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영화의 명증: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L'évidence du film: Abbas Kiarostami』(Yves Gevaert Éditeur, 2001) pp. 80-95에 수록된 Conversation entre Abbas Kiarostami et Jean-Luc Nancy를 대본으로 삼아서 번역했다. 단 프랑스어 원문을 바탕으로 하되 영역본을 부분적으로 참조하여 번역했다.
- 참고1: [1], [2], [3]・・・ ・・・의 각주는 원저자의 주이다.
- 참고2: 〈1〉, 〈2〉, 〈3〉・・・ ・・・의 각주는 옮긴이의 주이다.
- 참고3: " "은 원문의 « »에 해당하며, ' '은 옮긴이가 추가한 부호다.
- 참고4: 본문에서의 이탤릭체는 원문을 따른 것이다. 단 볼드체는 옮긴이의 강조다.
- 참고5: ( ) 안의 프랑스어는 원문에서, 영어는 영역본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단 ( ) 안의 페르시아어, 한자 표기 등은 옮긴이가 첨가한 것이다.
- 참고6: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강조된 단어 중 일부는 그대로 발음하여 적었는데, 이때 가능하면 ( ) 안에 한국어로 사전적 뜻을 같이 적어두었다. 이외의 ( ) 안의 한국어는 원문에서의 문장을 번역한 것이다.
- 참고7: [ ] 안에 이탤릭체로 강조된 문장은 원문을 옮긴 것이다. 반면 두 개의 '(…)' 사이에 삽입된 [ ] 안에 이탤릭체로 강조되지 않은 문장은 옮긴이의 요약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본문은 발췌본이다. 사실, 내 '번역 계획'과 관련하여 출판사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은 것이 2021년 6월 초의 일이다. 출판사는 장-뤽 낭시에게도 내 '번역 계획'에 관한 의견을 한번 물어보겠다고 했다. (낭시가 긍정적으로 답을 해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한동안 출판사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8월 말 낭시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계속 침묵하다가 12월 말쯤 출판사에 다시 메일을 보냈지만, 마찬가지로 답장을 받지 못했다. 결국 '전문'이 아니라 '발췌'의 형식으로 번역본을 공개한다. (+ 낭시를 기리며...)
-발췌본-
[장-뤽 낭시가 '페르시아 세밀화'(miniature persane)를 언급하면서 대화가 시작된다.]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영화가 페르시아 세밀화와 유사함을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장-뤽 낭시는 세밀화 이외에 이란의 이미지와 관련한 문화가 있는지 묻는데, 이와 관련하여 둘은 몇 가지 서구적 개념("미니아튀르"(miniature, 세밀화), "포트레"(portrait, 초상화)[1], "페이사주"(paysage, 풍경)[1] 등)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간다.]
(...)
JLN : 이미지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내에서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초상화인데, 손이 나와 있는 초상화고, 파이프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진인가요? 혹은 그림을 찍은 사진인가요?
AK : 사진이 아닙니다. 통속적인 스타일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10년 혹은 12년 전에 포스터로 만들어져 이란의 모든 마을에 널리 배포되기도 했죠.
JLN : 누구를 혹은 무엇을 표현하는 건가요?
AK : 행복한 농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죠. 그는 찻잔, 한 조각의 빵, 약간의 고기, 파이프,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쇼포크(Chopoq, *)[2]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의 농민을 그린 이상적인 그림이죠.
چپق*
JLN : 영화에서 이 그림은 균열이 가서 찢겨 있습니다.
AK : 제가 직접 찢었습니다. 상징적인 이유 때문에요.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농민은 빵, 차 한잔, 고기 등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의 생계에 위협이 닥친 것이죠. 지진으로 인해 그와 그의 소유물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 상태는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란에서 이 그림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포스터에 사용된 것이죠. 여기에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땅이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JLN : 문제의 그림의 화가나 특징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메시지는 이해가 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영화의 미장센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바로 감독이 바깥쪽을 쳐다보고, 폐허를 본 뒤에 돌아와 그림을 보는 지점에서 말입니다.〈1〉
또한 영화와 이미지 사이에 전체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특히 이란과 전통이 남아 있다는, 즉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와 같은 내용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화가의 이미지와 영화의 이미지라는 두 가지 종류의 이미지와 관련되어서 말입니다. 감독님께서 정말 찢어진 그림을 보신 건가요? 아니면 모든 것을 연출하신 건가요?
AK : 이 그림이 균열에 의해서 찢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벽에 붙은 포스터는 지진이 일어나면 떨어질 것입니다. 오로지 벽화만이 이처럼 균열이 갈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금이 간 벽을 찾아냈고, 그림을 균열 위에 붙였습니다. 그런 다음 정확하게 지그재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조명을 그림 뒤에서 비춰서 제가 찢었습니다.
JLN : 저는 벽에 붙은 그림이 균열에 의해서 찢어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항상 궁금했었는데요. 이제서야 이해가 됩니다.
AK : 그림은 마을에 있는 찻집에서 샀고, 이를 영화를 찍고 있던 장소에 가져갔습니다. 저는 이 그림이 제 영화의 의미와 매우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지진 이후에 이 농민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특히 그의 쇼포크(chopoq)도 손에서 떨어졌죠. 게다가 당신은 그가 파이프를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언어유희를 하자면, 이 그림은 단지 현실(realité)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vérité)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 이는 곧 농민의 운명이 나아졌기 때문에 그의 쇼포크(chopoq)가 파이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3] 어떤 사건이 죽음을 야기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이는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JLN : 이것이 이미지라는 사실에 감독님께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저희가 지진에서 살아남은 다른 인물들을 보는 것처럼 그림과 같은 구도의 실제 노인이 보여야 하지 않았었나 해서요. 그런데, 여기선, 바로 이미지가 있습니다.
