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I & II (자나 깨나)〉(2018) 下

1(d). 바쿠와 료헤이의 이어짐, 그리고 히가시데 마사히로
 
(-> 에서 이어짐.) 오사카-도쿄 집 앞에 나타난 바쿠에 대한 질문 중 바쿠가 왜 왔는지혹은 바쿠가 아사코의 환각 혹은 유령인지에 대한 질문은 <자나 깨나>를 사유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되며, 따라서 질문의 방향을 다소 바꿀 필요가 있다. ‘바쿠를 본 아사코가 문을 닫고 숨는다. 그 직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데(대부분은 여기서 바쿠가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바쿠 대신에 료헤이가 들어온다.’ 이 지점에 대한 새로운 물음이 필요하다.
 바쿠가 실제로 왔었는데, 아사코가 문을 닫은 직후 료헤이가 들어오는 이 지점은 이상하지 않은가? 관객의 착각을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반칙인가? 이것이 트릭이 아니라면, 막연히 아사코가 부엌에 숨어있는 동안, 바쿠가 빠르게 떠났고, 그 사이에 료헤이가 왔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아마 이런 반칙적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뒤에 바쿠의 대사(“오카자키 집에 보낸 연하장에 적힌 주소를 통해 찾아갔었다.”)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혹은 다른 차원의) 가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료헤이가 전력 질주를 해서 집으로 들어가고 아사코는 뒤따라간다. 그리고 료헤이는 아사코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사코는 집 안으로 들어가 료헤이를 만난다.’ 오사카-도쿄 집 씬은 이와 정확히 반대다. 일단 바쿠=료헤이라는 등식을 잠정적으로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아사코는 바쿠(=료헤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료헤이(=바쿠)는 집 안으로 들어가 아사코를 만난다.’가 성립 가능하다. 이는 곧 ‘XY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닫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Y는 집 안으로 들어가 X를 만난다.’로 일반화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사카-도쿄 집 씬에서의 XY를 각각 아사코, 바쿠(=료헤이)라고 한다면, ‘(영화의 마지막) 오사카 집 씬에선 XY의 자리가 리버스(reverse)되어 반복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두 씬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를 확장시켜 ‘1(b)’에서 살펴본 시선의 마주침과 어긋남을 통해 표현된 아사코-바쿠, 아사코-료헤이의 관계의 변화와 연결 지을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 (a) 시기에, ‘아사코가 바쿠를 먼저 본다. 그래서 아사코는 바쿠에 빠지게 되고, 바쿠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바쿠는 아사코를 떠난다.’
{} : (b) 시기에, ‘아사코가 료헤이를 먼저 본다. 그래서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관심을 갖지만, (그의 외모 등이 바쿠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료헤이를 회피한다. 그러나 지진이 난 날 료헤이와 재회하고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다.’
{} : (c) 시기에, 오사카-도쿄 집 씬에서, ‘아사코는 바쿠(=료헤이)를 보고 피하려 문을 닫는다. 그런데 문은 잠그지 않아서 료헤이(=바쿠)가 아사코를 보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온다.’
{} : (c) 시기에, (영화의 마지막) 오사카 집 씬에서, ‘료헤이는 아사코를 피하려 문을 닫는다. 그런데 문은 잠그지 않아서 아사코가 료헤이를 보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먼저, {}에서 {}로 이행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사카-도쿄 집에서 오사카 집으로 이동은 곧 도식적으로 보면 {(오사카1->도쿄)->오사카2}이고, 이는 결국 오사카’(의 새롭게 살 집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오사카1->도쿄)’오사카2’ 사이의 과정은 곧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난 아사코가 센다이 초입에서 불현듯 깨달아 바다를 보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 자체가 료헤이에겐 상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에서 바쿠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못하고) ‘료헤이가 집에 (무리 없이) 들어왔지만, {}에선 이 관계가 전복되는데 한편으로는 아사코는 한 번에 집에 못 들어오고, (료헤이가 진탄을 내어주면서 문을 잠그지 않은 때에, ) 두 번 만에 집에 들어오게 된다. 또한 {}({}의 변주로서) {}이 각각 하나의 과정이라면, 각각은 반대의 버전으로 변주되어 {}{}에서 반복된다. ({}은 바쿠가 아사코를 떠났고(거절했고), {}은 아사코가 바쿠를 거절한다. {}은 아사코가 료헤이를 피했지만, {}은 료헤이가 아사코를 피한다. {}에서 {}으로의 변화는 지진 이후 료헤이와 교제를 시작했기 때문이고, {}에서 {}로의 변화는 아사코의 외도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전의 상대방의 상황을 경험해보게 만드는 듯한 하마구치만의 형식이라 할만한 것이다. 역지사지의 상황 재현(再現)’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형식에 대해선 ‘2(b)’에서 다시 언급할 예정이다.
 앞서 말한 것들이 가능해지려면, {}에서 표현된 바쿠=료헤이라는 등식이 참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는가? 분명히 바쿠와 료헤이는 독립된 다른 인물이다. 그래서 동일인으로 보고 싶은 충동이 있지만, 이는 분명 무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약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보는 과정에서 그 두 인물을 동시에 연기한 히가시데 마사히로라는 배우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 사람이 두 가지 역을 맡아서 연기했다는 사실 자체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례는 영화사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수의 허구적 세계(에피소드)를 마련해 두고, 동일한 배우가 연기한 유사한 등장인물이 그 세계들을 가로지르게 하는 경우는,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2004),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2010),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2012), 차이밍량의 <떠돌이 개>(2013) 등을 떠올릴 수 있고, 더욱이 복수의 허구적 세계로 구성된 플롯을 직접 차용하지 않더라도 등장인물의 말과 행위의 불확정성이 유지되는 한 허구적 세계의 복수화가 일어난다는 점을 예시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을 떠올릴 수도 있다.”[12] 이 지점에서 <자나 깨나><현기증>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먼저, 한눈에 누군가에 빠진다는 설정부터 유사하다. 그리고 킴 노박이 마들렌과 주디를 연기했으며, 스카티가 마들렌을 따라다니는 모티브는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바쿠와 료헤이를 연기했으며, 아사코가 바쿠를 따라다니고, 료헤이가 아사코를 찾아다니는 점과 비교해봄 직하다. 더욱이 <자나 깨나> 역시 복수의 허구적 세계로 구성된 플롯을 차용하지 않았고, 다만 하나의 완결된 플롯에서 시기적으로 점핑만 할 뿐이다. 한편, 하마구치 류스케가 <해피 아워>에서 비전문 배우와 작업했던 것과 달리 <자나 깨나>에서 전문 배우, 그것도 스타들과 작업했다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하마구치의 말마따나 영화의 판매 증진을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2011311일에 발생한 소위 동일본 대지진이라고 불리는 도호쿠 대지진이다. 이 지진사태로 인해 쓰나미가 일본 동부를 덮쳤고,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0(b)’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지진은 하마구치가 원작을 각색하면서 묘사하기로 결심한 역사적 사실이다. <자나 깨나> 내에서 지진은 완전히 블랙 화면에서 사람들이 놀라거나 물건이 깨지는 소리로() 묘사된다. 블랙 화면 앞에서의 묵념. 이 지진이 난 날,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은 뒤 보지 못했던 아사코를 료헤이는 우연히 만나게 된다.
