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장-뤽 낭시의 대화」(2000.09.25.)

  • 출처: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영화의 명증: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L'évidence du film: Abbas Kiarostami』(Yves Gevaert Éditeur, 2001) pp. 80-95에 수록된 Conversation entre Abbas Kiarostami et Jean-Luc Nancy를 대본으로 삼아서 번역했다. 단 프랑스어 원문을 바탕으로 하되 영역본을 부분적으로 참조하여 번역했다.

  • 참고1: [1], [2], [3]・・・ ・・・의 각주는 원저자의 주이다.
  • 참고2: 〈1〉, 〈2〉, 〈3〉・・・ ・・・의 각주는 옮긴이의 주이다.
  • 참고3: "  "은 원문의 « »에 해당하며, '  '은 옮긴이가 추가한 부호다. 
  • 참고4: 본문에서의 이탤릭체는 원문을 따른 것이다. 단 볼드체는 옮긴이의 강조다.
  • 참고5: (  ) 안의 프랑스어는 원문에서, 영어는 영역본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단 (  ) 안의 페르시아어, 한자 표기 등은 옮긴이가 첨가한 것이다.
  • 참고6: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강조된 단어 중 일부는 그대로 발음하여 적었는데, 이때 가능하면 (  ) 안에 한국어로 사전적 뜻을 같이 적어두었다. 이외의 (  ) 안의 한국어는 원문에서의 문장을 번역한 것이다.
  • 참고7: [  ] 안에 이탤릭체로 강조된 문장은 원문을 옮긴 것이다. 반면 두 개의 '(…)' 사이에 삽입된 [  ] 안에 이탤릭체로 강조되지 않은 문장은 옮긴이의 요약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본문은 발췌본이다. 사실, 내 '번역 계획'과 관련하여 출판사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은 것이 2021년 6월 초의 일이다. 출판사는 장-뤽 낭시에게도 내 '번역 계획'에 관한 의견을 한번 물어보겠다고 했다. (낭시가 긍정적으로 답을 해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한동안 출판사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8월 말 낭시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계속 침묵하다가 12월 말쯤 출판사에 다시 메일을 보냈지만, 마찬가지로 답장을 받지 못했다. 결국 '전문'이 아니라 '발췌'의 형식으로 번역본을 공개한다. (+ 낭시를 기리며...)


-발췌본-
[장-뤽 낭시가 '페르시아 세밀화'(miniature persane)를 언급하면서 대화가 시작된다.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영화가 페르시아 세밀화와 유사함을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장-뤽 낭시는 세밀화 이외에 이란의 이미지와 관련한 문화가 있는지 묻는데, 이와 관련하여 둘은 몇 가지 서구적 개념("미니아튀르"(miniature, 세밀화), "포트레"(portrait, 초상화)[1], "페이사주"(paysage, 풍경)[1] 등)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간다.]

(...)

JLN : 이미지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내에서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초상화인데, 손이 나와 있는 초상화고, 파이프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진인가요? 혹은 그림을 찍은 사진인가요?

AK : 사진이 아닙니다. 통속적인 스타일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10년 혹은 12년 전에 포스터로 만들어져 이란의 모든 마을에 널리 배포되기도 했죠.

JLN : 누구를 혹은 무엇을 표현하는 건가요?

AK : 행복한 농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죠. 그는 찻잔, 한 조각의 빵, 약간의 고기, 파이프,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쇼포크(Chopoq, *)[2]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의 농민을 그린 이상적인 그림이죠.

 چپق*

JLN : 영화에서 이 그림은 균열이 가서 찢겨 있습니다.

AK : 제가 직접 찢었습니다. 상징적인 이유 때문에요.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농민은 빵, 차 한잔, 고기 등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의 생계에 위협이 닥친 것이죠. 지진으로 인해 그와 그의 소유물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 상태는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란에서 이 그림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포스터에 사용된 것이죠. 여기에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땅이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JLN : 문제의 그림의 화가나 특징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메시지는 이해가 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영화의 미장센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바로 감독이 바깥쪽을 쳐다보고, 폐허를 본 뒤에 돌아와 그림을 보는 지점에서 말입니다.〈1〉
 또한 영화와 이미지 사이에 전체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특히 이란과 전통이 남아 있다는, 즉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와 같은 내용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화가의 이미지와 영화의 이미지라는 두 가지 종류의 이미지와 관련되어서 말입니다. 감독님께서 정말 찢어진 그림을 보신 건가요? 아니면 모든 것을 연출하신 건가요?

AK : 이 그림이 균열에 의해서 찢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벽에 붙은 포스터는 지진이 일어나면 떨어질 것입니다. 오로지 벽화만이 이처럼 균열이 갈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금이 간 벽을 찾아냈고, 그림을 균열 위에 붙였습니다. 그런 다음 정확하게 지그재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조명을 그림 뒤에서 비춰서 제가 찢었습니다.

JLN : 저는 벽에 붙은 그림이 균열에 의해서 찢어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항상 궁금했었는데요. 이제서야 이해가 됩니다.

AK : 그림은 마을에 있는 찻집에서 샀고, 이를 영화를 찍고 있던 장소에 가져갔습니다. 저는 이 그림이 제 영화의 의미와 매우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지진 이후에 이 농민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특히 그의 쇼포크(chopoq)도 손에서 떨어졌죠. 게다가 당신은 그가 파이프를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언어유희를 하자면, 이 그림은 단지 현실(realité)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vérité)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 이는 곧 농민의 운명이 나아졌기 때문에 그의 쇼포크(chopoq)가 파이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3] 어떤 사건이 죽음을 야기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이는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JLN : 이것이 이미지라는 사실에 감독님께서는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저희가 지진에서 살아남은 다른 인물들을 보는 것처럼 그림과 같은 구도의 실제 노인이 보여야 하지 않았었나 해서요. 그런데, 여기선, 바로 이미지가 있습니다.