AK : 저는 제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저도 작업합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실현한 것을 그저 선택하기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저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 이 포스터가 유명해졌을까? 왜 모든 집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만약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면, 선택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농민의 삶에 관한 사회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책에 따르면, 이런 그림은 의미가 있으며 다양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란 농민이 가진 꿈의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미지기 때문이죠.
JLN : 그래서 널리 퍼진 것이겠죠.
AK : 맞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이유를 알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 그림은 농민들의 꿈과 희망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거울이 되어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비춰 볼 수 있게 만듭니다. 농민의 삶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그의 고기, 그의 빵조각, 그의 차, 그의 담배. 이러한 장치가 거기에 있다면, 삶도 거기에 있고, 행복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진 동안에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노파가 잔해 속에서 남편을 찾지 않고, 오히려 주전자를 가지고 차를 만드는 장면도 이런 맥락에서 떠올려볼 수 있겠죠.
마을에서 작업하기 위해서는 농촌 환경의 사회학을 알아야 한다고 통상 말합니다. 이 그림은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발견했을 때 언젠가 도움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막 끝에 있는 모든 찻집에, 한쪽에는 초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몇 마리의 오리가 헤엄치는 작은 강 위에 놓인 다리가 있는 눈 덮인 산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는, 싱싱하고 푸르른 자연을 전혀 본 적이 없는, 즉 자연을 박탈당한 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사막에서 촬영한다면, 이런 그림은 필수적이죠.
(...)
[낭시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서 집 안에 있는 그림이 정확히 보이지 않음을 지적하자, 키아로스타미는 카메라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그림이 보일 수 없다고 답한다.]
(...)
JLN : 그렇게 암시된 이미지들이나 사진들과 이 영화 전체가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 더 나아가 결국엔 인류학자가 사진을 훔치는 이야기라는 사실 간의 관계 속에서 무엇이 작동되는지 궁금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어가는 여인을 찍으러 갔고, 결국 몇 장의 사진을 건졌죠. 그런데 처음에는 한 여성이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AK : 카메라는 어떤 이미지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여줄 의도가 없었거든요. 남자한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여자의 행동은 문화와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마을에서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집니다. 제가 최근에 촬영하러 가기도 했던 아프리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을 사람들, 즉 남자나 여자가 카메라를 알고 있다면, 그들은 촬영을 멈추게 합니다. 그들은 촬영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미지와 사진에 관한 당신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가끔 저는 이미지나 사진이 영화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의 미스터리는 봉인된 채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에는 사운드가 없고, 또한 알랑투르(alentour, 주변부)[4]가 전혀 없기 때문이죠. 사진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영화보다 더 오래 생명을 유지합니다.
2000년 9월 도르도뉴 지방에서 풍경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저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을 똑같이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두 장의 사진 사이에 15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있는데요. 이 두 장의 사진을 봤을 때, 저는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앵글로 찍은 두 장의 사진은 같은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사이에 몇 그루의 나무가 사라졌는데, 특히 더 최근에 찍힌 사진에서 나무는 부재합니다.
요즘에는 저는 영화감독보다는 사진작가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때때로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런 영화를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당신의 글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좀 더 분명해졌습니다. 만약 이미지들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해석하게 만들고, 제가 의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의미를 끌어낸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관객이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낫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을 말합니다. 그리고 관객은 각각 상상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을 갖고도 단 하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때, 이는 마치 정말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말한 것과 같습니다. 관객은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중요한 것은 주제(sujet)가 아니라 시선(regard)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다르는 스크린 위에 있는 것은 이미 죽었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바로 관객의 시선(regard)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의 글을 여러 번 읽은 뒤에 영화감독의 책임이 너무 큰 것 같아 어떤 영화도 연출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JLN : 그러기엔 이미 늦었죠.
AK :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JLN : 이미지, 오직 하나의 이미지에 도달하고 싶은 이 욕망을 저는 매우 잘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일반적으로 사진과 비교하여 영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완전히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 사운드 트랙은 필수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네마는 아주 오랫동안 무성이었습니다. 감독님도 나중에서야 영화 안에 종종 음악을 삽입하셨죠. 심지어 말을 하고 있을 때도요. 따라서 사운드와 관련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알랑투르(alentour, 주변부)의 부재, 즉 외화면의 부재에 대한 개념도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스크린 위에 있는 것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시네마는 단지 1초에 24개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에 관해서 말해봅시다. 감독님께서는 이야기를 최소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거의 제로 상태에 이르게 하죠. 스토리 라인에 실마리가 거의 없는 것, 이는 정말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감독님의 영화는 이미 감독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항상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가령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의 결말부에서 찍힌 사진의 경우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마지막 숏의 경우, 물론 여기선 사진이 아니라 공책이긴 하지만, 항상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마 모든 결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체리 향기>의 이미지도 튕겨 시네마로 되돌아옵니다. 이 이미지는 출처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아마 무덤 안에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눈'(œil)에서 기인했을 바로 그 이미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결말이 일종의 이미지, 즉 어떤 고정된 이미지의 배치에 이릅니다.
