠구미가 웃으며 대화를 한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카즈아키가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츠구미의 소개로 메이코와 카즈아키는 서로 인사한다. 그런데 갑자기 메이코는 츠구미에게 자신이 카즈아키 사무실을 찾아갔던 일을 고백하며, "내가 카즈(아키)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을 들은 츠구미가 자리를 박차고 떠나자, 카즈아키가 따라 나간다. 이때 고개를 숙인 메이코 줌인. 하지만, 방금 고백은 상상이었다. 다시, 자기소개의 순간. 이번에는 메이코가 카페 밖으로 나간다. 야외에서 걷다가 문득 메이코는 스마트폰을 꺼내 풍경을 찍는다. 프레임 밖으로 메이코가 나간 뒤 카메라가 위를 향한다. 꽃이 보인다.

(2) 제2화: 세가와, 사사키, 나오가 중심인물이다. 세가와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교수이며, 자신의 교수실 문을 항상 열어두는 것을 선호한다. 한편, 사사키와 나오는 모두 대학생이며, 둘은 섹스 파트너의 관계를 맺고 있다. 사사키는 세가와 교수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모욕감을 느끼고 ('미인계'(honeytrap)를 통한) 복수를 꿈꾸고 있으며, 이를 파트너인 나오에게 부탁한다. 나오는 이미 결혼을 해서 딸까지 있지만, 사사키에게 끌려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사사키의 부탁을 수락하여 세가와 교수를 찾아간다.

 나오는 세가와에게 수상을 축하하며,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특이하게도 나오는 책의 겉표지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페이지에 사인을 요청한다. 그리고 나오는 세가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가령, 결혼은 했는지 여부와 (사인을 받은 페이지의) 몇몇 구절에 관한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이에 세가와는 자신은 싱글이며, (오랜 시간을 들여 나오가 직접 낭독한) 상당히 외설적인 구절을 쓰게 된 것엔 다소 복잡한 이유가 있다고 답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스토리의 구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단어들 간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배치(의 문제) 때문이다. 계속하여 나오는, 교수실에 온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 읽은 구절과 관련하여 세가와에게 난감한 질문을 퍼붓는다. 즉, "이 장면을 쓰면서 발기하셨나요?"와 같은 질문. 세가와는 (이상함을 감지하면서도) 나오에게 솔직하게 답을 해준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것이 그 장면이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이거든." 이런 답변의 솔직함에 동화가 된 것인지, 혹은 활짝 열린 문이 신경이 쓰여서인지 계속 서 있던 나오는 세가와 옆에 앉아,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관계 맺음', '성적 유혹', '강한 의지' 등에 관한 얘기들. 그러다 나오는 돌발적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며, (교수실 안에 들어온 뒤에 한 모든 대화를) 녹음 중이던 스마트폰을 세가와에게 보여준다. 세가와는 화가 나서 녹음본을 달라고 말한다. 특히 나오가 낭독한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말이다. 동시에 세가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신의 글을 읽어준 나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이에 나오는 녹음본을 줄 테니 이걸 들으면서 한 번 이상 자위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를 수락한 세가와는 나오로부터 이메일을 통해 녹음본을 받기로 한다. 문제는 나오가 집에서 이메일을 보내는 과정 중에 발생한다. 사가와 익스프레스가 배달 인수증(delivery note)을 놓고 가서, 남편과 딸이 사가와를 반복해서 말하는 바람에, 나오는 세가와가 아니라 사가와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된다. 이때 노트북 화면 줌인. 그리고 5년 뒤로 점핑한다. 버스에서 나오는 우연히 사사키를 만난다. 사사키에 따르면, 나오가 이메일을 잘못 보내서 세가와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나오는 이혼을 하게 되었다. 한편, 사사키는 2살 연상인 동료와 결혼을 했다. 이에 나오는 결혼을 축하하고, 행복하길 바란다며 사사키에게 굿바이 키스를 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물론 자신의 명함을 건네준 뒤에 말이다. 사사키가 탄 버스가 터널 안으로 들어선다.

(3) 제3화: 나츠코와 아야가 중심인물이다. 나츠코와 아야는 모두 센다이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나츠코는 미야기여고를, 아야는 센다이고를 졸업했다. 나츠코는 시스템 엔지니어, 즉 IT업계 종사자이지만, 현재는 실업 중이며, 도쿄에 거주하고 있고, 레즈비언이다. 고등학교 졸업 때쯤 사귀었던 애인을 찾기 위해 모교 동창회 방문차 센다이에 1박 2일 체류한다. 아야는 결혼을 해서 주부이며 차 클래스(tea class)를 운영한다. 남편은 제약회사 연구개발원이며,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다. 한편, 제3화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면서 시작한다. 즉, 2019년부터 퍼지게 된 '제론'(Xeron)이라는 컴퓨터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종류의 정보, 자료가 유출되어 세계는 오프라인이 되고, 우편과 전보 시절로 돌아갔다는 상황.

 결국 찾고 있던 사람을 동창회에서 만나지 못한 나츠코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고등학생 시절 자주 가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센다이역으로 향한다. 나츠코는 센다이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이때, 반대편에서, 즉 내려가는 방향의 에스컬레이터를 탄 흰옷을 입은 여인(아야)을 우연히 보게 된다. 시선의 교환. (이때 우리는 나츠코의 얼굴, 즉 표정을 볼 수 없다. 카메라가 나츠코 뒤에 있기 때문이다.) 나츠코는 다시 내려간다. 그 여인도 다시 올라온다. 둘은 서로 찾던 사람을 본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더 얘기를 나누고자 나츠코는 여인의 집에 같이 가기로 한다. 집으로 가면서 여인은 나츠코에게 센다이에 왜 왔는지, 동창회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등을 묻는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 여인의 이웃을 만나기도 한다. 이때 나츠코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약간 초현실적이네."(It's kind of surreal.) '고바야시'라는 명패가 달린 집 안으로 나츠코가 들어선다. 여인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나츠코는 집 안을 살피면서 여인의 가족의 신상을 묻는다. 여인은 바이러스와 관련해서 남편 얘기를 하고, 피규어와 관련해서 아들 얘기를 하며, 피아노 관련해서 딸 얘기를 한다. 사실, 나츠코가 이렇게 여인의 가족과 관련된 정보를 캐묻는 것은 자기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삶이 행복한지 묻기 위해서다. 실제로 나츠코는 여인에게 행복한지 묻는다. 이와 관련해서 둘이 얘기를 주고받다, 문득 여인이 나츠코에게 "솔직히 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라고 말한다. 동시에 자기 이름은 아는지 묻는다. 이때 여인의 이름이 공개된다. 바로 고바야시 아야. (결혼 전엔 노무라 아야.) 즉, 나츠코가 찾고 있던 유키 미카가 아닌 것이다. (한편, 아직 나츠코의 이름은 아야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아야가 나츠코를 반겼던 이유는 나츠코의 놀란 표정 때문이었다. 즉, 아야는 나츠코를 도쿄로 간 자신의 친구로 오인한 것이다. 아야가 나츠코가 찾는 미카가 아니라는 것은 둘의 출신 고교가 다르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나츠코가 떠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우연히 아야 아들의 택배가 도착한다. 택배원에 의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막힌 나츠코는 자연스레 아야의 집에 좀 더 머무르게 된다. 아야가 나츠코에게 미카에 관해 묻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미카는 고등학교 졸업 때쯤의 나츠코의 애인이었다. 하지만 나츠코가 도쿄로 가게 되면서, 미카는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리고 미카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제 아야가 자신의 남편 얘기를 꺼낸다. 바이러스로 인해 이메일 오발송 문제가 발생하여, 남편의 이메일이 아야에게 전송되었다. 그래서 아야는 남편이 고등학생 시절 사귀었던 전 여자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하지만, 아야는 남편의 문장이 '잘 쓰였다'고 생각하며, 이메일을 읽은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 남편과 불편해질 것을 우려해서다. 나츠코가 갑자기 일어난다. 아야에게서 미카가 계속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야의 바이브(vibe) 때문이다. 