AK : 저는 제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저도 작업합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실현한 것을 그저 선택하기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저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 이 포스터가 유명해졌을까? 왜 모든 집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만약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면, 선택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농민의 삶에 관한 사회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책에 따르면, 이런 그림은 의미가 있으며 다양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란 농민이 가진 꿈의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미지기 때문이죠.

JLN : 그래서 널리 퍼진 것이겠죠.

AK : 맞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이유를 알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 그림은 농민들의 꿈과 희망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거울이 되어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비춰 볼 수 있게 만듭니다. 농민의 삶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그의 고기, 그의 빵조각, 그의 차, 그의 담배. 이러한 장치가 거기에 있다면, 삶도 거기에 있고, 행복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진 동안에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노파가 잔해 속에서 남편을 찾지 않고, 오히려 주전자를 가지고 차를 만드는 장면도 이런 맥락에서 떠올려볼 수 있겠죠.
 마을에서 작업하기 위해서는 농촌 환경의 사회학을 알아야 한다고 통상 말합니다. 이 그림은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발견했을 때 언젠가 도움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막 끝에 있는 모든 찻집에, 한쪽에는 초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몇 마리의 오리가 헤엄치는 작은 강 위에 놓인 다리가 있는 눈 덮인 산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는, 싱싱하고 푸르른 자연을 전혀 본 적이 없는, 즉 자연을 박탈당한 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사막에서 촬영한다면, 이런 그림은 필수적이죠.

(...) 

[낭시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서 집 안에 있는 그림이 정확히 보이지 않음을 지적하자, 키아로스타미는 카메라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그림이 보일 수 없다고 답한다.]

(...)

JLN : 그렇게 암시된 이미지들이나 사진들과 이 영화 전체가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 더 나아가 결국엔 인류학자가 사진을 훔치는 이야기라는 사실 간의 관계 속에서 무엇이 작동되는지 궁금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죽어가는 여인을 찍으러 갔고, 결국 몇 장의 사진을 건졌죠. 그런데 처음에는 한 여성이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AK : 카메라는 어떤 이미지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여줄 의도가 없었거든요. 남자한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여자의 행동은 문화와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마을에서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집니다. 제가 최근에 촬영하러 가기도 했던 아프리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을 사람들, 즉 남자나 여자가 카메라를 알고 있다면, 그들은 촬영을 멈추게 합니다. 그들은 촬영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미지와 사진에 관한 당신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가끔 저는 이미지나 사진이 영화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의 미스터리는 봉인된 채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에는 사운드가 없고, 또한 알랑투르(alentour, 주변부)[4]가 전혀 없기 때문이죠. 사진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영화보다 더 오래 생명을 유지합니다.
 2000년 9월 도르도뉴 지방에서 풍경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저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풍경을 똑같이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두 장의 사진 사이에 15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있는데요. 이 두 장의 사진을 봤을 때, 저는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앵글로 찍은 두 장의 사진은 같은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사이에 몇 그루의 나무가 사라졌는데, 특히 더 최근에 찍힌 사진에서 나무는 부재합니다. 요즘에는 저는 영화감독보다는 사진작가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때때로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런 영화를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당신의 글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좀 더 분명해졌습니다. 만약 이미지들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해석하게 만들고, 제가 의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의미를 끌어낸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관객이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낫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을 말합니다. 그리고 관객은 각각 상상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을 갖고도 단 하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때, 이는 마치 정말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말한 것과 같습니다. 관객은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중요한 것은 주제(sujet)가 아니라 시선(regard)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다르는 스크린 위에 있는 것은 이미 죽었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바로 관객의 시선(regard)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의 글을 여러 번 읽은 뒤에 영화감독의 책임이 너무 큰 것 같아 어떤 영화도 연출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JLN : 그러기엔 이미 늦었죠.

AK :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JLN : 이미지, 오직 하나의 이미지에 도달하고 싶은 이 욕망을 저는 매우 잘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일반적으로 사진과 비교하여 영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완전히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 사운드 트랙은 필수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네마는 아주 오랫동안 무성이었습니다. 감독님도 나중에서야 영화 안에 종종 음악을 삽입하셨죠. 심지어 말을 하고 있을 때도요. 따라서 사운드와 관련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알랑투르(alentour, 주변부)의 부재, 즉 외화면의 부재에 대한 개념도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스크린 위에 있는 것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시네마는 단지 1초에 24개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에 관해서 말해봅시다. 감독님께서는 이야기를 최소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거의 제로 상태에 이르게 하죠. 스토리 라인에 실마리가 거의 없는 것, 이는 정말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감독님의 영화는 이미 감독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항상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가령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의 결말부에서 찍힌 사진의 경우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마지막 숏의 경우, 물론 여기선 사진이 아니라 공책이긴 하지만, 항상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마 모든 결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체리 향기>의 이미지도 튕겨 시네마로 되돌아옵니다. 이 이미지는 출처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아마 무덤 안에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눈'(œil)에서 기인했을 바로 그 이미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결말이 일종의 이미지, 즉 어떤 고정된 이미지의 배치에 이릅니다.