AK : 저는 이미지가 어떤 것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능력, 즉 이미지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여 각자 해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에 점점 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요소가 한 지점에서 들어와 다른 지점에서 나가는 그런 움직임이 있는 숏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즉 관객이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여행을 떠났을 때의 경우와 같습니다. 기차역의 중앙 홀을 지나가면서 수백 명의 사람을 마주칩니다. 그러나 제가 유일하게 기억할 사람은 바로 제 맞은편에 앉은 여행객일 것입니다. 특히 제가 시간을 들여 그 사람을 눈여겨볼 때 말이죠. 이전에도 아마 그 사람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테지요. 그 사람이 부동의 상태로 있을 때, 이는 저로 하여금 마치 이미지를 보듯이 고정적으로 응시하게끔 만듭니다. 그러다 보면 해석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의 세부사항,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다른 이들의 얼굴들이 마음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사실 제가 카메라처럼 자리 잡아 고정된 바로 이 순간에 그 사람은 주제로서 배열되고 이미지처럼 고정됩니다. 이는 픽사시옹(fixation, 고정)[5]의 시간을 가능케 하는 브레송의 카메라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는 마치 풍경을 향해 열려있는 부동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을 통해, 멜랑콜리한 시간 동안, 건너편에 서 있는 단 하나의 나무를 고정적으로 응시합니다. 이때 나무는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너는 이 나무를 세상의 모든 나무들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는 너한테 변함없는 어떤 것을 약속한다. 너는 나무와 약속을 맺는다. 너는 나무에 다다르고, 나무는 너를 받아들인다.〈2〉
이런 고정된 것들이 우리의 정동(情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JLN : 여기서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요. 서양인으로서, 아주 서구적인 서양인으로서 (감독님의 경우 동양인과 서양인 중에 스스로를 무엇으로 여기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저는 '재현으로서의 이미지'(image comme représentation)라는 문제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복사, 즉 현실 바깥의 모방으로서 이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독님의 말에서, 단호하게 동양적인 무언가가 있어 보입니다. 이미지를 존재나 힘으로 여기는 것에서 말이죠. 이는 일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타오(Shih-Tao)〈3〉의 『화어록(畵語錄)』〈4〉에서 예시되는 중국 회화와 연결됩니다. 시네마에 동양과 서양의 차원과 역사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감독님의 영화에서 강력하게 느낍니다. 브레송이 이에 가깝고, 또 시네마에서 이런 것이 항상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네마는 스스로 이야기하고자 했고(가령 탐정 소설, 위대한 러브 스토리, 역사 영화와 같은 모든 신화적인 소재를 가지고 말이죠.), 또한 움직임을 재현하는 역량을 가진 예술이 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야기하는 것, 혹은 소리 등을 포함하는 살아 있는 것 총체의 재현과 움직임을 신봉하는 것에는 훨씬 덜 중점을 두는 또 다른 세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시네마는 실제적 현실에 맞서고, 움직임과 덜 연관되어 있으며, 외화면, 역사와 상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지 바깥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죠.
AK : 현재까지 저는 시네마에 관한 하나의 정의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은 시네마가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소설이 더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전 연속극도 그런 것을 잘 할 수 있죠. 개인적으로 더 까다롭다고 느끼는, 그리고 통상적으로 일곱 번째 예술로 정의되는 또 다른 시네마가 있습니다. 이런 시네마 안에는 음악, 이야기, 환상, 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시네마가 '마이너 예술'(art mineur)로 남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테면 시를 읽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시를 완성(achèvement)시키게끔 만드는 원인이 궁금합니다. 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체에 이르게끔 창작되었습니다. 제 상상력이 시 안에서 섞이게 된다면, 그 시는 제 것이 됩니다. 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 일련의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만약 기억 속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현한다면, 만약 그 안의 코드를 파악한다면, 저는 미스터리에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10년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시에 이제서야 애착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제 아버지께서 읽어주던 마울라나 루미(Maulana Rumi)[6]의 시가 생각납니다. 루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일단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10년 전에 시를 다시 읽었고, 오늘날에도 다시 읽었습니다. 그 안에서 제가 놓쳤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이해되진 않습니다. 한편, 영화에서 관계와 연결고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종종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해못함'(incompréhension)은 시의 본질 중 일부이죠. 우리는 시를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네마는 다릅니다. 우리는 시에 감정을 통해 다가가지만, 시네마에는 생각과 지성에 입각해서 접근합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시에 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친구와 전화 통화하면서 좋은 영화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네마가 '메이저 예술'(art majeur)로 간주되려면 '이해되지 않을 가능성'(possibilité de ne pas être compris)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영화는 우리 삶의 다른 시기에 다른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네마는 점점 더 보고, 이해하고, 평가하는 사물이나 오락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 시네마를 정말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모호함'(ambiguïté)과 '미스터리'(mystère)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진, 즉 이미지는 거의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거나,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미지는 재현하지 않고, 재현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미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관객을 초대하여 그것을 발견하게끔 만듭니다.