 요컨대, {}{}에서의 상황이 리버스되어 {}{}로 변주, 반복될 때 그 사이에, (a), (b) 시기와 (c) 시기 사이에 지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진은 아사코와 료헤이를 이어주었다. 갑작스러운 이어짐. 수많은 피해를 낳은 지진 속에서 살아남은 아사코와 료헤이는 같이, 이 땅에 발 붙이고 살기로 결심한다. (한편, 아사코-료헤이 커플이 도쿄에서 벗어나 오사카로 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관련해서 후쿠시마에서 더 먼 도시로 이사가는 것으로 <자나 깨나>를 읽으면 이는 과대 해석일까?) 이런 갑작스러운 이어짐은, 오사카-도쿄 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지진오사카-도쿄 집은 갑작스런 이어짐을 은유하고, 바쿠의 등장을 암시한다. 그리고 오사카-집이 이어진 순간, 바쿠(=료헤이)가 등장하고, 문이 닫힌 직후에 료헤이(=바쿠)가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오사카-집이 갑작스런 이어짐을 암시한 바대로, 바쿠와 료헤이를 잇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더욱이 바쿠가 지진 이전에 사라졌고, 지진이 난 날 아사코는 료헤이와 교제를 시작했으며, 그 이후에 바쿠가 다시 등장했는데, 이내 사라지고 료헤이가 들어온다면, ‘지진을 매개로 해서도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볼 수 있다.
 요컨대, 바쿠와 료헤이는 동일인이 아니지만, 그 둘을 이어서(동일하다고) 바라보게끔 영화의 편집이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그 둘을 잇는 과정에서 히가시데 마사히로라는 배우(의 존재감)()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말해, 오사카-도쿄 집에 바쿠가 등장하자마자 사라지고 료헤이가 집으로 들어오는 이 이상한 지점에서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일인이역을 했었다는 사실을 문득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스타이기 때문에, 그가 바쿠였다가 머리를 깎고 료헤이로 등장하는 순간에 이미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일인이역을 한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만약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스타인 것을 모르고, 그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 머리만 깎고 다시 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일인이역을 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한편, 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비롯하여 카라타 에리카 역시 잘 알려진 스타이다. 따라서 이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혹은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광고 등지에서 언뜻이라도 그 둘의 이미지를 접했던 사람들은) 극 중에서 바쿠/료헤이와 아사코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카라타 에리카의 이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로베르 브레송이 지적한 배우에 관한 역설이다. 그래서 브레송 자신은 모델 이론을 주장하며 매 영화에서 자신이 모델이라 부른 비전문 연기자들을 발굴해 출연시킨 뒤 같은 모델과는 두 번 다시 작업하지 않았다.[13]
 브레송 정도의 수준이 아니더라도, 픽션을 만드는 사람들은 배우 혹은 스타를 기용할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대중적 이미지가 극에 개입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노력을 완전 픽션을 위한 것이라고 해두자. 하마구치 역시 완전 픽션을 구축하기 위해 몇몇 형식적 장치들을 배치한다. 그 안에서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카라타 에리카는 연기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선의 마주침과 어긋남의 정교한 쇼트들, 그리고 서사 상의 한눈에 빠지는 운명적 사랑과 회피 그리고 회귀라는 설정 등이 그러한 형식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 덕에 우리는 극에 몰입해서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카라타 에리카의 얼굴, 표정, 제스처를 볼 때, 그들을 각각 바쿠/료헤이, 아사코로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완전 픽션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배우에 관한 역설을 완벽히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 픽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극을 감상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하지만, 픽션 영화라는 형식 한가운데 존재론적 역설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부인할 수 없다.[14] 그렇기 때문에 오사카-도쿄 집 씬에서 바쿠가 등장하자마자 이내 사라지고, 료헤이로 대체되어 들어오는 이 지점은 의도적으로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보게 만들고, 더욱이 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곧 형식적으로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일인이역을 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의도적으로) 알리는 시그널이고, 이것이 ‘(도시/집의) 이어짐의 편집의 의도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단순히 떠돌이 바쿠가 아사코-료헤이 커플 서사에 개입해서 그 서사에 구멍이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쿠가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그 대신 료헤이가 곧바로 들어온다는 이 형식적 장치가 서사에 구멍을 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완전 픽션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기도 어려운데, 왜 이런 장치 혹은 시그널을 배치하는가? 이것을 소위 브레히트적 소격 효과, 극을 낯설게 한다고 설명해버리는 것은 다소 불충분하다. 그래서 이를 유운성 평론가가 제시한 형상-픽션[15] 개념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단적으로 <자나 깨나>를 형상적 픽션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러 이유에서 그렇다. 일단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카라타 에리카는 비전문 배우가 아니라 전문 배우이며 심지어 스타다. 또한 그 둘의 실제 이름이 극 중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차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하마구치는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카라타 에리카와 같이 생활하면서 혹은 촬영 준비를 하면서 포착한 그들의 사소한 몸짓이나 버릇그리고 조율되지 않은 연기, 그리고 촬영과정에서 통제되지 않은 채 기록된 사운드 등을 통해 허구적 세계와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현실적 세계를 조용히 환기[16]시키지 않는다. 요컨대, 김곡의 말을 빌려 단적으로 표현하면, <자나 깨나>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페드로 코스타의 다이렉트 극[17]처럼 내러티브의 근경(허구·픽션·캐릭터)과 원경(사실·사건·인물)을 압착하는 형식의 영화[18]가 아니기 때문에, 형상-픽션의 존재를 발견하기 힘들다.