AK : 저는 이미지가 어떤 것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능력, 즉 이미지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여 각자 해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에 점점 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요소가 한 지점에서 들어와 다른 지점에서 나가는 그런 움직임이 있는 숏에서는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즉 관객이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여행을 떠났을 때의 경우와 같습니다. 기차역의 중앙 홀을 지나가면서 수백 명의 사람을 마주칩니다. 그러나 제가 유일하게 기억할 사람은 바로 제 맞은편에 앉은 여행객일 것입니다. 특히 제가 시간을 들여 그 사람을 눈여겨볼 때 말이죠. 이전에도 아마 그 사람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테지요. 그 사람이 부동의 상태로 있을 때, 이는 저로 하여금 마치 이미지를 보듯이 고정적으로 응시하게끔 만듭니다. 그러다 보면 해석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의 세부사항,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다른 이들의 얼굴들이 마음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사실 제가 카메라처럼 자리 잡아 고정된 바로 이 순간에 그 사람은 주제로서 배열되고 이미지처럼 고정됩니다. 이는 픽사시옹(fixation, 고정)[5]의 시간을 가능케 하는 브레송의 카메라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는 마치 풍경을 향해 열려있는 부동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을 통해, 멜랑콜리한 시간 동안, 건너편에 서 있는 단 하나의 나무를 고정적으로 응시합니다. 이때 나무는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너는 이 나무를 세상의 모든 나무들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는 너한테 변함없는 어떤 것을 약속한다. 너는 나무와 약속을 맺는다. 너는 나무에 다다르고, 나무는 너를 받아들인다.〈2〉
 이런 고정된 것들이 우리의 정동(情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JLN : 여기서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요. 서양인으로서, 아주 서구적인 서양인으로서 (감독님의 경우 동양인과 서양인 중에 스스로를 무엇으로 여기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저는 '재현으로서의 이미지'(image comme représentation)라는 문제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복사, 즉 현실 바깥의 모방으로서 이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독님의 말에서, 단호하게 동양적인 무언가가 있어 보입니다. 이미지를 존재나 힘으로 여기는 것에서 말이죠. 이는 일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타오(Shih-Tao)〈3〉의 『화어록(畵語錄)』〈4〉에서 예시되는 중국 회화와 연결됩니다. 시네마에 동양과 서양의 차원과 역사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감독님의 영화에서 강력하게 느낍니다. 브레송이 이에 가깝고, 또 시네마에서 이런 것이 항상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시네마는 스스로 이야기하고자 했고(가령 탐정 소설, 위대한 러브 스토리, 역사 영화와 같은 모든 신화적인 소재를 가지고 말이죠.), 또한 움직임을 재현하는 역량을 가진 예술이 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야기하는 것, 혹은 소리 등을 포함하는 살아 있는 것 총체의 재현과 움직임을 신봉하는 것에는 훨씬 덜 중점을 두는 또 다른 세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시네마는 실제적 현실에 맞서고, 움직임과 덜 연관되어 있으며, 외화면, 역사와 상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지 바깥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죠.

AK : 현재까지 저는 시네마에 관한 하나의 정의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은 시네마가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소설이 더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전 연속극도 그런 것을 잘 할 수 있죠. 개인적으로 더 까다롭다고 느끼는, 그리고 통상적으로 일곱 번째 예술로 정의되는 또 다른 시네마가 있습니다. 이런 시네마 안에는 음악, 이야기, 환상, 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시네마가 '마이너 예술'(art mineur)로 남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테면 시를 읽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시를 완성(achèvement)시키게끔 만드는 원인이 궁금합니다. 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체에 이르게끔 창작되었습니다. 제 상상력이 시 안에서 섞이게 된다면, 그 시는 제 것이 됩니다. 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 일련의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만약 기억 속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현한다면, 만약 그 안의 코드를 파악한다면, 저는 미스터리에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10년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시에 이제서야 애착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제 아버지께서 읽어주던 마울라나 루미(Maulana Rumi)[6]의 시가 생각납니다. 루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일단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10년 전에 시를 다시 읽었고, 오늘날에도 다시 읽었습니다. 그 안에서 제가 놓쳤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이해되진 않습니다. 한편, 영화에서 관계와 연결고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종종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해못함'(incompréhension)은 시의 본질 중 일부이죠. 우리는 시를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네마는 다릅니다. 우리는 시에 감정을 통해 다가가지만, 시네마에는 생각과 지성에 입각해서 접근합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시에 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친구와 전화 통화하면서 좋은 영화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네마가 '메이저 예술'(art majeur)로 간주되려면 '이해되지 않을 가능성'(possibilité de ne pas être compris)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영화는 우리 삶의 다른 시기에 다른 인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네마는 점점 더 보고, 이해하고, 평가하는 사물이나 오락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 시네마를 정말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모호함'(ambiguïté)과 '미스터리'(mystère)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진, 즉 이미지는 거의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거나,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미지는 재현하지 않고, 재현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이미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관객을 초대하여 그것을 발견하게끔 만듭니다.