 이때 아야가 나츠코에게 역할극을 제안한다. 자신이 미카 역을 맡겠다는 것이다. 아야가 나츠코에게 (늦었지만) 이름을 묻는다. 이에 대한 답. 히구치 나츠코. 역할극이 시작된다. 나츠코는 하고 싶었던 말을 (아야가 연기하는) 미카에게 한다. "네가 내 유일한 사랑이었어." "내가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고 싶었어." "나는 이제 알았어, 고통이 우리 삶에서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말이야." "너는 분명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을 갖고 있어. (투 숏에서 아야 바스트 숏으로 전환.) 내가 그 구멍을 채울 방법은 없어. (리버스 숏. 나츠코 바스트 숏으로 전환.) 그러나 나도 너와 같은 구멍을 가지고 있지. 우리는 아마 여전히 그 구멍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을 거야. 그걸 말하려고 여기에 온 거야." 이 역할극은 아야의 아들이 귀가하면서 종결된다. 나츠코가 떠날 채비를 한다. 아야는 나츠코를 배웅하기 위해서 센다이역까지 같이 가게 된다. 역 앞에서 나츠코는 아야에게 "나를 누구로 착각한 거야?"라고 묻는다. 아야는 고등학생 시절 점심시간에 같이 피아노를 치며 대화를 나누던 보이시한 여자애라 답한다. 둘은 같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이때 나츠코는 아야에게 역할극을 다시 한번 하자고 제안한다. 이번엔 나츠코가 아야를 위해 보이시한 피아니스트 역을 맡는다. 우연한 만남으로 가장하며 시작된 역할극. 아야와 (나츠코가 연기하는) 야아의 친구는 서로 반가워한다. 친구가 안부를 묻자, 아야는 자신의 고민을 얘기한다. "나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열정적이지 않아.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시간이 천천히 날 죽여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미안해." 이에 친구는 "네가 유일하게 내게 다가와 준 사람이야. 단 한 발자국이었지만, 그건 내게 큰 의미였어. 너는 내 유일한 빛이었어. (...) 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능력을 갖고 있어. 그걸 반드시 기억해줘."라고 답한다.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둘은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나츠코는 프레임 오른쪽으로 향한다. 아야는 왼쪽으로 향하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카메라는 아야 뒤에 있다. 갑자기 아야가 아래로 뛰어 내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마치 카메라는 이 상황을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는 듯이 아야를 물리적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그저 부리나케 왼쪽으로(정확히는 좌상단 쪽으로) 시선을 돌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뛰어가는 아야를 포착한다. 아야가 뛰어가 나츠코를 붙잡는다. 그리고 그 여자애 이름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바로 노조미. 둘 다 동시에 "노조미!"라 외치며 포옹한다. 나츠코가 노조미의 성을 묻지만, 아야는 기억나지 않는다. 둘은 다시 한번 포옹한다.

첫 번째. 대화의 '장소' (⇢ 대화의 '종결')
 아마 세 이야기를 어떤 뜰채로 엮어 내느냐에 따라 <우연과 상상>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미 고지한 두 개의 기준에 따라 <우연과 상상>을 정리할 생각이다. 즉, 대화의 '장소'와 단편들의 배치 '순서'에 따라서 말이다. 먼저, 대화의 '장소'다. 그런데 나는 대화가 아니라 장소를 강조해 두었다. 사실, <우연과 상상>은 가히 대화의 영화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사량이 상당히 많고, 실제로 대화가 한번 시작되면 어떤 계기에 의해서가 아니면 끊기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하마구치가 대화를 담아내는 방법', '대화 장면에서 하마구치의 카메라 위치' 등 공학적인 측면에서의 분석론을 펼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나는 대화가 어떤 계기에 의해서 끊기게 되는가, 그것에 관심을 두고 따져보려고 한다. 이 계기와 관련하여, 우선 중요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이 바로 대화의 '장소'다. 각 화에서 대화의 장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에 각 장소의 대화자들을 병기한다. 단, 영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화의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인물에는 취소선 표시를 해둔다.)

(a) 제1화: 길거리(메이코, 츠구미, 스태프들), 택시(메이코, 츠구미, 택시기사), 사무실(메이코, 카즈아키, 직원), 카페(메이코, 츠구미, 카즈아키, 직원 및 타 손님들

(b) 제2화: 강의실(교습자, 학생들), 교수실(세가와, 사사키, 타 교습자), 사사키 집(사사키, 나오, (TV속) 세가와), 교수실(세가와, 나오, (바깥의) 타 학생들), 나오 집(나오, 남편과 딸), 버스(나오, 사사키, 버스기사, 졸고 있는 타 승객들

(c) 제3화: 동창회(나츠코, 기요미야, 타 졸업생들), 식당(나츠코, 식당 주인, 타 손님들), 육교⇢길거리(나츠코, 아야), 집 앞 골목길(나츠코, 아야, 아야 이웃), 아야 집(나츠코, 아야, 택배 배달원, 아야 아들 케이), 집 앞 골목길⇢길거리⇢육교(나츠코, 아야)

 이 장소들을 몇 가지 기준을 세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실내 혹은 야외', '공적인 장소 혹은 사적인 장소', '정지 혹은 이동' 등에 의해서 말이다. 사실, 제1화의 시작, 길거리에서 화보 촬영을 할 때 단순 의견 교환 수준의 대화를 제외하고, 제1화와 제2화에서 대화의 장소는 전부 실내다. (몇몇 야외 장면을 상기하면 다음과 같다. 제1화에서 메이코는 택시에서 내려 사무실을 올라가거나,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길거리에서 방황하거나, 카페에서 빠져나와 풍경을 찍는다. 또한 제2화에서 나오는 지하철을 타고, 걸어서 세가와 교수실을 방문한다. 하지만 이 야외 장면들에서 대화가 이루어지진 않는다. 대화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내라고 하여 전부 사적인 장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집은 섹스를 하거나(사사키 집), 외설적인 내용인 담긴 녹음본을 이메일로 보낼 수 있는(나오 집) 사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지만, 사무실, 카페, 교수실은 포옹을 하거나(사무실), 소동을 피우거나(카페), 소설의 외설적 구절을 읽기엔(교수실) 다소 적합하지 않은 공적인 장소라 할 수 있다. 특히 사무실에는 직원이, 카페에는 다른 손님이, 교수실(의 주인은 심지어 문을 열어두는 것을 선호한다.)에는 다른 학생이 언제든 오고 갈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축을 더해볼 수 있겠다. 실내는 기본적으로 정지의 상태에 있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교통수단, 특히 택시와 버스 안의 경우. 택시와 버스 안은 실내이긴 하지만 계속 이동을 하는 공간이기에, 만약 (가족, 룸메이트, 파트너 등의 관계를 이유로) 같은 집 혹은 같은 목적지를 향하지 않는 이상 동승의 관계(즉, 대화의 지속)는(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으며, 한편 직접 개인 차를 운전하면서 대화를 하는 것과 달리 제삼자, 즉 기사나 다른 손님 등이 존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에 관한 보충적 설명. 제1화에서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뒷자리를 확인하는 숏이 삽입되긴 하지만, 이 고급택시(히노마루 리무진)의 기사는 묵묵히 운전할 뿐 메이코와 츠구미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또한, 제2화에서 버스기사는 물리적인 거리상 사사키와 나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고, 뒤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모두 졸고 있다. 따라서 택시 및 버스에서 기사나 다른 손님들을 두고 단적인 대화의 참여자나 시청자라 할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제1화와 제2화에서의 인물은 주변 사람들의 존재에 영향을 받아 대화의 주제를 바꾸거나, 범위를 좁히지 않는다. 가령, 택시에서 메이코와 츠구미는 연애와 섹스를 소재로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버스에서 사사키는 나오의 이메일 오발송 사건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이에 나오는 사사키에게 굿바이 키스를 한다.)