 ‘사소한 몸짓이나 버릇, 조율되지 않은 연기 그리고 촬영과정에서 통제되지 않은 채 기록된 사운드등과 같은 극 중 등장인물(이자 실제 인물)의 관점에서 본 이것은, 말 그대로 연출자가 의도할 수 없는 영역으로 현실적 세계를 의미하며, 결국 형상-픽션은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1990)) 후세인 사브지안 혹은 (코스타의 <반다의 방>(2000)) 반다 두아르테라는 인물을 삶의 등장인물로도 보게 만든다.”[19] 이런 관점에서라면, 얼핏 <자나 깨나>에서 형상-픽션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은 제로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자나 깨나>에서 형상화 과정은 이루어진다(이것이 곧 형상-픽션이 된다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극 중 등장인물(이자 실제 인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연출자의 의도의 차원, 편집의 과정을 통해서다. 하마구치는 두 도시/집을 이어버리고, 바쿠가 등장한 뒤 이내 사라지고 료헤이가 들어오게 만들면서(편집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보게 하고, 동시에 그 둘을 모두 연기한 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는 배우가 돌발해내는 딴말과 딴짓은 아니지만, 편집이 유도해낸 돌발효과(abrupt effect)”가 된다. , 돌발효과로써 외화면(실제 세계)() 지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나 깨나> 내에서 이러저러한 이목구비를 가진 한 남자, 즉 한 명의 가시존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이 가시존재가 두 명의 가상(바쿠와 료헤이)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예를 들어, 2008년 오사카에서의 바쿠가 2011년 도쿄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나타날 때 말이다. 어쨌든 이 가시존재는 작품 내에서만 실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가시존재의 얼굴을 보면서 이 사람의 실제 이름(‘히가시데 마사히로’)과 이전의 여러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와 같은 속성존재(패션모델이자 배우로서 히가시데 마사히로에 관한 정보)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물론 완전 픽션을 꿈꾸는 연출가들은 이 속성존재를 되도록 줄이려고 시도할 것이고(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마구치도 여러 형식적 장치를 배치했다), 더욱이 가시존재와 가상의 일치를 추구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경우, 배우에 관한 역설은 여러 작품에 걸쳐서 형성된 (스타가 연기한) 여러 가상과 하나의 가시존재가 일치되는 경우다. 그럴 때마다 영화 산업은 배역의 이름을 기억해 말하기보다 그 배역을 맡은 사람의 실제 이름을 말해버리는데, 이는 곧 하나의 가시존재와 여러 가상들의 일치에 따른 부조리가 발생할 때마다, 각각의 일치는 한 속성존재의 여러 현신들(incarnations)’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신화의 형식을 빌려 부조리를 기만적으로 우회해 버리는 것[20]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작품 내에서, 그것도 연출자가 직접 두 가상을 이으면서 그걸 맡아 연기한 사람의 이름 혹은 존재감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지점을 하마구치가 규칙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딱 한 번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것이 돌발효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요컨대, 하마구치가 (솔직히 이런 지점까지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편집을 통해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보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히가시데 마사히로 혹은 그의 존재감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은, (완전 픽션을 지향하고 있는) 극이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균열을 만들어서 외화면(실제 세계)() 지시하고 환기하는 작업 같다는 것이다. , 스타 이미지가 어쨌든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자나 깨나>는 어느 정도 신화적 영화[21]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오사카-도쿄 집 씬에서 하마구치는 편집 과정을 통해 의도적으로 세속화를 시도하고, 이는 곧 가시존재와 짝을 이루면서, <자나 깨나> 내에서 형식화된 허구적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가상의 자리에 존재의 우연성을 등재하는 형상화 과정을 개시[22]하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 작품 내 두 개의 가상과 하나의 가시존재를 동일화하는 과정(, ‘바쿠=료헤이라는 등식이 참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사실 이런 동일화 과정은 무모하다고 앞서 언급했는데, 이를 다르게 보면 이 동일화 과정 자체를 폭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폭로하는 과정에서 허구적 세계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이탈리아 여행>(1954)에서 로셀리니와 버그만의 실제 결혼생활이 자연스럽게 허구적 세계에 균열을 낸 것과 다르다. 결국 <자나 깨나>에서 단적인 형상-픽션의 존재는 발견하기 어렵지만, 형상화 과정은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소 우회했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사카의 이사 갈 집과 도쿄의 이사 가기 전 집은 그 사이에 어떤 이동 과정 묘사가 없이 편집상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도시/집이 이어진 후에 바쿠가 등장한다. 그리고 아사코가 문을 닫고 부엌에 숨는데, 그 직후 료헤이가 들어온다. 이 이상한 지점에서 우리는 바쿠와 료헤이를 이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하마구치의 편집에 의한 것이며 극의 흐름에 균열 혹은 서사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이 균열 내지는 구멍에 외화면(실제 세계)() 개입되거나 혹은 지시된다. 이는 곧 (<자나 깨나> 극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도호쿠 대지진, 그리고 지진 이후의 일본인의 삶과 일본이라는 세계가 개입되고 지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사코와 료헤이가 바로 지진이 일어난 날 교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둘이 도호쿠 재건 축제 봉사 활동을 하러 갔고’, ‘그 봉사를 했던 곳(센다이)에서 아사코가 바쿠를 선택하지 않고 료헤이를 선택했다는 사실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2(a). 금지된 지하철()
 