JLN : 시네마 자체의 내부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시네마를 판단하는 것이 놀랍네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움직임으로 전체를 파악하는, 그리고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야기를 하는 역량은 초기부터 시네마 안에 있어 왔습니다. 이것이 종합예술작품〈5〉에 관한 생각이 우세하던 역사적 시기에 대응된다는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종합예술작품은 바그너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시네마를 바그너풍의 시네마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분명히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놀라운 도구이기도 합니다. 원한다면 지시적(déictique, 指示的)으로요. 그리고 거의 초기부터,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지가 베르토프나 에이젠슈테인, 그리고 위대한 영화감독(가령 혹스나 드레이어뿐만 아니라 로셀리니, 브레송 등)은 (서부극과 전쟁 영화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들은 시네마 안에 항상 있던 것을 다시 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사진만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사진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시네마가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사진이 나오기 위해서, 사진이 단지 거기에 그렇게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AK : 저는 내러티브가 있는 시네마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제 영화관에서 떠나겠습니다. 시네마가 더 많이 이야기하고, 그것을 더 잘할수록, 이에 대한 제 저항은 더욱더 커질 것입니다. 새로운 시네마를 구상하는 유일한 방법은 관객의 역할을 더 많이 존중하는 것입니다. 관객이 개입하여 공백(空白)과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미완성되고 불완전한 시네마'(cinéma inachevé et incomplet)를 구상해야 합니다. 완전무결하고 구체적인 구조의 영화를 찍는 대신에 이를 약화시켜야 합니다. 이때 관객을 쫓아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마도 해결책은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존재감을 갖도록 장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두가 합의에 이르러 수렴하기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산하고 차이를 만들고자 애쓰는 예술을 더 많이 신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과 반응의 다양성이 있게 됩니다. 제 영화를 지지하든, 옹호하든, 반대하든지 간에 각자가 자신만의 영화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할 수 있게끔 몇 가지를 덧붙이는데, 이런 행위야말로 '영화의 명증'(évidence du film)의 일부가 됩니다. 강대국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어떤 결함과 부족함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JLN : 공백과 관련해서, 저는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완전히 회색빛의 숏이 떠오릅니다. 저는 19살이었고, 이미 어느 정도는 이에 익숙했습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펼쳐진 것인지 잘 몰랐지만, 여하간 이것이 이미지라는 것은 이해했습니다. 그 순간 극장에서 제 옆에 앉아 함께 영화를 보던 노파가 소리쳤습니다. "정지 상태다!"(Ah! il y a une panne.) 여기에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한 명은 그 영화에서 이것이 공백임을 이해했지만, 다른 한 명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AK : 바로 이런 공백들, 이 "정지"의 순간들이 만들어지는 것. 이것은 제 꿈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습관을 바꾸는 데 힘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JLN : 그러나 변화의 조짐은 있습니다. 당장에 감독님의 영화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죠. 물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보러 가는 관객과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재난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감독님의 영화는 많은 이들이 관람하고 있고, 이러한 성공은 무언가를 증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관객들은 네오리얼리즘이 끝났을 때, 시네마는 끝났다고 20년 동안 말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다르도 시네마의 죽음에 관해 많이 말했죠. 심지어 너무 많이 말했죠. 그 후로 다른 시네마, 가령 중국, 대만, 한국의 시네마가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대화의 주제가 바뀐다. 풍경의 무한함을 바라보는 인물의 뒷모습이 담긴 19세기 사진에 시선이 집중된다.]
AK : 이 이미지가 흥미로운 것은 뒤에서 바라본 피사체를 추측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선도 마찬가지죠.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의 옷과 헤어스타일, 머리에 꽂은 핀과 같은 다른 요소에 입각해서 누구인지, 사회적 배경이 어떤지 추측하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무언가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고, 동시에 특정한 얼굴로 생각이 고정되게끔 강제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JLN : 이 이미지는 다른 어떤 사진이나 그림에서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는 얼굴의 뒷면을 보여줍니다. 미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s World》는 들판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뒷모습뿐입니다. 뒤에서 바라본 시선은 매번 우리의 시선으로 하여금 그 시선에 들어가게끔 만듭니다. 제 시선이 곧 그녀의 시선이 되는 것이지요.
AK : 세 명의 인물이 프레임 바깥을 바라보는 그림 하나가 떠오르네요. 제가 보기에 이 그림은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을 바라보면, 이 인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지점을 바라보게끔 이끕니다. 그림은 세 명의 여인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 다른 감정과 느낌을 환기시키죠. 두 명은 소녀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소녀들의 어머니인 것으로 보이는 나이 든 여자입니다. 저는 이들이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봅니다. 여기서 남자에 대한 세 가지의 다른 시선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소녀들은 남자를 매혹적으로, 매력적으로 바라봅니다. 나이 든 여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소녀들의 시선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을 바라볼 때, 이 인물들이 우리에게 다른 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이 그림의 가치가 있습니다.
영화감독이나 사진작가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함과 동시에 배반하죠. 그들은 거의 신의 위치에 있습니다. 즉 특정한 몇 가지만 고른 뒤에 보여주고, 숨긴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죠. 시네마는 보여주는 것만큼 시선을 제한합니다. 왜냐하면 시네마는 이기적으로 세상을 '입방체'(cube, 立方體)의 한 면으로만 제한하고 나머지 다섯 개의 면은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한 면에 접근하면 다른 면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카메라가 움직이면 더욱 볼 것이 없습니다. 제가 언급한 그림처럼 다른 곳을 가리키는 영화들이 더 창의적이거나, 혹은 더 정직한 것이죠.
JLN : 거의 반대의 해석을 해보자면, 또 다른 입방체로부터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감독님께서 시각의 입방체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그러나 현실에서도 우리는 입방체의 두세 개 면을 볼 수 없습니다. 항상 숨겨진 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도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서의 입방체에 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세 개에서 다섯 개의 면은 완전히 어둡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빛나는 면, 바로 스크린이 있습니다. 이 표면 위에서 영화감독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스크린은 동시에 다른 입방체의 면인데, 이는 또한 전체를 보여줍니다. 제가 있는 영화관의 현실은 어떤 의미로는 유예된 것입니다. 그런 뒤 제가 또 다른 현실에 들어가는 것이죠. 감독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현실 혹은 진실로 말입니다.