 이어서, 이제 하마구치가 대화의 플로(flow)를 끊는 방식을 살펴볼 차례다. 그런데 왜 대화가 끊기는 순간이 중요한가? 잠깐 우회. <우연과 상상>에서 하마구치가 한 것은 오직 인물들 간의 대화를 찍은 것이다. 영화에서 대화하지 않는 장면은 최소화되어 있는데, 있다고 하더라도 지속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렇다면 왜 하마구치는 대화에 집착하는가? 물론 (세가와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잡한 이유가 있을 테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유명한 말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를 인용하는 것은 논의의 범위를 너무 확장하는 일일 것이다. 대신 하마구치의 말을 상기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마구치는 말의 힘을 믿는다고 말한 바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마구치는 “대화하는 행위 자체에 굉장한 희망이 담겨있다."라고 믿는다. 이와 관련하여, 하마구치는 특히 ‘진실한 발음(發音)’, 즉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물리적 측면에서 볼 때, 소리는 음원으로부터 방사되는 압력파가 매질 내에서 전달되는 것이다. 소리가 일으키는 파동을 음파라 하고, 또 매질은 어떤 파동(혹은 물리적 작용)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매개물 역할을 한다. 공기나 물 같은 것들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목소리도 소리다. 공기를 통해 전달된다. 하지만 이제 공기는 2019년 이전의 공기(의 의미)와 다르기 때문에 (김곡의 용어인) '분위기'로 단순히 치환될 수 없다. 갑자기 2019년? 그렇다. 대화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만 하는 새로운 축이 추가된 해. 물론 <우연과 상상>에서 하마구치가 코로나바이러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혹은 마스크라는 물리적 장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이 새로운 축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공기를 여전히 분위기로 볼 수 있다면, 이때 분위기는 일차원적인 압박감을 넘어서 일종의 의심과 불안의 압박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맞다. (불안?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안은 공포와 구분된다. 어떤 것 앞에서 두려워 떠는지가 밝혀져 있지 않을 때가 불안이고, 밝혀져 있을 때가 공포다.) 이런 맥락에서, 하마구치가 여러 차례 말했던 '운'과 '우연'의 의미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운'과 '우연'은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가령, 제1화와 제2화의 이야기. 두 이야기는 우연한 계기(제1화, 택시에서의 대화) 혹은 실수(제2화, 이메일 오발송)에 의해 인물들 간의 관계에 금이 가고, 그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이야기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제1화와 제2화는 우연의 불운화 과정의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의 플로 자체가 하나의 은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축을 염두에 둔 은유다.

 여기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대화가 끊기는 순간이 중요한가? 당연한 말이지만, 대화는 무한히 지속될 수 없다. 대화가 시작되면 어느 순간에는 끝나야 한다. 이는 영화가 시작되면 어느 순간에 끝나(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1988-1998) 4(b) 13분경에 의미심장한 말이 나온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어디서 그리고 왜 숏이 시작하는지와 어디서 그리고 왜 숏이 끝나는지인 것 같다."(Le seul grand problème du cinéma me semble être où et pourquoi commencer un plan et où et pourquoi le finir.) 여기서 '숏'을 '대화 (장면)'(으)로 바꿔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마구치는 새로운 축을 염두에 두며 대화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종결시킨다. <우연과 상상> 내의 대화를 분류하면, 크게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바로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종결되는 경우'와 '새로운 인물이 등장(혹은 개입, 참여 등)해서 종결(혹은 일시정지(pause))되는 경우'다. 전자의 사례로, 택시나 버스에서 동승자가 내려야 하는 경우(츠구미와 나오의 목적지 도착), 성적 충동에 사로잡히는 경우(사사키와 나오),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 경우(세가와와 나오) 등이 있다. 사실, 이런 경우들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대화를 종결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후자의 사례다. 일단 '새로운 인물의 등장(혹은 개입, 참여 등)'은 단순히 같은 장소 내에 대화의 장(場) 밖에, 즉 프레임 밖에 제삼자의 누군가가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외려 그 '새로운 인물'이 이미 대화 중인 두 인물 사이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대화의 플로를 컷하여 대화의 장의 공기를 바꾼다는 것을 뜻한다. 갑작스러운 등장의 상황? 이는 <자나 깨나>에서 오사카로 떠나기 전날 저녁 친구들과 식사 및 대화를 하던 아사코와 료헤이 커플 앞에 바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우연과 상상>의 규칙은 <자나 깨나>의 규칙과 다르다. 제1화와 제2화에 국한해서 생각해볼 때, <우연과 상상>에는 <자나 깨나>에서처럼 4명(가령, 아사코-마야 집: 아사코, 료헤이, 마야, 쿠시하시)이나 5명(가령, 식당: 아사코, 료헤이, 마야, 쿠시하시, 하루요)이 대화하는 장면은 없기 때문이다. 즉, 4명 이상의 인원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 경우는 없다. 아니, 사실 있다. 그런데 특수한 상황에 국한된다. 가령, '일'과 '교육'에 관련될 때, 즉 길거리에서 모델과 스태프들이 화보를 촬영할 때와 강의실에서 교습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4인 이상이 한 프레임에 담긴다. 이때 이들은 물론 대화를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테다: 하마구치는 <우연과 상상>에서 (은밀한) 방역지침의 논리하에서 특수한 경우(즉, 일과 교육의 경우)가 아니고선 대화자의 수(혹은 프레임 안의 사람의 수--물론 하마구치는 무조건적으로 한 프레임에 두 명을 욱여넣지 않는다. 숏을 분할해서 한 명씩 보여주거나 숏/리버스 숏도 활용한다.)를 제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택시에서 메이코와 츠구미 2명(기사 제외), 사무실에서 메이코와 카즈아키 2명(직원이 추가되며 3명), 카페에서 메이코와 츠구미 2명(카즈아키가 추가되며 3명, 직원 및 타 손님들 제외), 교수실에서 세가와와 사사키 2명(타 교습자가 추가되며 3명), 사사키 집에서 사사키와 나오 2명(TV-이미지의 세가와까지 친다면 3명), 교수실에서 세가와와 나오 2명(문이 열려 있어 (교수실 바깥에서 안을 바라보는 숏일 때) 특정 순간마다 X명이 추가되며 2+X명), 나오 집에서 나오 1명(남편과 딸이 동시에 추가되며 3명. 그런데 카메라의 시선은 노트북 모니터에 고정되어 인물들이 제대로 보이진 않는다.), 버스에서 사사키와 나오 2명(기사 및 졸고 있는 타 승객들 제외).