사실 <자나 깨나>를 처음 볼 때 여러 작품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현기증>, <해안가로의 여행>을 비롯하여, 특히 키아로스타미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사랑에 빠진 것처럼>(2012)이 떠올랐다. 먼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올리브 나무 사이로>지그재그 삼부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삼부작은 <자나 깨나>처럼 단적인 형상-픽션의 영화는 아니나 형상적 기제를 내포하고 있는 영화다. 물론 이 두 작품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와 연결되어 세 작품이 공명하며 형상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나 깨나>와 다르다. 한편, '(1990년 이란 대지진 이후 한 영화감독이 자신의 영화(<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했던 소년들을 찾아간다는 내용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키아로스타미가 이란 대지진이 실제로 일어난 직후에 찍었다는 점'과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그 유명한 엔딩의 롱 쇼트'는 각각 '<자나 깨나>를 하마구치가 도호쿠 대지진이 실제로 일어난 이후에 찍었다는 점'과 '영화 후반부에 도망치는 료헤이를 아사코가 뒤따라 뛰어갈 때 나오는 롱 쇼트'와 서로 비교해봄직하다. 또한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난 아사코가 결국 바쿠를 선택하지 않고 료헤이에게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고속버스(Willer Express)를 탔을 때 아사코가 창문 바깥을 바라보는 씬은 분명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 아키코가 택시를 타고 타카시를 만나러 가는 씬을 떠올리게 만든다.