AK : 저희 영화감독들이 관객을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한 개의 면보다 더 많이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 즉 외부에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쳐다보기를 결심할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저희 영화감독들은 관객과 그의 시선을 강력하게 고정시킵니다.
(...)
[낭시는 영화감독이 아니고서야 현실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에 키아로스타미는 평범한 관객도 영화감독만큼의 재능이 있다고 답한다. 가령 음식점이나 집에서 말이다. 특히 키아로스타미에 따르면, 집에서 관객은 이중 커튼 너머의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짐작 및 추측해볼 수 있다. 평범한 상황에서도 멀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재현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JLN :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영화감독, 화가, 사진작가, 소설가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특히 제 시선은 영화감독들에 의해, 제가 본 영화와 사진에 의해 양성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렇게 하면 [이때 그는 머리를 돌린다.] 일종의 프레임이 생기는데, 이는 일종의 사진을 찍는 태도와 같죠.
AK : 저는 모두가 호기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인간적인 호기심은 창의적인 예술가만의 특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호기심을 표명하는 사람은 누구나 좋은 관객입니다.
JLN : 사람과 사물에 관한 주의력이 필요하겠군요.
AK : 발자크의 한 일화가 떠오르네요. 살롱에서 발자크가 눈 덮인 풍경 속에서 연기가 나는 굴뚝이 있는 농장을 표현한 그림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화가에게 농장에 있는 집에 사람이 몇 명이 살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화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발자크가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당신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아이들이 몇 살인지, 올해가 풍년인지 그리고 딸의 결혼에 지참금으로 낼 돈이 충분하게 있는지를 물어봐야죠. 만약 당신이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그릴 권리가 없다고 봅니다."
매우 인간적인 이런 시선은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지 않은 좋은 관객의 시선입니다. 이 관객은 다름 아닌 발자크입니다. 그러나 그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관객으로서 거기에 있었죠. 누군가가 창조한 모든 것에는 보여주지 않는 현실의 일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지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화가는 그가 보여주지 않은 것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가 쥐고 있는 작은 프레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제 영화를 당신처럼 보는 관객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부터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JLN : 감독님의 영화에서 자동차가 '시선의 상자'(boîte à regard)로서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자동차의 창문이 스크린을 이중으로 만들죠. 또한 운전 중이기 때문에 매우 자주 운전자의 시선은 똑바르게 도로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운전 중에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긴 합니다.) 그리고 감독님의 카메라는 이 남자가 우리는 전혀 볼 수 없는 방향을 향해 쳐다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감독님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사람들이 서로를 자주 바라보는지, 혹은 대부분의 경우 운전자들처럼 전방을 주시하는지 알고 싶네요. 심지어 탑승자가 운전자를 바라볼 때도 시선 교환은 거의 없습니다. 숏과 리버스 숏이 거의 없죠.
AK : 그것이 바로 제가 관객의 흥미를 끄는 방식입니다. 두 명의 인물이 함께 연기하고 있는데, 이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 사이에 시선이 교환된 다음에, 관객이 바라보고 이 교환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낼 차례가 됩니다. 관객은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됩니다. 이제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관객의 시선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컷이 개입되면, 상대방의 반응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숏의 전환은 임의적인 것도 아니고, 단순한 교체도 아닙니다. 촬영 중에 갑자기 발생했지만, 편집 중에 고쳐질 수 있는 문제는 컷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 예상될 때의 순간이 선택됩니다. 이런 세 번째 시선이 없이는, 다른 두 개의 시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창조물이 없는 창조자는 없다.'〈6〉
이제 당신께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아랍어로 코란의 "지진 장(sourate, 章)"에 있는 한 구절을 암송한다:
대지가 심하게 진동하고,
대지가 그 짐을 퉁겨내고
어찌된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말할 적에,
그날 대지는 모든 소식을 이야기하리라,
당신의 주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그날 사람들은 삼삼오오 나타나서 자기의 행한 일을 나타내 보인다.
티끌 하나만큼이라도 선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본다.
티끌 하나만큼이라도 악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본다.[7]〈7〉]
이 장을 인용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또 어디서 이 장을 발견하셨는지요? 저한테는 이 구절이 코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네요. 이십여 년 전 저는 이 장을 영화로 찍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글에서 이 장을 읽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8〉
JLN : 코란을 전부 외우신 건가요?
AK : 아뇨. 이것만 외웠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신비롭고, 매우 현대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코란의 모든 지식의 부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끝, 종말의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
[낭시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봤을 때 "지진"이라는 제목이 달린 코란의 장을 떠올렸다고 말하자, 키아로스타미는 그 장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는다. 그러자 낭시는 '서양의 모든 기원 속에서 철학과 일신교의 인접성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며, 그런 맥락에서 코란을 참조했다고 덧붙인다. 키아로스타미는 "지진" 장이 코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이라며 강력한 시각적 언어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장을 영화를 찍을 때 의도적으로 떠올리진 않았다고 덧붙인다.]
(...)
AK : 종교적이든 무신론적이든, 혹은 세밀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고 있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화는 2000년 9월 25일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장-뤽 낭시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이 대화를 준비했던 통역자는 모즈데 파밀리(Mojdeh Famili)다. 프랑스어 전사(轉寫) 작업은 모즈데 파밀리와 테레사 포콘(Térésa Faucon)이 공동으로 했다.]