 따져봐야 할 것은 바로 '추가되며'의 상황이다. 새로운 인물이 갑작스럽게 등장할 때의 상황. 첫 번째 질문. 새로운 인물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이미 대화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 입장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 질문. 새로운 인물은 어떤 장소에 등장하는가? (앞서 한 분류에 따르면) 실내 중 정지된 상태의 공적인 장소에 등장한다. (물론 새로운 인물은 사적인 장소라 할 수 있는 나오 집에서도 등장한다. 바로 남편과 딸. 하지만 나오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여기서 제외한다.) 종합적 질문. 새로운 인물이 이미 대화가 벌어지고 있는, 실내 중 정지된 상태의 공적인 장소에 입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대화가 끊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적인 대화, 즉 그 '둘'만의 대화가 끊긴다. 가령, 사무실에서 메이코와 카즈아키의 대화는 퇴근했던 직원이 돌아오면서 끊긴다. 카페에서 메이코와 츠구미의 대화는 카즈아키가 카페에 들어오게 되면서 끊긴다. 교수실에서 세가와와 사사키의 대화는 타 교습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끊긴다. (교수실은 한 번 더 나온다. 같은 장소이지만 세가와와 나오가 대화할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오가 닫은 문을 세가와가 다시 열어둠으로써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세가와가 문을 여는 순간 잠시 대화가 끊긴다. 하지만, 다른 경우처럼 아예 끊기진 않는다.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다만, 활짝 열린 문에 의해 나오가 이끌던 대화의 플로는 점차 원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간다.)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과 상상>에선 문제가 된다. 달리 말하자면, <우연과 상상>에서 두 사람이 대화 중일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외려 이는 그 둘로 하여금 경계 태세를 취하게 만드는 일이다. 경계 태세? 이는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람 때문에 새로운 공기가 형성되어서, 그 새로운 공기를 마셔야 하기 때문에 취해지는 태세다. 하마구치가 생각할 때, 이 태세의 적합한 표현 방식은 바로 대화의 '종결(혹은 일시정지)'이다. 일종의 숨참음, 즉 공기 공유의 거부. <우연과 상상>에서 두 명은 대화할 수 있지만, 세 명은 대화할 수 없다. 새로운 사람이 추가되어 둘에서 셋이 되는 순간 (그 둘의) 대화는 붕괴되며, 한 사람이 떠나버리던가(사무실에서 직원 인, 메이코 아웃. 카페에서 카즈아키 인, (상상 이후) 메이코 아웃.) 한 사람만 남게 된다(카페에서 카즈아키 인, (상상 속에서) 츠구미, 카즈아키 아웃. 교수실에서 타 교습자 인, (프레임 안에) 사사키, 타 교습자 아웃, 즉 엎드려 있는 사사키를 바라보는 세가와 타이트 숏으로 씬 종결.). 요컨대, 이것이 한편으로는 <우연과 상상> 내 하나의 규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마구치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축을 (은밀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증거다.

두 번째. 단편들의 배치 '순서'
 <우연과 상상>에서 하마구치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축을 (은밀하게) 염두에 두면서, 대화의 지속 가능성에 관한 일종의 실험을 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다면, 이 가설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제3화다. 특히 단편들의 배치 '순서'라는 기준에서 봤을 때 말이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지금껏 나는 의도적으로 제3화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제3화를 제1화, 제2화와 분리하기 위해서다. 아니, 분리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제3화는 제1화, 제2화와 달리 가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 공간? 갑자기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SF적 세계관을 공유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3화의 도입부를 떠올려보면, 특이하게도 롤링 텍스트가 삽입된다. 텍스트를 요약하면, 2019년 이후 '제론'이라는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해 세상이 오프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3화는 분명 센다이라는 현실 속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센다이는 현실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공간이다. 달리 말해, 2019년 이후로 오프라인이 되어버린 센다이는 하마구치가 상상해낸 가상 공간이다. 이 괴상한 공간에서도 하마구치의 (은밀한) 새로운 축은 여전히 이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간에서 두 명의 인물, 즉 나츠코와 아야는 실내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이 대화는 특수한 경우, 즉 일이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분명 앞선 두 화와 다른 지점이다. 내친김에 제3화와 제1화, 제2화 간의 여러 차이점을 떠올려 보자. 대화의 장소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플로나 중심인물의 수(數)에서도 차이가 있다. 먼저, 이야기의 플로. 제1화와 제2화는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의 인물 둘(메이코와 츠구미, 사사키와 나오)이 어떤 우연한 계기(택시에서의 대화) 혹은 실수(이메일 오발송)에 의해 그 관계에 금이 가는 과정을 다룬다. 반면, 제3화는 전혀 모르는 (그러나 서로 아는 사람이라고 오인한) 인물 둘(나츠코와 아야)이 서로에 대해서 탐색하고, 우정을 다지는 과정을 다룬다. 그다음, 크레딧에 떠오른 이름의 수. 즉, 각 화의 중심인물의 수. 제1화와 제2화에서의 크레딧엔 3명의 이름이 떠오르지만, 제3화에서는 2명의 이름뿐이다.

 하마구치는 세 개의 이야기 중 나츠코와 아야의 이야기를 <우연과 상상> 마지막에 배치하면서, 마치 제3화를 제1화와 제2화에 대한 어떤 응답처럼 읽히게끔 만들었다. (<우연과 상상>의 메인 포스터가 제3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어떤 응답? 바로 희망의 응답. 더 이상 '운'과 '우연'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제1화와 제2화), 그렇다고 해서 그 두 항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새로운 관계, 새로운 우정을 만들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제3화). 사실, 운과 우연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 아니다. 운과 우연의 상황은 그저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다만, <우연과 상상>에서 운과 우연은 대화의 플로에 따라 얼마든지 불운화도 되고, 행운화도 된다. 결국 대화. 대화가 중요하다. 정확히는, 대화의 플로가 중요하다. 하마구치는 여전히 대화의 힘을 믿는다.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것보다 대립과 갈등이 생기더라도 대화하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심지어 하마구치는 상처와 균열이 대화를 통한 교류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화를 가로막는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축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제 대화하는 데 있어서 이 새로운 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바이러스에 이미 감염된 자를 포함하고 있을) 불특정 다수가 돌아다니는 야외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의심과 불안의 상태에 있지 않으면서, 대화를 한다는 것을 (심지어 포옹까지 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마구치는 이 문제를 제3화로 정한 나츠코와 아야의 이야기에서 괴상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바로 모두가 바이러스에 걸리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 바이러스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라 컴퓨터 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정보가 유출되었고, 이메일이 오발송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라인, 카톡, 페메 따위를 쓰지 않고, 우편과 전보를 활용한다. 이것이 하마구치가 제3화에서 디폴트로 설정한 것이다. 이런 설정에서, 역설적이지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대면해서 대화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츠코가 미카와 교류하기 위해 도쿄에서 센다이까지 온 것이다. 물론 나츠코가 미카에게 우편이나 전보를 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둘이 헤어진 지 오래된 상태에서, 더욱이 온라인에서 미카의 개인정보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방식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결국 나츠코가 미카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만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츠코는 미카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에 미카로 오인한 아야를 만났다. 그리고 대화했다. 아니, 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나츠코와 아야는 발화하여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런 대화 상대방을 (은연중에 계속)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마구치가 현실의 바이러스의 성질을 비틀어 가상의 바이러스를 만든 다음, 모두를 그 바이러스에 걸리게 한 뒤에, 대면하여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무대를 짠 것도 한몫했다.