 (위) <자나 깨나>, (아래) <올리브 나무 사이로>
(위, 아래 모두) <사랑에 빠진 것처럼>

 여기서 키아로스타미와 하마구치를 일대일 대응으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나 깨나>를 보면서 유독 키아로스타미가 떠올랐던 이유를 떠올려보면, 그것은 바로 주요 이동 수단이 자동차라는 점 때문이다. (키아로스타미는 <>(2002)에서 오직 한 대의 자동차와 두 대의 디지털카메라로 21세기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2년 뒤 <10 온 텐>(2004)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가장 페이보릿(favorite)한 장소가 자동차라고 고백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 전반에서 자동차는 주요 무대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키아로스타미와 자동차는 소논문 주제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해피 아워>에서 지하철의 내/외관이 자주 등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유독 <자나 깨나> 내에선 기차나 지하철을 묘사하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어, 후반부 공원 씬에서 바쿠의 시점 쇼트 이후에 오사카의 이사갈 집 씬이 이어지기 전에 아주 잠깐 인서트로 기차의 외관 모습이 삽입된다. 이것이 도쿄에서 오사카로 이동하는 과정 묘사의 전부다. 심지어 계속 언급했던 것처럼 오사카에서 도쿄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은 집과 집을 이어버리는 방식으로 편집이 되어있다. 아예 이동 과정 묘사를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아사코가 센다이 초입에서 바쿠를 떠나보내고 지인 아저씨로부터 돈을 빌려 오사카로 돌아올 때 역시 미타조노 역(美田園駅, Mitazono Station)에서 기차를 타는 모습이나 기차 내부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돌아오는 과정 중 고속버스내에서 아사코가 사색에 잠긴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진이 난 날 지하철역은 (접근이) 금지됐다. , ‘금지된 지하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 수많은 사람들이 한 남자(아마도 취한 듯한 남자)지하철 운행 안 한다고 외치는 것을 듣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가지만, 유일하게 료헤이만 그 말을 듣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금지된 지하철() 씬은 오래 지속된다. 예를 들어, 육교에서 료헤이가 내려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고, 그 옆에 주저앉은 여자에게 위로의 손수건을 건네는 등 다소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쇼트들이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근데 이 다음 씬에서, 즉 밤에 료헤이는 아사코를 만나게 된다. 결국 지진이 난 뒤 료헤이는 지하철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아사코를 만나게 된 것이다.
 료헤이와 아사코가 서로 껴안는다. 이렇게 둘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다. 그리고 5년 뒤로 점핑한다. 둘이 아침밥을 먹고(, 지진 이후의 삶은 계속되고) 난 뒤에 나오는 씬은 자동차를 타고 센다이에서 열리는 도호쿠 재건 축제에 가서 봉사를 하는 것이다. 이 일과 관련해서 아사코는 자동차 운전을 해주는 료헤이에게 감사함을 여러 번 표현한다. 먼저, 센다이에서 도쿄 집으로 돌아온 밤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진 료헤이를 아사코는 마사지를 해주면서 가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 료헤이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료헤이는 너의 그런 말이 내게 큰 힘이 된다.”고 답한다. 이는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나는 식당 씬에서 쿠시하시가 계산을 하러 가기 직전의 대화와도 겹쳐진다. 오사카로 이사 가면 도호쿠를 자주 가기 힘들 것 같다고 누군가 말하자, 하루요는 아사코가 그런 일을 할 줄 몰랐다고 말하고, 이에 아사코는 대단할 거 없다며 오히려 료헤이에게 감사하고, 또 잘못되지 않은 일을 하고 싶었다고 답한다. 여기서 잘못되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도호쿠 재건과 관련한 봉사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 아사코는 료헤이의 자동차를 타고 도쿄와 센다이 사이를 이동했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것이다. 사실 아사코가 왜 도호쿠 지진과 관련한 봉사를 하게 되었는가 하는 동기는 영화 내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지진 발생 당일의 상황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다. 지진 발생 당일 모든 대중교통, 즉 신칸센이나 지하철과 같은 모든 공공교통 수단은 마비되었다. 그래서 료헤이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아사코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지진이 (그리고 금지된 지하철()) 이어준 인연. 어쩌면 아사코와 료헤이는 자신들을 이어준 지진에게 빚진 것을 갚는 것(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의 일환으로 센다이를 가게 된 것이 아닐까? 한편, 굳이 왜 신칸센이나 지하철이 아니라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일까? 이는 일종의 제의(祭儀)와 같다고 생각한다. 구글 지도를 통해 검색해보면 도쿄에서 센다이로 이동하는 방법은 크게 자동차와 대중교통이 있다. 자동차의 경우 대략 4시간 이상이 걸리지만, 대중교통(신칸센과 지하철)을 이용하면 대략 2시간 내외가 소요된다.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굳이 자동차를 이용한다는 것, 이는 그 지진 발생한 날을 떠올리는 작업이고, 더욱이 암흑 같았던 순간, 즉 암흑의 긴 순간을 다시금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전면허가 없는 아사코는 이 제의를 같이해준 료헤이에게 여러 번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요컨대, 의도적으로 기차나 지하철의 내/외관 묘사를 피하고 자동차를 타고 도시를 이동하는 것은 지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맥락에서 아사코가 바쿠를 거절하게 된 경위도 생각해볼 수 있다. 공원 씬에서 바쿠는 자동차 안에 숨어서 아사코를 발견했다. 그리고 아사코에게 돌아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홋카이도로 가자고 설득한다. 아사코는 충동적으로 바쿠의 차를 타고 떠난다. 그리고 잠든 뒤 깨어난다. 깨어나 보니 센다이 초입이다. 사실, 바쿠는 아사코를 떠났다가 자기 마음대로 다시 돌아왔고, 심지어 지진도 경험하지 않았다.