※원저자 주[1] 키아로스타미는 이 단어를 프랑스어로 말한다.
[2] 쇼포크(Chopoq)는 긴 튜브를 가진 전통적인 파이프다. 시골에서 주로 농민들이 사용한다.
[3] 쇼포크(Chopoq)는 농민의 삶을 상징할 수 있는 반면 파이프는 더 큰 물질적 여유로움의 증거이다.
[4] 여기서 "알랑투르"(alentour)라는 개념은 서구적 개념인 외화면(hors-champ, off-screen)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장-뤽 낭시의 언급을 참조하라.
[5] [1]과 동일.
[6] 마울라나 잘랄루딘 루미(Maulana Jalauddin Rumi, 1207-1273)는 13세기 이란-이슬람 문명에서 페르시아어로 신비주의 시를 쓴 위대한 시인이다.
[7] 원문에서 인용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Le Koran, Sourate XCIX. Tard. de Savary. Paris, Classiques Garnier, 1960.
※옮긴이 주
〈1〉 낭시가 언급한 부분에 해당하는 유튜브 영상이 있어서 첨부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1분짜리 발췌 영상이다. ☞ 링크 〈2〉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되어있는 이 부분은 '당신'을 뜻하는 'vous'가 아니라 '너'를 뜻하는 'tu'를 쓰고 있다.
〈3〉 통상적으로 시타오(Shih-Tao, 석도, 石濤, 1642-1707)의 '일획'은 마음, 몸, 붓이 하나가 되어 성립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획'의 구체적 의미를 둘러싸고 여러 학설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조송식의 검토는 참조할 만하다. 조송식은 석도의 일획론에 대한 여러 해석을 검토하며 "일획이 『화어록』 전체와 관련되고, 『화어록』 전체가 일획에 귀속되어야, 일획의 의미가 밝혀질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조송식. “청초 석도 『화어록』의 ’일획’에 대한 의미, 그 연구사적 고찰 및 특징.” 미학, vol. 73, 2013, p. 76).
〈4〉 원문에 L'Unique Trait de pinceau라고 되어 있고, 영역본에는 Hua Yu Lu라고 되어 있다. 직역하면 전자는 '붓질의 일획', 후자는 '화어록'을 뜻한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른다.
〈5〉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은 바그너가 생각하는 예술의 이상으로서, 음악과 극 외에도 무대장치나 의상 등의 모든 요소들이 동등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출처 ☞ 링크) 〈6〉 원문에 pas de créateur sans créateur라고 되어 있고, 영역본에는 no creator without creatures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다소 모호한 전자 대신 후자를 따른다.
〈7〉 본문에서 인용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김용선, 『코란 (꾸란)』, 명문사, 2002, pp. 638-639
〈8〉 『영화의 명증』에 수록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 관한 글 말미에 낭시는 '추가 언급'(Encore un mot)을 덧붙인다(p. 77). 거기서 낭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그의 민족문화에 대한 신중한 오마주를 바치고 있고, 또 무신론자의 위치에 서서 각각 '명증'(明證)과 '지진'(地震)이라는 제목의 코란 98장과 99장을 생각했을까요?"라고 말하며, 이에 코란 99장 도입부를 간략하게 덧붙인다. 바로 그 지점을 키아로스타미가 염두에 둔 것 같다.
-옮긴이가 덧붙인 세 가지 노트-
(2021년 여름에 쓰고, 2022년 겨울에 편집함)
1.
영화감독과 철학자: 후자가 전자를 분석하고 비평할 수 있으며, 전자가 후자를 인용할 수도 있다. 혹은 아예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있을 테다. 이처럼 영화감독과 철학자 간의 접촉 혹은 융합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사례. 무엇보다 들뢰즈. (여기서 들뢰즈의 시네마 관련 논문과 저서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테다.) 그다음, 고다르. 가령, 〈필름 소셜리즘〉에서 고다르는 바디우를 출연시킴과 동시에 벤야민, 데리다, 아렌트, 베르그송 등을 인용하고, 또 〈이미지 북〉에 관한 카이에 뒤 시네마 인터뷰에서 하이데거를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 볼 때, 키아로스타미와 낭시 두 사람의 만남 자체는 어색하지 않다.
2.