 이 새로운 무대의 중심인물인 나츠코와 아야는 기억의 문제를 갖고 있다. 즉, 둘은 각자 자신의 친구의 얼굴이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갖게 된 것에 오프라인된 세상의 시스템(특히, 제1화, 제2화와 달리 제3화에는 스마트폰이 등장하지 않는다.)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츠코와 아야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사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츠코와 아야가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나츠코와 아야의 첫 만남에서 아야가 받아야 하는 택배 때문에 차를 마시러 가지 못한다고 했을 때도(이는 아야가 나츠코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면서 해결된다.), 서로를 각자의 친구로 오인했음을 깨닫게 된 순간에도(이는 택배 배달원에 의해 떠나려고 하던 나츠코가 아야 집에 좀 더 머물게 되면서 해결된다.), 둘은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고 한다. 이때 '이어가려고 한다'에서 '-려고'라는 연결 어미는 노력과 의지의 의미를 내포한다. 즉, 나츠코와 아야는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대화의 의지가 있다. 심지어 그 의지가 강하다. 강하기 때문에, 대화는 역할극으로까지 확장된다. 역할극? <자나 깨나>에 이어 <우연과 상상> 제3화에서도 역할극의 문제가 대두된다. (나는 <자나 깨나>에서 아사코, 바쿠, 료헤이 간의 관계의 역전과 반복을 두고 '역지사지의 상황 재현'이라는 표현을 쓰며, 영화의 후반부를 일종의 역지사지의 드라마 혹은 상황극(역할극)으로 본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나의 다른 글 "<아사코 I & II (자나 깨나)>(2018) 下" 참조.) 하지만 <자나 깨나>의 경우와 달리 <우연과 상상>에서의 역할극은, 분명 프레임 안에 두 명만 있지만, 혹은 대화자는 두 명이지만, 마치 세 명이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첫 번째 역할극에서 나츠코와 미카(⇠아야). 그리고 두 번째 역할극에서 아야와 노조미(⇠나츠코). 사실, 이와 같은 역할극은 대화의 심화 과정이며, 특히 대화를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하는 간절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태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둘이 새로운 인물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맞닥트리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령, 집 앞 골목길에서 아야의 이웃을 만날 때나 집에 택배 배달원 혹은 아야의 아들이 들어왔을 때, 나츠코와 아야의 대화가 일시정지되긴 하지만, 이내 재개된다. (여담. 이 일시정지의 순간이 바로 여전히 하마구치가 (은밀하게) 새로운 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많은 인원이 몰려 있는 미야기여고 동창회에서 나츠코가 기요미야와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성급히 떠나는 경우도 여기에 덧붙일 수 있을 테다.) 재개된 대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아야는 센다이역까지 나츠코를 배웅하면서, 그리고 육교 위에서의 두 번째 역할극이 끝나서 작별 인사를 했음에도, 다시 돌아와 나츠코에게 뛰어가서 대화를 이어가려고 한다. 그 절정은 제3화의 마지막 숏이다. 바로 나츠코와 아야가 껴안고 있는 그 숏. 결국, 제3화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나츠코와 아야가 대화(⇢역할극)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는데, 그 '다가감'(탐색)이 '이어짐'(우정)에 도달하는 그 과정의 이야기다.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이때 중요한 것은 대화를 지속하려는 둘의 노력과 의지다.

 어쩌면 <우연과 상상>은 <자나 깨나>의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영화일지 모른다. 우리는 <자나 깨나>의 마지막, 아사코와 료헤이가 나란히 서서 집 앞에 흐르는 강을 두고 상반된 반응을 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둘의 관계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둘 사이에 의심과 불안이 싹텄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플로의 이야기를 하마구치는 정확히 <우연과 상상>의 제1화와 제2화에서 반복한다. 그리고 그 둘의 결말 '이후'로서 제3화를 시작한다: 나츠코와 아야는 이미 자신의 친구와 (어떤 이유에서건) 헤어진 상태고, 특히 나츠코는 미카와의 사랑을 잊지 못해서, 아야는 바이러스에 의해 이메일이 오발송되어 남편의 사생활을 알게 되어서 심란한 상태이며, 이런 둘이 우연히 만났는데, (서로가 찾던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음에도) 계속 대화를 이어가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우연과 상상>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마구치가 나츠코와 아야의 이야기를 제1화와 제2화에 응답할 수 있는 제3화의 자리, 즉 마지막에 배치했다는 사실과 바로 그 이야기가 간절한 태도를 견지하며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 둘의 노력과 의지의 이야기라는 사실에서 일 테다. 불특정 다수가 돌아다니는 야외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대화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작금의 현실을 고려할 때, 나츠코와 아야가 헤어지기 직전까지 (집 앞 골목길⇢길거리⇢)육교에서 장시간 대화(⇢역할극)를 나눈다는 것은 하마구치가 희망적 태도를 견지하며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숱하게 대화와 껴안음의 순간을 봐왔지만, <우연과 상상>의 마지막 숏에서만큼 이 행위가 간절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이 행위는 이제 단순하고 소박한 행위가 아니라, (과장 아닌 과장을 하자면) 거의 죽음까지 각오해야 가능한 행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우연과 상상> 마지막 숏에서 하마구치는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대화하고 껴안을 수 있을까. 하마구치는 회의주의자가 아니다. 하마구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고, 또 찾아낼 것이다. <우연과 상상>은 그 첫 번째 발견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마구치는 <우연과 상상>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우리에게 또 다른 '이후'를 같이 모색하자고 대화를 건네고 있다. 우리는 이 대화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자료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문장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Martin Heidegger, "Letter on Humanism", Basic Writings: From Being and Time (1927) to The Task of Thinking (1964)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D.F. Krell (trans.), HarperCollins, 1993, p. 237 
2. <영화의 역사(들)> 불어 원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Jean-Luc Godard, "chapitre quatre (b) les signes parmi nous", Histoire(s) du cinéma (The complete soundtrack), ECM Records, 1999, p. 57 
3. 진성민, "소리 물리학의 기본 개념", 대한음성언어의학회지 22.2(2011), p. 99 
4. 김곡,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 갈무리, 2019, p. 127 
5. 정성일, "영화의 바깥, 말하자면 공기에 관하여: 세편의 영화에 관한 세 가지 가정", 『씨네21』 1301호(2021), pp. 78-88 
6. 필자의 다른 글 

[번역] 모건 피셔의 <표준 치수 Standard Gauge>(1984) 도입부 Rolling Text

 

▲모건 피셔의 <표준 치수 Standard Gauge>(1984) 

(영화는 다음의 텍스트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1890년대 초, 토머스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두 대의 상호보완적 기계, 즉 키네토스코프와 수직-피드 키네토그래프를 발명했다. 전자는 동전을 투입해서 영화를 보는 장치였고, 후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모션 픽처 카메라였다. 단 하나의 키네토그래프만 만들어졌다. 두 기계 모두 근대 사진술의 혁신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스틸 카메라와 롤 필름에 사용되기 위해서 말이다.