JLN : 시네마 자체의 내부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시네마를 판단하는 것이 놀랍네요.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움직임으로 전체를 파악하는, 그리고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야기를 하는 역량은 초기부터 시네마 안에 있어 왔습니다. 이것이 종합예술작품〈5〉에 관한 생각이 우세하던 역사적 시기에 대응된다는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종합예술작품은 바그너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시네마를 바그너풍의 시네마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분명히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놀라운 도구이기도 합니다. 원한다면 지시적(déictique, 指示的)으로요. 그리고 거의 초기부터,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지가 베르토프나 에이젠슈테인, 그리고 위대한 영화감독(가령 혹스나 드레이어뿐만 아니라 로셀리니, 브레송 등)은 (서부극과 전쟁 영화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마치 그들은 시네마 안에 항상 있던 것을 다시 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사진만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사진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시네마가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사진이 나오기 위해서, 사진이 단지 거기에 그렇게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AK : 저는 내러티브가 있는 시네마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제 영화관에서 떠나겠습니다. 시네마가 더 많이 이야기하고, 그것을 더 잘할수록, 이에 대한 제 저항은 더욱더 커질 것입니다. 새로운 시네마를 구상하는 유일한 방법은 관객의 역할을 더 많이 존중하는 것입니다. 관객이 개입하여 공백(空白)과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미완성되고 불완전한 시네마'(cinéma inachevé et incomplet)를 구상해야 합니다. 완전무결하고 구체적인 구조의 영화를 찍는 대신에 이를 약화시켜야 합니다. 이때 관객을 쫓아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마도 해결책은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존재감을 갖도록 장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두가 합의에 이르러 수렴하기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산하고 차이를 만들고자 애쓰는 예술을 더 많이 신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과 반응의 다양성이 있게 됩니다. 제 영화를 지지하든, 옹호하든, 반대하든지 간에 각자가 자신만의 영화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할 수 있게끔 몇 가지를 덧붙이는데, 이런 행위야말로 '영화의 명증'(évidence du film)의 일부가 됩니다. 강대국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어떤 결함과 부족함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JLN : 공백과 관련해서, 저는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완전히 회색빛의 숏이 떠오릅니다. 저는 19살이었고, 이미 어느 정도는 이에 익숙했습니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 펼쳐진 것인지 잘 몰랐지만, 여하간 이것이 이미지라는 것은 이해했습니다. 그 순간 극장에서 제 옆에 앉아 함께 영화를 보던 노파가 소리쳤습니다. "정지 상태다!"(Ah! il y a une panne.) 여기에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한 명은 그 영화에서 이것이 공백임을 이해했지만, 다른 한 명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AK : 바로 이런 공백들, 이 "정지"의 순간들이 만들어지는 것. 이것은 제 꿈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습관을 바꾸는 데 힘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JLN : 그러나 변화의 조짐은 있습니다. 당장에 감독님의 영화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죠. 물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보러 가는 관객과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재난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감독님의 영화는 많은 이들이 관람하고 있고, 이러한 성공은 무언가를 증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관객들은 네오리얼리즘이 끝났을 때, 시네마는 끝났다고 20년 동안 말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다르도 시네마의 죽음에 관해 많이 말했죠. 심지어 너무 많이 말했죠. 그 후로 다른 시네마, 가령 중국, 대만, 한국의 시네마가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대화의 주제가 바뀐다. 풍경의 무한함을 바라보는 인물의 뒷모습이 담긴 19세기 사진에 시선이 집중된다.]

AK : 이 이미지가 흥미로운 것은 뒤에서 바라본 피사체를 추측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선도 마찬가지죠.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의 옷과 헤어스타일, 머리에 꽂은 핀과 같은 다른 요소에 입각해서 누구인지, 사회적 배경이 어떤지 추측하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무언가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고, 동시에 특정한 얼굴로 생각이 고정되게끔 강제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JLN : 이 이미지는 다른 어떤 사진이나 그림에서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는 얼굴의 뒷면을 보여줍니다. 미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s World》는 들판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뒷모습뿐입니다. 뒤에서 바라본 시선은 매번 우리의 시선으로 하여금 그 시선에 들어가게끔 만듭니다. 제 시선이 곧 그녀의 시선이 되는 것이지요.

AK : 세 명의 인물이 프레임 바깥을 바라보는 그림 하나가 떠오르네요. 제가 보기에 이 그림은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을 바라보면, 이 인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지점을 바라보게끔 이끕니다. 그림은 세 명의 여인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 다른 감정과 느낌을 환기시키죠. 두 명은 소녀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소녀들의 어머니인 것으로 보이는 나이 든 여자입니다. 저는 이들이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봅니다. 여기서 남자에 대한 세 가지의 다른 시선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소녀들은 남자를 매혹적으로, 매력적으로 바라봅니다. 나이 든 여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소녀들의 시선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인물들을 바라볼 때, 이 인물들이 우리에게 다른 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이 그림의 가치가 있습니다.
 영화감독이나 사진작가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함과 동시에 배반하죠. 그들은 거의 신의 위치에 있습니다. 즉 특정한 몇 가지만 고른 뒤에 보여주고, 숨긴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죠. 시네마는 보여주는 것만큼 시선을 제한합니다. 왜냐하면 시네마는 이기적으로 세상을 '입방체'(cube, 立方體)의 한 면으로만 제한하고 나머지 다섯 개의 면은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한 면에 접근하면 다른 면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카메라가 움직이면 더욱 볼 것이 없습니다. 제가 언급한 그림처럼 다른 곳을 가리키는 영화들이 더 창의적이거나, 혹은 더 정직한 것이죠.

JLN : 거의 반대의 해석을 해보자면, 또 다른 입방체로부터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감독님께서 시각의 입방체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그러나 현실에서도 우리는 입방체의 두세 개 면을 볼 수 없습니다. 항상 숨겨진 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도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서의 입방체에 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세 개에서 다섯 개의 면은 완전히 어둡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빛나는 면, 바로 스크린이 있습니다. 이 표면 위에서 영화감독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스크린은 동시에 다른 입방체의 면인데, 이는 또한 전체를 보여줍니다. 제가 있는 영화관의 현실은 어떤 의미로는 유예된 것입니다. 그런 뒤 제가 또 다른 현실에 들어가는 것이죠. 감독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현실 혹은 진실로 말입니다.

AK : 저희 영화감독들이 관객을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한 개의 면보다 더 많이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 즉 외부에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쳐다보기를 결심할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저희 영화감독들은 관객과 그의 시선을 강력하게 고정시킵니다.

(...)

[낭시는 영화감독이 아니고서야 현실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에 키아로스타미는 평범한 관객도 영화감독만큼의 재능이 있다고 답한다. 가령 음식점이나 집에서 말이다. 특히 키아로스타미에 따르면, 집에서 관객은 이중 커튼 너머의 이웃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짐작 및 추측해볼 수 있다. 평범한 상황에서도 멀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재현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JLN :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영화감독, 화가, 사진작가, 소설가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특히 제 시선은 영화감독들에 의해, 제가 본 영화와 사진에 의해 양성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렇게 하면 [이때 그는 머리를 돌린다.] 일종의 프레임이 생기는데, 이는 일종의 사진을 찍는 태도와 같죠.