[23] 그런데 바쿠는 아사코-료헤이 커플이 오가던 바로 그 루트’(고속도로)를 통해 아사코를 센다이로 데려갔다. 그래서 아마 이 순간 아사코는 료헤이와 도쿄와 센다이를 오가던 추억을 떠올린 것 같다. 아사코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쿠는 료헤이가 아니야. 난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말 그대로 아사코는 바쿠가 아니라 료헤이와 함께 지진을 겪었다. 그래서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 지진에게 빚진 것, 즉 지진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것을 문득 깨달은 아사코는 바쿠의 제안을 거절하고, 바쿠도 쿨하게 인사를 하고 다시 떠난다(떠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사코가 차 안에서 자다가 깨어나’ ‘바쿠는 료헤이가 아님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사코의 이 말은 이 직전에 생긴 (서사의) 균열 혹은 구멍을 다시 봉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한 픽션 내 두 개의 가상과 하나의 가시존재는 궁극적으로는 같을 수 없다(‘바쿠료헤이’).) 이 지점을 ‘1(a)’에서 언급한 (고 있거)나 깨(어 있거)라는 기준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자나 깨나> 내에서 아사코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는 씬 자체는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a) 시기 오카자키 집에서 바쿠가 크림빵을 사러 떠난 직후다. 두 번째는, (c) 시기 센다이에서 도쿄로 료헤이의 차를 타고 돌아올 때다. 마지막은, (c) 시기 도쿄에서 센다이로 바쿠의 차를 타고 갈 때다. 처음 잠을 자는 씬은 차 안에서가 아니라 오카자키 집이다. 하지만 오카자키 집에 가게 된 이유는 바쿠 뒤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다. 사고가 났지만, 아사코와 바쿠는 다친 데가 없었고, 오히려 다짜고짜 서로 키스를 했다. 한편,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는 것 사이에 일종의 슬리핑 타임혹은 데드 타임이 있다고 한다면, 물론 이 시간이 영화 내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곧 블랙아웃(blackout) 타임이다. 이 블랙아웃 동안 아사코는 바쿠가 집에 돌아왔는지 여부를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사코는 깨어나서 바쿠가 없다는 사실에, 즉 교통사고에서도 살아남았는데 크림빵을 갑자기 사러 간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바쿠를 걱정했다. 만약 아사코가 자지 않고 깨어있었다면, 바쿠를 찾으러 가거나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한편, 유일하게 (b) 시기엔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의 이동 수단 쇼트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사코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는 씬은 없다. 그 대신에 블랙아웃 쇼트가 가시적으로 존재한다. 바로 지진이 발생한 순간이다. 원래대로라면 아사코가 그 날 낮 공연(헨릭 입센의 들오리)에 가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사코는 다음 날 공연으로 바꿨고 그 자리엔 (아사코를 찾고 있는) 료헤이가 대신 왔다. 그래서 아사코가 아니라 료헤이가 블랙아웃을 물리적으로 경험했다. 어쩌면 아사코가 료헤이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를 껴안으며,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결심한 것은 료헤이가 블랙아웃을 경험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사코는 공연장에서의 블랙아웃 순간, 즉 지진이 난 순간 료헤이(가 자기 대신 공연장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를 걱정했을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아사코로 하여금 2년 전 바쿠의 사라짐(과 그를 걱정했던 모든 것)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료헤이를 다시 만났을 때 느꼈던 아사코의 감정은, (료헤이가) 살아있음에 대한 안심, 혹은 고마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c) 시기에 아사코는 료헤이의 차와 바쿠의 차에서 한 번씩 자고 일어나는데, 그때마다 그 둘에게 모두 고속도로에서 내려왔어?”라는 말을 반복해서 한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제의적 장소로서 고속도로. 이곳은 지진을 떠올리는 장소이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소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 외도의 장소이기도 하다. 심지어 성찰의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서 장소’(route)이나 여정’(journey)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고속도로에서 료헤이 혹은 바쿠가 운전하는 동안 아사코는 블랙아웃 상태에 있었다. 자면서 아사코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반복되는 꿈속에(블랙아웃에) 바쿠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먼저 료헤이의 차에서 깨어난 아사코는 잠깐 존 것이 미안해서 집에 오자마자 료헤이에게 가줘서 고맙고, 또 사랑한다고 말하며 애정의 마사지를 해준다. 반면, 바쿠의 차에서 깨어난 아사코는 오히려 료헤이와 그 루트(고속도로)를 오간 것을 떠올리며 바쿠가 료헤이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깨달았다. 사실 이는 애초에 바쿠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2008년 아사코의 첫 블랙아웃 이후 나타났을 때 무책임한 약속-“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거야.”-()을 했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물론 그 말을 2016년이 돼서야 지키긴 지켰다. 하지만, 지진을 함께 겪은 료헤이를 사랑하게 된 아사코는 그 이전의 아사코와 다르다. 요컨대 료헤이의 말 그대로, 바쿠와 닮은 덕분에 료헤이는 아사코와 만나게 되고 또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는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 둘의 관계에서 바쿠는 만남의 주선자그 이상으로 나아가진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바쿠는 떠도는 자로서 어딘가 정착해서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은 어색하다. 아사코가 바쿠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언젠가 또 떠났을 것이다.