키네토스코프를 통해 단 한 사람만 필름을 볼 수 있었다. 나무 캐비닛 상단에 있는 주철로 만든 접안렌즈를 통해 필름을 내려다보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때, 아래에서 비치는 이미지는 심플 렌즈에 의해 2.5배 확대되었다.

에디슨의 연구소 직원이었던 윌리엄 딕슨이 초기 모션 픽처 실험을 했던 것처럼 새로운 기계에 관한 기술 작업을 이끌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새로운 기계의 필름의 크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했던 사람은 바로 딕슨이었다.

롤 필름은 3.5인치 크기로 제작되었다. 딕슨은 키네토스코프용 필름이 상당히 더 좁아져도, 수용할만한 품질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이미지를 담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미지의 너비를 1인치로, 높이를 0.75인치로 설정했다.

이때 이러한 크기가 채택되어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 즉 거의 40년 동안 지속된 무성영화 시대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이 명시한 비율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딕슨은 스스로 필름에 천공을 뚫어야 했기에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는 프레임 양쪽에 스프로켓 구멍을 위한 여백을 남겨두고, 가장자리에 4개의 천공(퍼포레이션)을 뚫었다. 이러한 배열은 여전히 표준이다. 필름의 너비는 1.375인치로, 거의 35mm에 가까웠다.

1894년 뉴욕에서 최초의 키네토스코프 상영실이 오픈했다.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기계가 즉각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연말까지 키네토스코프는 북미 전역에 크고 작은 도시에 설치되었다. 키네토스코프는 현대적 감각으로 영화를 상영한 최초의 기계였다.

키네토스코프를 위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그의 통제하에 남아있었다. 에디슨과 그의 동료들은 수요가 많았던 영화에 대한 공급을 독점하고, 그에 따른 비용을 청구했다.

1894년 가을에 이르러 유럽에 키네토스코프가 도입되었다. 형제인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는 사진용 건판 제조자들이었는데, 그들은 키네토스코프의 대중적 인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사업적 기회를 발견하고 영화 공급자인 에디슨 그룹과 경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작과정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가 영사의 방식을 통해서 상영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초기의 야심을 포기하고, 몇 달 만에 영화를 찍고 상영할 수 있는 기계인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

비록 뤼미에르 형제가 키네토스코프의 방식을 따르진 않았지만, 그들은 필름의 너비를 반올림하여 35mm를 유지했다. 1895년 12월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최초로 대중에게 영화를 상영했다.

동시에 영국의 발명가들은 이에 자극받아 키네토스코프용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먼저 고안하고, 그런 뒤 영사기를 제작했다. 이것들은 발명가들의 초기 목적에 따라 딕슨의 치수(게이지)뿐만 아니라 그의 포맷의 다른 모든 세부사항이 적용되었다.

35mm 너비는 영화 초기에 정해진 것으로, 이는 미국과 해외의 모션 픽처 산업에서 채택되었다. 다른 치수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35mm도 표준 치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original 
In the early 1890s the laboratory of Thomas Edison invented two complementary machines, the Kinetoscope and the vertical-feed kinetograph. The first was a coin-operated device for viewing films, and the second was a motion picture camera to make the films for it. Only one kinetograph was constructed. Both machines were made possible by a recent photographic innovation intended for use in still cameras, flexible roll film. 

The Kinetoscope showed a film to only one person, who looked down at the film through a cast iron eye-piece on top of wooden cabinet. The image, lit from beneath, was magnified two and a half times by a simple lens. 

William K.L. Dickson, an Edison employee, led the technical work on the new machines, as he had led the earlier motion picture experiments at the Edison laboratory. With little doubt it was Dickson who decided what the dimensions of the film for the new machines should be. 

Roll film was manufactured in widths up to 3½". Dickson determined that film for the Kinetoscope could be substantially narrower and still register images large enough to provide acceptable quality. He made the image 1" wide, and set its height at ¾". 

These dimensions were adopted virtually unchanged as the standard of the silent era, which was to last nearly forty years. The proportions they express have persisted to the present day. Dickson had to perforate the film himself, so he was free to do as he liked. He provided margins for sprocket holes on both sides of the frame and located four perforations in either edge, an arrangement that is still standard. The width of the film was 1⅜", almost exactly 35 millimeters. 

The first Kinetoscope parlor opened in New York in April 1894. The new entertainment machine was an immediate popular success. By year's end Kinetoscopes were installed in cities large and small throughout North America. The Kinetoscope was the first machine to show films in the modern sense. 

The kinetograph, the only camera capable of making films for the Kinetoscope, remained at Edison's laboratory under his control. Edison and his associates monopolized the supply of films, for which there was great demand, and charged accordingly. 

The Kinetoscope reached Europe in the fall of 1894. The brothers Auguste and Louis Lumière, manufacturers of photographic dry plates, were struck by the popular appeal of the Kinetoscope. They saw a business opportunity and set about constructing a camera that would enable them to compete with the Edison group as suppliers of films. 

In the course of their efforts the Lumières came to understand that films could also be presented by means of projection. They abandoned their original ambition and within a few months had invented the Cinématographe, a machine that could both take films and project them. 

Although the Lumières broke away from the Kinetoscope, they retained the width of its film, rounding it to 35 millimeters. In December 1895 in Paris the Lumières projected their films before an audience of the public for the first time. 

At the same time, inventors in England were stimulated first to devise cameras to make films for the Kinetoscope, and then to construct projecting machines. Their initial purpose committed them not only to Dickson's gauge, but to every other detail of his format as well. 
 
The width of 35 millimeters was established at the beginning of film, and it was adopted by the motion picture industry in America and abroad. As other gauges made their appearance, 35mm also came to be known as standard gauge.

로이 앤더슨의 <끝없음에 관하여 About Endlessness>(2019): 겨울에 다가가지만 도달하진 않는 영화

1.

로이 앤더슨의 최근작 <끝없음에 관하여 About Endlessness>(2019)는 일종의 극한(lim) 개념이 담긴 영화다. 극한 개념? 우선 영제목의 ‘Endlessness’. 사전적 정의로 끝없음, 영원함, 무한함 등을 뜻한다. 영화 내에서 설렘, 후회, 강박, 사랑, 우울 그리고 폐허, 전쟁, 무덤, 살인, 폭력 등의 이미지들이 서로 대조되면서 공명하고, 이 이미지들과 이미지들 사이사이에 삽입된 (특히 페이드-아웃될 때의) 검은 화면, 이런 것들이 생과 사, 끝과 끝없음의 경계를 직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기에, 이런 지점에서 영원함 혹은 무한함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는 있지만, 사실 단순히 이런 이미지들의 나열 혹은 이미지 내의 잠재적(암시적) 역량과 그로부터 명상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Endlessness’의 뜻 중 ‘무한함’으로부터 떠오른 개념. 극한 개념. 즉 어떤 유한값에 무한히 다가갈 때, 이 다가감의 결과값은 (수렴할 때의) 극한값을 가질 뿐 그 다가감의 대상이 되는 값에 완벽하게 도달하지 않는다는 개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가가지만 도달하지 않는다’는 동사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이 동사적 행위를 이행하는 영화다.