AK : 저는 모두가 호기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인간적인 호기심은 창의적인 예술가만의 특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호기심을 표명하는 사람은 누구나 좋은 관객입니다.

JLN : 사람과 사물에 관한 주의력이 필요하겠군요.

AK : 발자크의 한 일화가 떠오르네요. 살롱에서 발자크가 눈 덮인 풍경 속에서 연기가 나는 굴뚝이 있는 농장을 표현한 그림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화가에게 농장에 있는 집에 사람이 몇 명이 살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화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발자크가 다음과 같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당신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면,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아이들이 몇 살인지, 올해가 풍년인지 그리고 딸의 결혼에 지참금으로 낼 돈이 충분하게 있는지를 물어봐야죠. 만약 당신이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그릴 권리가 없다고 봅니다."
 매우 인간적인 이런 시선은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지 않은 좋은 관객의 시선입니다. 이 관객은 다름 아닌 발자크입니다. 그러나 그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관객으로서 거기에 있었죠. 누군가가 창조한 모든 것에는 보여주지 않는 현실의 일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지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화가는 그가 보여주지 않은 것도 알아야만 합니다. 그가 쥐고 있는 작은 프레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제 영화를 당신처럼 보는 관객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부터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JLN : 감독님의 영화에서 자동차가 '시선의 상자'(boîte à regard)로서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자동차의 창문이 스크린을 이중으로 만들죠. 또한 운전 중이기 때문에 매우 자주 운전자의 시선은 똑바르게 도로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운전 중에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긴 합니다.) 그리고 감독님의 카메라는 이 남자가 우리는 전혀 볼 수 없는 방향을 향해 쳐다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감독님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사람들이 서로를 자주 바라보는지, 혹은 대부분의 경우 운전자들처럼 전방을 주시하는지 알고 싶네요. 심지어 탑승자가 운전자를 바라볼 때도 시선 교환은 거의 없습니다. 숏과 리버스 숏이 거의 없죠.

AK : 그것이 바로 제가 관객의 흥미를 끄는 방식입니다. 두 명의 인물이 함께 연기하고 있는데, 이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 사이에 시선이 교환된 다음에, 관객이 바라보고 이 교환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낼 차례가 됩니다. 관객은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됩니다. 이제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관객의 시선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컷이 개입되면, 상대방의 반응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숏의 전환은 임의적인 것도 아니고, 단순한 교체도 아닙니다. 촬영 중에 갑자기 발생했지만, 편집 중에 고쳐질 수 있는 문제는 컷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 예상될 때의 순간이 선택됩니다. 이런 세 번째 시선이 없이는, 다른 두 개의 시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창조물이 없는 창조자는 없다.'〈6〉
 이제 당신께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아랍어로 코란의 "지진 장(sourate, 章)"에 있는 한 구절을 암송한다: 
대지가 심하게 진동하고, 
대지가 그 짐을 퉁겨내고
어찌된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말할 적에,
그날 대지는 모든 소식을 이야기하리라,
당신의 주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그날 사람들은 삼삼오오 나타나서 자기의 행한 일을 나타내 보인다.
티끌 하나만큼이라도 선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본다.
티끌 하나만큼이라도 악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본다.[7]〈7〉] 
 이 장을 인용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또 어디서 이 장을 발견하셨는지요? 저한테는 이 구절이 코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이 구절을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네요. 이십여 년 전 저는 이 장을 영화로 찍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글에서 이 장을 읽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8〉

JLN : 코란을 전부 외우신 건가요?

AK : 아뇨. 이것만 외웠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신비롭고, 매우 현대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코란의 모든 지식의 부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끝, 종말의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

[낭시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봤을 때 "지진"이라는 제목이 달린 코란의 장을 떠올렸다고 말하자, 키아로스타미는 그 장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는다. 그러자 낭시는 '서양의 모든 기원 속에서 철학과 일신교의 인접성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며, 그런 맥락에서 코란을 참조했다고 덧붙인다. 키아로스타미는 "지진" 장이 코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이라며 강력한 시각적 언어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장을 영화를 찍을 때 의도적으로 떠올리진 않았다고 덧붙인다.]

(...)

AK : 종교적이든 무신론적이든, 혹은 세밀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고 있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화는 2000년 9월 25일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장-뤽 낭시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이 대화를 준비했던 통역자는 모즈데 파밀리(Mojdeh Famili)다. 프랑스어 전사(轉寫) 작업은 모즈데 파밀리와 테레사 포콘(Térésa Faucon)이 공동으로 했다.]


※원저자 주
[1] 키아로스타미는 이 단어를 프랑스어로 말한다.
[2] 쇼포크(Chopoq)는 긴 튜브를 가진 전통적인 파이프다. 시골에서 주로 농민들이 사용한다.
[3] 쇼포크(Chopoq)는 농민의 삶을 상징할 수 있는 반면 파이프는 더 큰 물질적 여유로움의 증거이다.
[4] 여기서 "알랑투르"(alentour)라는 개념은 서구적 개념인 외화면(hors-champ, off-screen)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장-뤽 낭시의 언급을 참조하라.
[5] [1]과 동일.
[6] 마울라나 잘랄루딘 루미(Maulana Jalauddin Rumi, 1207-1273)는 13세기 이란-이슬람 문명에서 페르시아어로 신비주의 시를 쓴 위대한 시인이다.
[7] 원문에서 인용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Le Koran, Sourate XCIX. Tard. de Savary. Paris, Classiques Garnier, 1960.