2(b). 연극(연기)의 중단 혹은 반복
 
지진이 일어난 날 마야의 공연이 중단된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연극(연기)의 중단. 사실, 연극(연기) 혹은 공연이라는 소재는 <자나 깨나> 내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한다. 먼저, 마야-아사코와 료헤이가 친해지게 된 계기를 떠올려보자. 고쵸 시게오 사진전 앞에서 입장 시간이 지나 아사코와 마야는 입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료헤이가 교토에서 이 사진전을 보러 왔는데 (...)” 하면서 연기를 시작하자 마야가 동참한다. 하지만 료헤이는 디테일 한 것(사슴을 치었다)은 말하지 말라며 마야의 연기를 중지시킨다(첫 번째 중단). 어쨌든 료헤이의 연기 덕택에 이들은 사진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사진전을 보고 나와서 근처 카페를 가게 된 세 사람. 마야는 료헤이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료헤이는 마야가 역시 배우는 배우다며 칭찬한다. 그 둘의 대화를 듣다가 아사코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마야는 료헤이와 단둘이 걸어가게 된다. 그리고 마야는 자신의 집으로 료헤이를 초대한다.
 그리고 (두 번째 계단 씬 다음에) 이어지는 마야-아사코 집 씬. 이 씬은 마야가 안톤 체호프의 대사를 연기하는 TV 쇼트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연기는 이내 마야 본인에 의해 중지된다(두 번째 중단). 그리고 언짢은 듯 쿠시하시는 집에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해피 아워>의 워크숍 씬을 연상시키는, 마야의 연기를 둘러싼 마야, 료헤이, 쿠시하시의 토론이 시작된다. 먼저 쿠시하시는 관객의 칭찬을 받으려고 연기를 한다는 마야에게 직설적으로 그것은 어색하고 관객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티켓을 사준 칭찬에 자아 도취한 것 아니냐고 덧붙인다. 그러자 마야는 다들 칭찬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냐며 반박한다. 이러한 일련의 토론 과정에 아사코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차 프레임으로 아사코는 마야, 료헤이, 쿠시하시와 분리되어 있다. 마치 이 세 명이 연극(연기)() 시작하고, 아사코만 관객으로서 감상하는 것 같은 상황. (아니면 정 반대로 아사코가 프레임 내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침묵을 지키던 아사코 역시 몇몇 말을 하기도 한다. ‘쿠시하시, 당신이 말한 것처럼 친구로서 마야에게 칭찬을 했었다. 마야의 노력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마야의 연기를 보고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다. 더욱이 한 가지 길을 가는 마야가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 말에 누구도 리액션을 하진 않는다. 어쨌든 쿠시하시는 마야에게 질투가 났던 것 같다며 사죄를 하고, 이 토론은 일단락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야가 헨릭 입센의 들오리공연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하지만 마야의 연기는 지진에 의해서 중단된다(세 번째 중단). 심지어 들오리포스터는 넘어져 있어서 료헤이의 발에 걸리기까지 한다.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블랙아웃(암전)은 지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요컨대, 마야의 연기는 세 번의 서로 다른 이유(료헤이, 자신의 의지, 지진)에 의해 중단된다. 결국 우리는 배우인 마야의 연기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 대신에 마야가 (마야에 비해 좀 더 연기에 대해 근본주의적 생각을 갖고 있으나 정작 배우라는 꿈을 포기하고 오히려 회사에서 그 능력을 프레젠테이션에 활용하는) 쿠시하시랑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사실상 마야는 아사코-료헤이커플의 러브 스토리 드라마의 시청자가 된다. 한편, 마야의 남편 쿠시하시는 딱히 이 드라마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사실, 하루요는 에이코와 더불어 아사코가 주연인 드라마의 원조 시청자다.)
 이 드라마는 말 그대로 현실/일상에서 벌어지는 드라마. 이는 소위 TV 드라마와는 구분되며, 오히려 <자나 깨나> 내의 가상들이 아사코-료헤이 커플의 일상을 드라마처럼 본다는 것(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자나 깨나>에서 (특히 (c) 시기의) 아사코-료헤이 커플 서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료헤이와 아사코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프레임화되서 이 드라마의 주연이 된다. 먼저, 료헤이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은 프레임 내에 여러 번 들어간다. 예를 들어, 실내 클라이밍 씬에서 마야의 스마트폰에, 센다이에서 봉사 후 밤에 어르신들과 식사를 할 때 아사코의 스마트폰에 말이다.[24] 이때, 료헤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는 마야와 아사코의 모습이 나오는데(촬영 과정), 다른 한편으로 그녀들이 찍은 그 장면 자체가 <자나 깨나>의 쇼트로 구성되기도 한다(촬영 결과물). 한편, 아사코는 마야-아사코 집 씬에서 저녁을 준비할 때(, 마야의 연기에 관해서 토론할 때) 부엌이라는 분리된 공간, 즉 이차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 있다. 여기서 하마구치의 카메라는 이 이차 프레임의 안과 밖을 오간다. 다시 말해, 이 씬에서 아사코가 나머지 세 명을 보는 쇼트도 있고, 나머지 세 명이 아사코를 보는 쇼트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저 멀리서 아사코와 나머지 세 명 모두를 보는 쇼트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사코는 프레임화된다. 그리고 덧붙여 바쿠는 2016년에 광고판 혹은 TV라는 프레임 안에서 이미지로 등장한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25]
 요컨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프레임화된 아사코-료헤이 커플의 일상을 다른 사람들은 곧 드라마처럼 본다는 것(여긴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바쿠가 아사코-료헤이 커플 앞에 등장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이런 드라마의 시청자로는 마야와 하루요가 있다. 사실, 그 이전에 에이코가 아사코가 주연인 드라마의 원조 시청자였다. 에이코는 아사코가 바쿠랑 연애할 때 계속 부럽다고 했었다. 이렇게 에이코가 남의 러브 스토리의 시청자가 된 것은 자신의 이혼 경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이코는 입버릇처럼 그이를 보러 신칸센을 타고 도쿄에 가서 아침밥만 먹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이는 남편이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 아마 에이코는 이 외도 때문에 혹은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남편과 이혼을 했고, 오카자키를 홀로 키웠을 것이다. 게다가 오카자키는 어느 순간 루게릭병에 걸려서 계속 수발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이코가 바깥 소식을 듣는 방법은 라디오밖에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물론 이전에 이 역할을 오카자키의 친구들이 해줬으나, 지금은 다 오사카를 떠났다. 다만, 에이코에게 일종의 부러움과 낙이었던 드라마의 주연인 아사코만 유일하게 오사카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사코는 에이코에게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한다.)
 한편, 마야와 하루요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야는 료헤이의 팬이고, 하루요는 아사코의 팬이다. 먼저 마야는 아사코를 바라보는 료헤이를 보면 설렌다고 말하며, 심지어 아사코가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났을 때 전화를 해서 료헤이가 저러는 것을 못 보겠다(같이 살았던) 아사코가 아니라 료헤이를 걱정한다. 또 마야는 료헤이가 탄 택시를 쫓아가다 주저앉아 울기까지 했다. 반면, 하루요는 2008년부터 줄곧 아사코를 지지하고 응원했다. 단적으로 하루요는 아사코에게 바쿠를 만나지 말라고 일관되게 조언했었고, 또 아사코가 바쿠랑 떠났을 때 인간적으로는 최악이었지만, 멋졌다. 나중에 다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길.”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이는 분명 마야가 전화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자나 깨나>를 읽는다면, (b)에서 중단된 (마야의) ‘연기(c)에서 아사코와 료헤이가 주연을 맡으면서(프레임화되면서) ‘드라마가 되어 재개된다. 이 드라마에서 두 주연은 서로의 상황을 바꾸어 상황극을(혹은 의도치 않은 밀당을) 전개한다. 그래서 이 지점을 두고 앞서 역지사지의 상황 재현(再現)’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는 곧 아사코가 '바쿠는 료헤이가 아님'을 깨닫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상황을 정리해보자. 아사코와 료헤이가 주연을 맡게 된 계기는 바로 지진이다. 지진 이후에 살아남은 둘은 그 상처 혹은 불안을 같이 극복하고자 한다. 그 방법은 센다이에 가는 것이다. 이는, 아사코의 표현에 따르자면, ‘잘못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료헤이는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 더 나은 환경으로 가고자 오사카로 가기로 결심한다. 이때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같이 오사카에 가자고 말한다. 이는 곧 청혼이다. 아사코는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바쿠가 집에 찾아온다. 아사코가 이내 문을 닫아서 바쿠 대신에 료헤이가 들어온다. 료헤이는 주저앉은 아사코를 보면서 무언가 짐작을 했을 것이다. 이 짐작은 그 날밤 바쿠의 등장으로 확신이 된다. 이때 아사코의 말, “왜 지금이야?(なんで ?)” 이 말 그대로, 잘못된 타이밍에 바쿠는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돌아온 바쿠의 손을 잡고 떠난다. 두 개의 운명 사이에서의 선택. 하지만, 바쿠의 차를 타고 센다이에 도착한 순간 바쿠는 료헤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앞서 언급했다.) 그리고 아사코는 바쿠는 보지 못하고 떠난 센다이의 바다를 본다. 그리고 누구의 차도 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오사카로 돌아온다. 오사카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아사코는 하늘을 쳐다본다. 마치 바쿠가 오로라를 보면서 바다를 떠올렸던 것처럼.