2.

오프닝 타이틀 이후 총 32개의 프레임(여기서 나는 의도적으로 숏이나 씬 말고 키아로스타미의 <24프레임>(2017)을 계승하여 ‘프레임’이라는 표현을 쓴다.)으로 이루어진 <끝없음에 관하여>는, 노부부인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 중 여성이 날아가는 새를 보며 “벌써 9월이네.”라는 대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첫 번째 프레임). 계절을 암시하는 단어, 9월. 가을의 시작. 일견 영화는 가을에서 시작해 점차 겨울을 향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계절이란 화두를 꺼낸 이유. 우리는 영화에서 계절이 주는 감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 영화를 통해 인지하고 있다. 가령 오즈 혹은 로메르의 사계절 연작 등을 통해서 말이다. 꼭 언급한 감독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영화에서 계절적 배경, 혹은 그 배경 속에서 인물이 어떤 의복을 입고 있는가는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겨울'로 향해간다는 사실이다. (이 향해 감은 불가항력적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겨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겨울에 다가가는 것은 단순히 회색빛의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울과 비애, 패배와 실패, 그리고 죽음에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점차 겨울에 다가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눈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28번째 프레임부터다. 치과에 환자가 누워서 치과의사를 기다린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다. 창문엔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치과의사는 예민하게 구는 환자를 치료하다 떠나고(28번째 프레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음악이 깔리면서 다음 프레임으로 넘어간다.), 어느 술집에 도착하여 턱스크를 한 채 홀로 술을 마시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29번째 프레임). 옆에 이름 모를 남자가 창밖에 눈이 펑펑 내리는 광경을 보며 “환상적이지 않나요?”라는 말을 건네도 치과의사는 그 말을 무시한다. 오히려 그 말을 들은 술집의 다른 남자가 “뭐가요?”라고 반문한다. 이에 이름 모를 남자는 “전부요.”라고 답한다. 그런 뒤 이름 모를 남자가 치과의사에게 “내 생각엔, 적어도요.”라고 반복해서 말하자, 그제서야 치과의사는 마지못해 “알겠어요.”라고 답해준다. 그다음 패배한 군대의 이미지가 펼쳐진다(30번째 프레임). 눈보라가 치는 대지 위 끝없는 행렬을 따라 패배한 군인들은 포로수용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다음, 가정집이 나온다. 노인은 학창시절 자신보다 능력이 없었던 친구가 세월이 흘러 박사학위를 따고 심지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아내에게 하소연을 한다(31번째 프레임). 또 다른 노인은 차에 문제가 생겨 혼자 수리를 해보지만 실패하고, 도움을 줄 누군가가 지나가지 않을까 두리번거리지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32번째 프레임). <끝없음에 관하여>는 가을의 쓸쓸한 분위기, 겨울의 냉혹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적극 끌고 들어오는데, 그래서인지 영화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낙관적인 분위기의 프레임보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의 프레임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이 암울한 분위기는 겨울에 다가가면서 살인(21번째 프레임), 폭력(22번째 프레임), 체념(24번째 프레임), 우울과 불운과 배척(25, 26, 27번째 프레임)의 프레임에 의해 심화되고, 눈의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이제 겨울에 다다른 것 같다고 볼 수 있는 시점에 이르러선(28~30번째 프레임) 절정에 이른다. 다시, 겨울에 다가간다, 는 표현으로 돌아가보자. 겨울? 겨울은 한 해의 끝이다. 따라서 겨울에 다가간다는 표현을 바꿔 말하면 끝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선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물론 겨울이 끝나면 새로운 한 해, 그리고 봄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겨울에 다가간다는 것은 곧 진짜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것 같다. 아니 앤더슨은 이미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끝없음에 관하여>엔 앤더슨의 일종의 종말 의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3.

하지만 앤더슨은 이 종말 의식에 잠식당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 근거는 바로 31번째와 32번째 프레임이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겨울에 다가가지만 도달하진 않는 영화다. 단적으로 영화의 마지막인 31번째, 32번째 프레임은 겨울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두 프레임은 직전의 프레임과 계절적 배경이 다른가. 잠시 우회. 사실 첫 번째 프레임에서의 여성의 말 속의 단어 ‘9월’ 그리고 28~30번째 프레임에서의 눈의 이미지를 제외하고, 그 사이의 프레임들 속에서 계절적 특징, 특히 점층적으로 계절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만한 특징을 발견하긴 어렵다. 다만 실내에서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두 남녀가 나오는 23번째 프레임을 제외하곤(물론 이 역시 가을이지만 실내라서 반팔을 입고 있다고 생각할 여지는 충분하다.) 대부분의 프레임에서 인물들은 긴팔 티셔츠 혹은 외투를 착용하고 있고, 여기에 일관된 회색빛의 채도가 주는 분위기까지 더해지는 것을 고려했을 때, 첫 번째 프레임과 28번째 프레임 사이의 각 프레임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기적 구분의 문제는 차치하고) 계절적 기준에서 봤을 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베리에이션에 걸쳐있다고 가설을 세워볼 순 있다. 이런 가설의 맥락에서, 영화는 28~30번째 프레임에서 완연한 겨울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겨울에 도달했다, 고 단언할 수는 없다. 31번째, 32번째 프레임, 얼핏 보더라도 이 두 프레임은 겨울, 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이 두 프레임을 두고, 30번째 프레임 이후에 나온 것들이니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가시적으로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고 쉽게 말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후반의 두 개의 프레임은 초반의 두 개의 프레임과 대응하기 때문이다. 먼저 31번째 프레임. 이 프레임에서 등장하는 노년의 남자는 이미 두 번째 프레임에서 등장했던 사람이다. 물론 믿음을 잃어 십자가를 이고 언덕을 올라가는 악몽을 꾸었던 성직자 역시 몇 개의 프레임에 걸쳐 등장했기에 반복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의 깊게 상기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 프레임에서의 내레이터의 말이다. 그 말에 따르면, 노년의 남자는 아내를 놀래키기 위한 근사한 저녁식사를 위해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다시 31번째 프레임. 누가 봐도 장을 보고 돌아온 그 노년의 남자가 아내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며, 준비 과정에서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아무리 실내라고 하지만, 겨울에는 입지 않을법한, 그래도 초가을에는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팔 전체가 드러나는 민소매 옷을 아내가 입고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31번째 프레임은 두 번째 프레임과 같은 시기, 같은 계절이다. 즉, 우리의 가설 속에서라면 적어도 31번째 프레임의 배경은 겨울이 아니다. 그다음 32번째 프레임. 또 다른 노년의 남자가 한창 고장난 차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하늘 위로 새들이 날아간다. 우리는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첫 번째 프레임에서도 본 적이 있다. 비슷한 새들의 무리의 반복 등장. 만약 이 새들이 겨울을 피하기 위해 날아가는 철새들이라면 계절이 다 바뀐 뒤에도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사실 여기에 힌트가 있다. 첫 번째와 마지막 프레임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새들은 '겨울'을 피하고 있다.) 따라서 32번째 프레임은 역시 첫 번째 프레임과 같은 시기, 같은 계절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마지막 프레임의 계절 역시 겨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30번째 프레임을 마지막으로 겨울에서 벗어났다. 마치 영화는 겨울, 아니 겨울의 무력함, 잔인함, 무서움을 마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듯이 갑자기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겨울에 다가가지만 도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시 가을로 원점 회귀하여 끝나는 영화다.