※옮긴이 주
〈1〉 낭시가 언급한 부분에 해당하는 유튜브 영상이 있어서 첨부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1분짜리 발췌 영상이다. ☞ 링크
〈2〉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되어있는 이 부분은 '당신'을 뜻하는 'vous'가 아니라 '너'를 뜻하는 'tu'를 쓰고 있다.
〈3〉 통상적으로 시타오(Shih-Tao, 석도, 石濤, 1642-1707)의 '일획'은 마음, 몸, 붓이 하나가 되어 성립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획'의 구체적 의미를 둘러싸고 여러 학설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조송식의 검토는 참조할 만하다. 조송식은 석도의 일획론에 대한 여러 해석을 검토하며 "일획이 『화어록』 전체와 관련되고, 『화어록』 전체가 일획에 귀속되어야, 일획의 의미가 밝혀질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조송식. “청초 석도 『화어록』의 ’일획’에 대한 의미, 그 연구사적 고찰 및 특징.” 미학, vol. 73, 2013, p. 76).
〈4〉 원문에 L'Unique Trait de pinceau라고 되어 있고, 영역본에는 Hua Yu Lu라고 되어 있다. 직역하면 전자는 '붓질의 일획', 후자는 '화어록'을 뜻한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른다.
〈5〉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은 바그너가 생각하는 예술의 이상으로서, 음악과 극 외에도 무대장치나 의상 등의 모든 요소들이 동등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론이다. (출처 ☞ 링크)
〈6〉 원문에 pas de créateur sans créateur라고 되어 있고, 영역본에는 no creator without creatures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다소 모호한 전자 대신 후자를 따른다.
〈7〉 본문에서 인용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김용선, 『코란 (꾸란)』, 명문사, 2002, pp. 638-639
〈8〉 『영화의 명증』에 수록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 관한 글 말미에 낭시는 '추가 언급'(Encore un mot)을 덧붙인다(p. 77). 거기서 낭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그의 민족문화에 대한 신중한 오마주를 바치고 있고, 또 무신론자의 위치에 서서 각각 '명증'(明證)과 '지진'(地震)이라는 제목의 코란 98장과 99장을 생각했을까요?"라고 말하며, 이에 코란 99장 도입부를 간략하게 덧붙인다. 바로 그 지점을 키아로스타미가 염두에 둔 것 같다.


-옮긴이가 덧붙인 세 가지 노트- 
(2021년 여름에 쓰고, 2022년 겨울에 편집함)
1.
영화감독과 철학자: 후자가 전자를 분석하고 비평할 수 있으며, 전자가 후자를 인용할 수도 있다. 혹은 아예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경우도 있을 테다. 이처럼 영화감독과 철학자 간의 접촉 혹은 융합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 사례. 무엇보다 들뢰즈. (여기서 들뢰즈의 시네마 관련 논문과 저서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테다.) 그다음, 고다르. 가령, 〈필름 소셜리즘〉에서 고다르는 바디우를 출연시킴과 동시에 벤야민, 데리다, 아렌트, 베르그송 등을 인용하고, 또 〈이미지 북〉에 관한 카이에 뒤 시네마 인터뷰에서 하이데거를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 볼 때, 키아로스타미와 낭시 두 사람의 만남 자체는 어색하지 않다.