 하지만 이 과정(여정)이 아사코에게는 자각/성찰의 시간일지 몰라도 료헤이에겐 큰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오사카로 돌아온 아사코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쿄 때처럼 다시 고양이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때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고양이를 찾는 아사코를 료헤이가 위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아사코는 아래에서 료헤이를 바라본다. 시선의 마주침. 이내 아사코는 료헤이를 부르며 뒤따라 뛰어간다. (b)에서 료헤이가 아사코를 찾아다녔던 것의 변주-재현. 료헤이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근다. 아사코는 현관문 앞에서 료헤이를 부른다. 오사카-도쿄 집 씬에서 바쿠가 현관문 앞에서 아사코를 부르던 것의 변주-재현. 아사코가 료헤이를 계속 부르자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고양이 진탄을 내어준다. 그런데 이번엔 문을 잠그지 않아서, 아사코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요컨대, 아사코는 바쿠/료헤이가 겪었던 상황을 <자나 깨나> 후반부에서 (압축해서) 재현하는 것이다. 이런 역지사지의 재현은 아사코 본인이 바쿠를 부르고(그리고 바쿠의 등장), 바쿠를 선택함에 의해서 파생된 것이다.


 일종의 역지사지의 드라마 혹은 상황극은 아사코가 오사카의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끝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이미 파국을 맞았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집 뒤에 흐르는 강물을 쳐다본다. 그리고 진탄이 올라와 (아사코가 료헤이를 마사지해 줄 때 둘을 옆에서 바라본 것처럼) 뒤에서 둘을 바라본다. 료헤이가 아사코를 쳐다보지만, 아사코는 강물만 볼 뿐이다. 시선의 어긋남. 이 강을 두고 료헤이는 더럽다고 말한다. 반면,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26]고 말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강이 놓였고, 심지어 둘은 각자 심정에 따라 상반되게 반응한다. 그리고 둘은 강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렇게 영화는 끝난다.


[12] 유운성, 형상적 픽션을 향하여: 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 유령과 파수꾼들, 2018, 210쪽에서 부분적으로 편집해서 인용.

[13] [12]와 동일. 유운성 평론가의 표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브레송은 자신의 영화에서 가시존재(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등장 등으로 스타의 이미지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의 ‘~이다’)는 그와 결부된 가상(‘~처럼’)만을 속성으로 지니게끔 하는 일에 극도로 집착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모델이란 속성존재(이미지에 정착된 그대로 상당 부분 고정적인 채로 남는다는 의미의 ‘~이다’)가 없는 가시존재여야만 하는 것이다.” 가시존재(‘~이다’), 속성존재(‘~이다’), 가상(‘~처럼’)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204~207쪽 참조.

[14] [12]와 동일, 206.

[15] [12]와 동일, 204~215. 이와 관련해서, 김곡이 간단하게 정리한 표현을 인용한다. “(...) 유운성은 형상적 픽션을 허구적 플롯의 형식을 무너뜨리진 않는 가운데, 우연성이 불러오는 그 불확정성으로 인해 형식의 안정성을 슬며시 흔드는영화로 한정한다. 반대로 모든 형상적 픽션은 다이렉트 극이다. 그 형식이 슬며시 흔들리든 요란법석 흔들려서 아예 무너지든 그 이면의 우연성을 드러내기만 하면 다이렉트 극이기 때문이다.”(김곡, 다이렉트 시네마, 투명기계 - 화이트헤드와 영화의 소멸, 2018, 437쪽 각주.)

[16] [12]와 동일, 222.

[17] 김곡, 다이렉트 시네마, 투명기계 - 화이트헤드와 영화의 소멸, 2018, 438쪽에 따르면, 다이렉트 극은 원경보다는 근경으로부터 내러티브를 시작하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건이나 인물로서 우연성을 향해 픽션을 개방하기 위해서만 그리하는 것이며, 가장 먼저 떠올려볼 수 있는 방법은 허구의 시나리오(거짓의 형식), 실제상황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실제인물들(참의 내용)을 캐스팅하는 것이다.” 여기에 김곡은 가까운 플롯은 먼 플롯의 기회원인(occasional cause)이 되며, 반대로 먼 플롯은 가까운 플롯의 돌발효과(abrupt effect)가 된다.”고 덧붙인다.

[18] [17]과 동일, 437~438.

[19] [12]와 동일, 222~225.

[20] [12]와 동일, 207.

[21] [12]와 동일, 207~208.

[22] [12]와 동일, 208쪽에서 부분적으로 편집해서 인용.

[23] 물론 바쿠가 물리적으로 지진을 경험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의 시간 내에서,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시베리아로 사라지고 지진 이후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지진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이다.

[24] 전자의 씬에선 쿠시하시가 클라이밍을 하는 동안 료헤이, 아사코는 마야의 다음 공연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후자의 씬에선 아사코가 무언가를 먹고 입을 틀어막는 연기를 해서 료헤이가 놀란다.

[25] 물론 마야 역시 TV라는 프레임 안에 있었지만, 혹은 무대에 오르려고 했지만, 이는 각각 다른 이유로 중단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마야는 드라마의 주연이 될 수 없다.

[26] 아사코는 きれい라고 말한다. 이는 아름답다로 주로 쓰이지만, ‘깨끗하다는 의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