4.

만약 <끝없음에 관하여>의 시작이 봄이었다면, 그리고 각 프레임들의 배경이 봄에서 겨울까지 사계절의 베리에이션에 걸쳐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영화는 다시 봄으로 원점 회귀하여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가을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가을로 원점 회귀하여 끝났다. 그렇다면 왜 가을일까? 여기서 우리는 내레이터를 고려해야 한다. 내레이터는 전지전능한 존재인 것 같다. 내레이터는 프레임 속 인물을 보면서 코멘터리를 말하는데, 이 코멘터리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I saw …”).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프레임들은 내레이터의 회상일 수 있다. 내레이터가 봤던 것을 우리가 다시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기준에서 미래의 일인 것으로 보이는 폐허가 된 도시 위를 두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부유하는 14번째 프레임 역시 내레이터에겐 과거의 일이다. 내레이터는 미래보다도 더 미래에 존재하는 자이다. 이런 내레이터는 온갖 것을 봤을 것이다. 그중 우리는 내레이터가 기억해낸 32개의 프레임만 보는 것이다. 이 기억들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다. 내레이터의 기억들 속 인물들은 실수하고, 집착하고, 실패하고, 슬퍼하고, 고통받는다. 여기서 주지해야 할 것은 이 인물들은 모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계절의 경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왜 가을일까? 우선 겨울이 끝, 종말을 은유한다고 볼 때, 가을은 봄과 여름보다 더 끝, 종말에 가까운 계절이다. 내레이터가 보기에,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이미 가을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미 종말에 가까워졌다. 그렇기에 내레이터의 회상-프레임의 배경은 가을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14번째 프레임에서 보여준 폐허가 된 도시는 우리의 근접한 미래일 수 있다. 이런 의식하의 내레이터의 회상-프레임에 봄과 여름의 자리는 있을 수가 없다. 활발함, 생동감, 생에의 의지가 넘치는 봄과 여름의 단계는 이미 진작에 지나가 버린 것이다. 여기서 봄과 여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아니 겨울을 통과하여 다시 봄을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은 없다. 그럼에도 일말의 낙관주의는 남아있다. 가령 우리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11, 13, 26번째 프레임), ‘남녀 간의 사랑’(14, 15, 16번째 프레임), ‘밝은 분위기 속 여성들의 춤사위’(19번째 프레임) 등의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가을에서 겨울로의 변이는 불가항력적이다. 겨울에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순 없다. 이건 제아무리 전지전능한 내레이터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레이터는 겨울에 다가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럼에도 그 다가감을 최대한 지연시킬 수는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시, 30번째 프레임. 내레이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향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목도한 뒤(기억과 목도, 이 두 개의 동사는 분명 선후관계에 있다. 프레임이 등장한 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레이터는 코멘터리를 말하기 시작한다.) 이 죽음은 어떻게든 유예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듯 겨울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다시 가을로 돌아간다. 의도적으로 다시 가을을 떠올린다. 의도적으로 다시 가을의 프레임을 배치한다. 다시 떠올릴 수 있다, 다시 배치할 수 있다, 이는 앤더슨의 '영화에 대한 믿음'이다. 다가감이 도달함으로 변이되는 그 순간, 즉 다가감이 끝이 나는 그 순간을 유예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 이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돌아간 원점은 시작할 때의 원점과 다르다. 이미 한번 겨울에 도달할 뻔했다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노년의 남성은 아내에게 “짜증난다.”고 말하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또 다른 노년의 남성은 차를 수리하지 못하고 도와줄 사람도 주변에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이 여전히 종말 직전하의 우리의 삶이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가을로의 원점 회귀, 혹은 기억의 배치, 혹은 프레임의 배치라는 소박한 저항에서. 물론 이것이 우리 시대의 암울함을 해결할 수 있는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앤더슨일지라도 섣불리 해결책을 내놓을 순 없다. 만약 앤더슨이 전지전능한 내레이터를 내세워 그런 것을 시도하려 했다면 이 영화는 교만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앤더슨은 그러지 않았다. 앤더슨은 겨울에 다가갈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앤더슨은 그 다가감을 유예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니 영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 소박한 믿음. 그리고 소박한 결단. 소박한 저항. 소박하지만 우린 여기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 결국 <끝없음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희망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건 단순히 몇몇 낙관주의적 분위기의 이미지 내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앤더슨이 전지전능한 내레이터를 도입하여 30번째 프레임까지 기억해내고, 마주한 뒤에 31번째, 32번째 프레임을 배치했다는 것, 즉 양의 무한대로 다가가고 있던 것을 어떻게든 음의 무한대로 방향을 전환하고자 하는 결단을 내렸던 앤더슨의 태도에서다.


5.

어쩌면 <끝없음에 관하여> 가까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24프레임>(2017), 루나 루나슨의 <에코>(2019) 등이 아니라 비간의 <지구 최후의 >(2018) 있다. 종말 의식하에서 이별, 끝남을 어떻게든 유예하고자 하는 태도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유예는 영화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영화에의 믿음. 그리고 다른 믿음. 무슨 믿음? 종말에 다가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 종말이 오기 전까지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고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화하는 것만 가능하다는 믿음. 종말이 오기 전까진 에너지는 형태를 달리 하여 끊임없이, 무한히 존재할 있다는 믿음. 이는 소년이 소녀에게 설명했던 열역학 1법칙이다(23번째 프레임). 이에 덧붙여 했던 소년의 , "이론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는 수백만 뒤에도 다시 만날 있어." 믿음하에서라면 에너지들은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다시 만날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바로 사랑. 사랑에 의해서만 각기 다른 에너지가 서로에게 끌려 다시 만날 있다. 만난 뒤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서로 부둥켜안아야 한다. 부둥켜안을 수만 있다면 거의 종말에 가까워져도,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거기에서 벗어나 부유하며 종말로 다가가는 것을 무한히 유예할 있는 그런 시간 속에서 있을 것만 같다. 이제 프레임 너머로. 오래된 비유. 중력 법칙을 무시한 둥둥 떠다니는 부둥켜안은 커플의 이미지는 마치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유리병 편지 같다. 커플의 이미지는 심지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이전에도, 영화의 포스터, 트레일러 등에도 차용되고 있다. 마치 <끝없음에 관하여> 자체가 유리병 편지처럼 어딘가 계속 부유하고 있는 같다. <끝없음에 관하여> 누군가 꺼내 때까지 유예된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 앤더슨은 믿고 있는 같다. 영화가, 수백만 년이 지나더라도, 누군가와 반드시 만날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와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시 가을로 원점 회귀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