2.
'기획투사'(Entwurf)를 떠올리며 망상하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장-뤽 낭시의 대화"(이하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꼼꼼하게 읽고 있노라면, 키아로스타미가 일종의 기획투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당시에 키아로스타미가 본래적 관점에 입각하여 끝(죽음)을 상정하고, '그 끝(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며'(Vorlaufen zum Tode) 미래의 자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이런저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다. 잠깐!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이 "대화"가 200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2000년, 즉 20세기의 마지막, 혹은 21세기의 시작. 여하간 키아로스타미는 1999년에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를, 2001년에 〈ABC 아프리카〉를 내놓았지만, 그 사이에, 즉 2000년에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다시, 2000년. 키아로스타미는 우간다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요청받아 디지털 캠코더를 들고 우간다로 갔다. 거기서 우간다의 비극적 현실과 아이들의 생동감을 동시에 마주했다. 그 뒤에 키아로스타미는 파리로 가서 낭시를 만났고, 바로 이 "대화"가 이뤄졌다. 기본적으로 "대화"는 1980년대 후반 이후의 키아로스타미 작품 정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이 작품은 "대화"의 거의 근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외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체리 향기〉,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역시 언급된다. (한편, 〈클로즈업〉,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카눈에서 제작한 1970, 80년대 여러 작품은 언급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화"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키아로스타미의 21세기 영화 이전에 이뤄졌다. 이제, 2022년. 현재 "대화"를 읽는 우리는 이미 키아로스타미의 21세기 영화를 거의 대부분 봤다. 가령 〈ABC 아프리카〉, 〈텐〉, 〈파이브〉, 〈티켓〉, 〈쉬린〉, 〈공인된 복제품 Copie conforme〉, 〈사랑에 빠진 것처럼〉 〈24 프레임〉, 그리고 이 영화들 사이사이에 있는 단편과 중편, (개인적으로 아직 감상할 방법을 찾지 못한) 빅토르 에리세와의 서신교환. 더 나아가 우리는 키아로스타미에 관한 다큐멘터리, 키아로스타미가 본인 영화에 관해 코멘터리 하는 에세이(혹은 페다고지컬) 필름, 키아로스타미의 강연(록)까지 살펴봤다. '21세기의 키아로스타미'를 여러 방면에서 접한 우리가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읽다 보면 즉각적으로 그의 21세기 영화들이 떠오른다. (여기서 이 "대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대두된다.) 예를 들어, '눈 덮인 산의 그림'은 〈24 프레임〉, '기차역과 여행'은 〈티켓〉, '부동의 창문'은 〈공인된 복제품〉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마지막 숏 상기), (이에 '고정된 나무 응시'까지 더한다면) 〈24 프레임〉, '회색빛 커튼'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의 타카시 옆집에 사는 여자의 시점 숏 상기) '자동차와 시선의 상자'는 〈텐〉, 이외에 이미지 전반에 관한 키아로스타미의 철학은 〈파이브〉, 〈쉬린〉, 〈24 프레임〉 등을 상기시킨다. 만약 2000년의 키아로스타미가 낭시와 만날 때 자신이 한 말을 21세기에 들어서 직접 회수 및 수행해야겠다고 미리 결심하고(즉, '선이해'(先理解)하고), 일종의 기획투사를 하고 있다고 해석, 혹은 망상을 해본다면, "대화"는 무척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3. 
'프레임'(frame)에 관한 단상: 〈24 프레임〉의 첫 번째 프레임. 뜬금없이 그림이 펼쳐진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그림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눈 속의 사냥꾼들 The Hunters in the Snow》이다. 갑자기 드는 의문. 이 영화의 제목은 왜 '프레임'인가? 만약 그림, 혹은 사진 스물네 개가 차례로 펼쳐진다면, '24 숏'(혹은 '24 픽처', '24 씬' 등)이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때, 멈춰 있는 것 같았던 '그림'이 갑자기 '살아서 움직인다.' 여기서 '그림'은 16세기 그림으로, 당연히 키아로스타미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사실, 살마 몬쉬자데(Salma Monshizadeh)의 〈프린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기억하며 Print: In Memory of Abbas Kiarostami〉를 보면, 키아로스타미는 〈24 프레임〉을 위해 브뤼헐의 그림 이외에도 몇몇 명화를 가지고 디지털 작업을 했다. 가령,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The Gleaners》과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s World》 등을 말이다. (우연이겠으나, 후자는 낭시가 "대화"에서 언급했던 작품이다.) 여러 결과물 중 최종적으로 브뤼헐의 그림만 채택된 것이다. 한편, '살아서 움직인다'는 동사는 키아로스타미의 상상의 실현을 뜻한다. 즉, 브뤼헐의 정지된 그림 속에서,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새가 날아다니며, 눈이 내리다가, 개와 소 떼가 움직인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 프레임은 일종의 페다고지컬 프레임이다. 즉, 앞으로 펼쳐질 프레임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 프레임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상상, 키아로스타미의 물질화된 감각, 키아로스타미의 규칙. 이것을 우리는 잘 지켜보고, 기억해야 한다.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이미지의 역량, 즉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으로 깊게 들어가 각자 해석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에 관해 말했다. 또한 관객도 영화감독 못지않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관객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24 프레임〉에서 키아로스타미는 단순히 이미지 큐레이터가 아니라 외려 교사에 가깝다. 스물네 개의 프레임을 통한 교육. 시선의 (재)교육. 상상의 (재)교육. 키아로스타미-교사는 관객-학생을 가르친다. 아니, '같이 바라보고, 들으며, 상상하자'고 제안한다. 제안의 가르침. 이는 강압의 가르침과 분명 다르다. 다시, 첫 번째 프레임. 이는 '한 가지 문제'(one problem)다.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만든 문제는 아니다. 외려 기출문제에 가깝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문제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상상을 디지털 작업을 거쳐 보여줌으로써 관객-학생에게 일종의 모범 답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디지털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키아로스타미는 숨기지 않는다. 사실, 키아로스타미는 여러 강의에서 시네마는 속임수에 불과하며, 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물론 이 풀이법이 절대적 참은 아니다. 단지 '두 가지 이상의 답'(two or more solutions) 중 하나의 답일 뿐이다.