'기획투사'(Entwurf)를 떠올리며 망상하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장-뤽 낭시의 대화"(이하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꼼꼼하게 읽고 있노라면, 키아로스타미가 일종의 기획투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당시에 키아로스타미가 본래적 관점에 입각하여 끝(죽음)을 상정하고, '그 끝(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며'(Vorlaufen zum Tode) 미래의 자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이런저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다. 잠깐!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이 "대화"가 200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2000년, 즉 20세기의 마지막, 혹은 21세기의 시작. 여하간 키아로스타미는 1999년에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를, 2001년에 〈ABC 아프리카〉를 내놓았지만, 그 사이에, 즉 2000년에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다시, 2000년. 키아로스타미는 우간다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요청받아 디지털 캠코더를 들고 우간다로 갔다. 거기서 우간다의 비극적 현실과 아이들의 생동감을 동시에 마주했다. 그 뒤에 키아로스타미는 파리로 가서 낭시를 만났고, 바로 이 "대화"가 이뤄졌다. 기본적으로 "대화"는 1980년대 후반 이후의 키아로스타미 작품 정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이 작품은 "대화"의 거의 근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외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체리 향기〉,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역시 언급된다. (한편, 〈클로즈업〉,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카눈에서 제작한 1970, 80년대 여러 작품은 언급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화"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키아로스타미의 21세기 영화 이전에 이뤄졌다. 이제, 2022년. 현재 "대화"를 읽는 우리는 이미 키아로스타미의 21세기 영화를 거의 대부분 봤다. 가령 〈ABC 아프리카〉, 〈텐〉, 〈파이브〉, 〈티켓〉, 〈쉬린〉, 〈공인된 복제품 Copie conforme〉, 〈사랑에 빠진 것처럼〉 〈24 프레임〉, 그리고 이 영화들 사이사이에 있는 단편과 중편, (개인적으로 아직 감상할 방법을 찾지 못한) 빅토르 에리세와의 서신교환. 더 나아가 우리는 키아로스타미에 관한 다큐멘터리, 키아로스타미가 본인 영화에 관해 코멘터리 하는 에세이(혹은 페다고지컬) 필름, 키아로스타미의 강연(록)까지 살펴봤다. '21세기의 키아로스타미'를 여러 방면에서 접한 우리가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읽다 보면 즉각적으로 그의 21세기 영화들이 떠오른다. (여기서 이 "대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대두된다.) 예를 들어, '눈 덮인 산의 그림'은 〈24 프레임〉, '기차역과 여행'은 〈티켓〉, '부동의 창문'은 〈공인된 복제품〉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마지막 숏 상기), (이에 '고정된 나무 응시'까지 더한다면) 〈24 프레임〉, '회색빛 커튼'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의 타카시 옆집에 사는 여자의 시점 숏 상기) '자동차와 시선의 상자'는 〈텐〉, 이외에 이미지 전반에 관한 키아로스타미의 철학은 〈파이브〉, 〈쉬린〉, 〈24 프레임〉 등을 상기시킨다. 만약 2000년의 키아로스타미가 낭시와 만날 때 자신이 한 말을 21세기에 들어서 직접 회수 및 수행해야겠다고 미리 결심하고(즉, '선이해'(先理解)하고), 일종의 기획투사를 하고 있다고 해석, 혹은 망상을 해본다면, "대화"는 무척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3. '프레임'(frame)에 관한 단상: 〈24 프레임〉의 첫 번째 프레임. 뜬금없이 그림이 펼쳐진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그림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눈 속의 사냥꾼들 The Hunters in the Snow》이다. 갑자기 드는 의문. 이 영화의 제목은 왜 '프레임'인가? 만약 그림, 혹은 사진 스물네 개가 차례로 펼쳐진다면, '24 숏'(혹은 '24 픽처', '24 씬' 등)이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때, 멈춰 있는 것 같았던 '그림'이 갑자기 '살아서 움직인다.' 여기서 '그림'은 16세기 그림으로, 당연히 키아로스타미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사실, 살마 몬쉬자데(Salma Monshizadeh)의 〈프린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기억하며 Print: In Memory of Abbas Kiarostami〉를 보면, 키아로스타미는 〈24 프레임〉을 위해 브뤼헐의 그림 이외에도 몇몇 명화를 가지고 디지털 작업을 했다. 가령,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The Gleaners》과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s World》 등을 말이다. (우연이겠으나, 후자는 낭시가 "대화"에서 언급했던 작품이다.) 여러 결과물 중 최종적으로 브뤼헐의 그림만 채택된 것이다. 한편, '살아서 움직인다'는 동사는 키아로스타미의 상상의 실현을 뜻한다. 즉, 브뤼헐의 정지된 그림 속에서,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새가 날아다니며, 눈이 내리다가, 개와 소 떼가 움직인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 프레임은 일종의 페다고지컬 프레임이다. 즉, 앞으로 펼쳐질 프레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 프레임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상상, 키아로스타미의 물질화된 감각, 키아로스타미의 규칙. 이것을 우리는 잘 지켜보고, 기억해야 한다.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이미지의 역량, 즉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으로 깊게 들어가 각자 해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에 관해 말했다. 또한 관객도 영화감독 못지않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관객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24 프레임〉에서 키아로스타미는 단순히 이미지 큐레이터가 아니라 외려 교사에 가깝다. 스물네 개의 프레임을 통한 교육. 시선의 (재)교육. 상상의 (재)교육. 키아로스타미-교사는 관객-학생을 가르친다. 아니, '같이 바라보고, 들으며,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제안의 가르침. 이는 강압의 가르침과 분명 다르다. 다시, 첫 번째 프레임. 이는 '한 가지 문제'(one problem)다.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만든 문제는 아니다. 외려 기출문제에 가깝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문제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상상을 디지털 작업을 거쳐 보여줌으로써 관객-학생에게 일종의 모범 답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디지털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키아로스타미는 숨기지 않는다. 사실, 키아로스타미는 여러 강의에서 시네마는 속임수에 불과하며, 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물론 이 풀이법이 절대적 참은 아니다. 단지 '두 가지 이상의 답'(two or more solutions) 중 하나의 답일 뿐이다.
첫 번째 프레임의 그림이 기출문제였다면, 두 번째 프레임은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만든 예제(例題)다. 두 번째 프레임이 시작되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면의 밝기다. 마치 카메라가 (키아로스타미가 늘 쓰고 다니던) 선글라스를 쓴 듯 화면이 어둡다. 이때 카메라는 자동차 안에 있으며, 선팅된 창문 너머의 바깥을 응시하고 있다. 한 마리의 말이 보인다. 동시에 자동차는 수평으로 움직인다. 어느 순간 자동차가 멈춰서고, 창문이 내려간다. 이제 화면이 밝아진다. 카메라는 수직선상에 있는 말을 응시한다. 한 마리의 말이 프레임 안으로 또 들어와 총 두 마리의 말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것이 애정 행각인지 싸움인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키아로스타미가 사진 찍기 전과 찍은 후의 순간을 (동시에) 포착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덧붙여 생각해야 한다. 다른 프레임에서와 달리 두 번째 프레임에서는 자동차 안에 고정된 카메라가 수평으로 움직이기에, 카메라의 존재감이 부각되어 의식된다. 이때 카메라의 시선은 감독의 시선이자 곧 관객의 시선이다. 시선의 방향이 수직축 위에 있다고 한다면, 시간의 전과 후, 즉 타임라인은 (카메라의 이동 방향이기도 한) 수평축 위에 있다. 수직축과 수평축의 교차 지점은 바로 자동차다. 요컨대, 두 번째 프레임의 ('카메라를 든') 자동차는 시각의 수직축과 시간의 수평축이 공존하는 장소, 즉 '시각의 상자'이자 '시간의 상자'가 된다. 두 번째 프레임은 첫 번째 프레임처럼 기존에 있던 그림을 재료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의 상상, 키아로스타미의 조작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기에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관객-학생은 두 번째 프레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문제 구성 원리의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그런 뒤 이 예제에서 얻은 실마리를 바탕으로 변형문제를 풀어야 한다. 세 번째 프레임부터 그 이후 프레임이 변형문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직접 풀어야 하는 문제. 이런 문제 풀이 과정은 일종의 시청각 및 상상력 훈련이긴 하지만, 단순히 비슷한 문제의 나열을 통한 반복 학습 훈련은 아니다. 스물네 개의 문제는 '무질서하게'(disorderly) 배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의도된, 혹은 '정돈된'(orderly) 문제의 순서까지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국 〈24 프레임〉은 키아로스타미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homework)다. 이 숙제는 정해진 답을 찾는 데 목표가 있지 않다. 정해진 답? 혹은 고정된 답? 비슷한 의미의 어떤 표현이어도 좋다. 사실 이런 유의 답은 기본적으로 '수동성'을 전제한다. '숏'(shot)도 마찬가지다. '찍힌 것'으로서의 '숏'.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숏'이라고 부를 때, 이는 '이미 찍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찍힌 것'을 보고 '숏'이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찍(고 있)는 것'과 '찍힐 것'은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미'라는 부사와 '찍힌'의 ('-히-'에서 기인한) 수동성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 자율성이 박탈된 고정태(固定態)라는 측면에서 일말의 폐쇄성과 완전함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키아로스타미가 〈24 프레임〉에서 자신이 낸 문제를 왜 '숏'이 아니라 (말 그대로 틀, 뼈대를 뜻하는) '프레임'(frame)으로 명명했는지 감지할 수 있다. 잠깐! 이때 '프레임'을 감히 '장'(場)으로 이해해도 될까? 즉, 키아로스타미에게 프레임은 (영화와 관객의 접촉면으로서) 일종의 '교육의 장'이자 '상상의 장'이다, 와 같은 언사를 덧붙일 수 있을까? '장'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장소, 영토, 무대와 같은 뜻이 강조되어 있다. (참고로 '場'은 '土'(흙 토)자와 '昜'(볕 양)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즉, 넓은 마당에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주의! 햇볕의 내리쬠의 영역은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장'은 단순히 특정 장소, 영토, 무대만을 뜻하지 않는다. 외려 불완전한 틀(혹은 경계선으)로서의 어떤 장소, 영토, 무대에 가깝다. '불완전한 틀(혹은 경계선)'이란 특정 크기에 고착화되거나 국한되지 않는 유동적인 어떤 상태를 함축한다. 단적으로 틀(혹은 경계선)의 크기는 스크린의 크기와 무관하다. 더욱이 프레이밍하는 카메라가 실제 있었을 그 공간의 크기와도 무관하다. 이는 외려 관객의 머릿속의 유연성 및 확장성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컨대, '장'으로서의 '프레임'은 불완전한 틀(혹은 경계선)을 지칭하며, 무언가가 '오고 가는' 유동적 상태를 전제한다. 아니, 전제해야 한다(고 키아로스타미는 생각한다.). 기존의 '숏'은 그런 상태를 전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와 관객 간의) "대화적 몽타주"(유운성)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키아로스타미가 총 스물네 개의 이미 그려진 것과 이미 찍힌 것을 디지털 조작으로 살려낸 뒤 '프레임'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 '프레임' 안에 '오고 가는' 무언가가 우리의 눈과 귀로 감지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가 언급한 "미완성되고 불완전한 시네마"(cinéma inachevé et incomplet) 개념을 상기하고 싶다. 이미 매니블은 키아로스타미의 이 "불완전 영화"(films incomplets) 개념을 두고, 상영이 끝난 뒤에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계속 발전되는 그런 영화다, 라고 적확하게 말한 바 있다. 매니블의 이 말을 내 식으로 조금 바꾸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프레임(혹은 몽타주)은 계속된다." 결국 키아로스타미의 '프레임'은 '오고 가며'의 상태를 전제한 '불완전 영화'를 염두에 둔 개념이다. 그래서 키아로스타미의 마지막 영화의 제목은 '24 숏'(혹은 '24 픽처', '24 씬' 등)이 아니라 '24 프레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