 첫 번째 프레임의 그림이 기출문제였다면, 두 번째 프레임은 키아로스타미가 직접 만든 예제(例題)다. 두 번째 프레임이 시작되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면의 밝기다. 마치 카메라가 (키아로스타미가 늘 쓰고 다니던) 선글라스를 쓴 듯 화면이 어둡다. 이때 카메라는 자동차 안에 있으며, 선팅된 창문 너머의 바깥을 응시하고 있다. 한 마리의 말이 보인다. 동시에 자동차는 수평으로 움직인다. 어느 순간 자동차가 멈춰서고, 창문이 내려간다. 이제 화면이 밝아진다. 카메라는 수직선상에 있는 말을 응시한다. 한 마리의 말이 프레임 안으로 또 들어와 총 두 마리의 말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것이 애정 행각인지 싸움인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키아로스타미가 사진 찍기 전과 찍은 후의 순간을 (동시에) 포착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덧붙여 생각해야 한다. 다른 프레임에서와 달리 두 번째 프레임에서는 자동차 안에 고정된 카메라가 수평으로 움직이기에, 카메라의 존재감이 부각되어 의식된다. 이때 카메라의 시선은 감독의 시선이자 곧 관객의 시선이다. 시선의 방향이 수직축 위에 있다고 한다면, 시간의 전과 후, 즉 타임라인은 (카메라의 이동 방향이기도 한) 수평축 위에 있다. 수직축과 수평축의 교차 지점은 바로 자동차다. 요컨대, 두 번째 프레임의 ('카메라를 든') 자동차는 시각의 수직축과 시간의 수평축이 공존하는 장소, 즉 '시각의 상자'이자 '시간의 상자'가 된다. 두 번째 프레임은 첫 번째 프레임처럼 기존에 있던 그림을 재료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의 상상, 키아로스타미의 조작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기에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관객-학생은 두 번째 프레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문제 구성 원리의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그런 뒤 이 예제에서 얻은 실마리를 바탕으로 변형문제를 풀어야 한다. 세 번째 프레임부터 그 이후 프레임이 변형문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직접 풀어야 하는 문제. 이런 문제 풀이 과정은 일종의 시청각 및 상상력 훈련이긴 하지만, 단순히 비슷한 문제의 나열을 통한 반복 학습 훈련은 아니다. 스물네 개의 문제는 '무질서하게'(disorderly) 배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의도된, 혹은 '정돈된'(orderly) 문제의 순서까지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국 〈24 프레임〉은 키아로스타미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homework)다. 이 숙제는 정해진 답을 찾는 데 목표가 있지 않다. 정해진 답? 혹은 고정된 답? 비슷한 의미의 어떤 표현이어도 좋다. 사실 이런 유의 답은 기본적으로 '수동성'을 전제한다. '숏'(shot)도 마찬가지다. '찍힌 것'으로서의 '숏'.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숏'이라고 부를 때, 이는 '이미 찍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찍힌 것'을 보고 '숏'이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찍(고 있)는 것'과 '찍힐 것'은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미'라는 부사와 '찍힌'의 ('-히-'에서 기인한) 수동성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 자율성이 박탈된 고정태(固定態)라는 측면에서 일말의 폐쇄성과 완전함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키아로스타미가 〈24 프레임〉에서 자신이 낸 문제를 왜 '숏'이 아니라 (말 그대로 틀, 뼈대를 뜻하는) '프레임'(frame)으로 명명했는지 감지할 수 있다. 잠깐! 이때 '프레임'을 감히 '장'(場)으로 이해해도 될까? 즉, 키아로스타미에게 프레임은 (영화와 관객의 접촉면으로서) 일종의 '교육의 장'이자 '상상의 장'이다, 와 같은 언사를 덧붙일 수 있을까? '장'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장소, 영토, 무대와 같은 뜻이 강조되어 있다. (참고로 '場'은 '土'(흙 토)자와 '昜'(볕 양)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즉, 넓은 마당에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주의! 햇볕의 내리쬠의 영역은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장'은 단순히 특정 장소, 영토, 무대만을 뜻하지 않는다. 외려 불완전한 틀(혹은 경계선으)로서의 어떤 장소, 영토, 무대에 가깝다. '불완전한 틀(혹은 경계선)'이란 특정 크기에 고착화되거나 국한되지 않는 유동적인 어떤 상태를 함축한다. 단적으로 틀(혹은 경계선)의 크기는 스크린의 크기와 무관하다. 더욱이 프레이밍하는 카메라가 실제 있었을 그 공간의 크기와도 무관하다. 이는 외려 관객의 머릿속의 유연성 및 확장성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컨대, '장'으로서의 '프레임'은 불완전한 틀(혹은 경계선)을 지칭하며, 무언가가 '오고 가는' 유동적 상태를 전제한다. 아니, 전제해야 한다(고 키아로스타미는 생각한다.). 기존의 '숏'은 그런 상태를 전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와 관객 간의) "대화적 몽타주"(유운성)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키아로스타미가 총 스물네 개의 이미 그려진 것과 이미 찍힌 것을 디지털 조작으로 살려낸 뒤 '프레임'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 '프레임' 안에 '오고 가는' 무언가가 우리의 눈과 귀로 감지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대화"에서 키아로스타미가 언급한 "미완성되고 불완전한 시네마"(cinéma inachevé et incomplet) 개념을 상기하고 싶다. 이미 매니블은 키아로스타미의 이 "불완전 영화"(films incomplets) 개념을 두고, 상영이 끝난 뒤에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계속 발전되는 그런 영화다, 라고 적확하게 말한 바 있다. 매니블의 이 말을 내 식으로 조금 바꾸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프레임(혹은 몽타주)은 계속된다." 결국 키아로스타미의 '프레임'은 '오고 가며'의 상태를 전제한 '불완전 영화'를 염두에 둔 개념이다. 그래서 키아로스타미의 마지막 영화의 제목은 '24 숏'(혹은 '24 픽처', '24 씬' 등)이 아니라 '24 프레임'이다.

〈파이브 Five Dedicated to Ozu〉(2003)를 앞에 두고 끄적인 다섯 개의 노트: 5 온 파이브

[1]


(주절주절하는 중...) 

...누군가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주저 없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주저 없이 〈가배시광(珈琲時光) Café Lumière〉(2003)이라고 말할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도 아니고 왜 〈가배시광〉인가? 그 이유를 여기서 소상히 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 이유를 밝히자면, 〈가배시광〉은 '대만 감독'이 '도쿄 전철'을 집요하게 따라가고, 지켜봄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혹은 찾아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배시광〉은 오즈의 영화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가배시광〉은 허우샤오시엔이 오즈 탄생 100주년에 맞춰 그에 대한 헌정영화로서 만든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허우샤오시엔은 〈가배시광〉 최초 공개를 도쿄의 유라쿠초 아사히 홀에서 오즈의 출생일이자 사망일인 12월 12일에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에 키아로스타미도 오즈에게 바치는 영화를 남겼다. 바로 〈파이브 Five Dedicated to Ozu〉(2003)라는 영화를 말이다. 〈파이브〉는 〈ABC 아프리카 ABC Africa〉(2001)와 〈텐 Ten〉(2002) 다음으로 키아로스타미가 내놓은 영화다. 즉, 〈파이브〉는 키아로스타미의 2000년대 세 번째 영화다...

...키아로스타미가 어떤 영화감독을 위해 헌정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어색하다. 왜냐하면 키아로스타미는 "만약 내 영화와 로셀리니의 영화 간에, 그리고 아마 내 영화와 드레이어, 브레송, 오즈의 영화 간에 유사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 작품의 형식적인 특징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는 그저 같은 각도로 삶을 바라볼 뿐이다."라며 "어느 한 영화감독이 내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말 뒤에 그는 "고다르가 내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잠깐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또 한동안 히치콕을 거장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그의 영화가 너무 인위적이고 허구적이라고 생각한다."라고도 말했었다. 하지만 2003년 오즈에 관해 말하는 심포지엄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오즈는 나의 변호사"라고 말하며 그의 영화가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프레임에서 프레임으로 흐른다는 느낌"을 주기에 그를 "존경하게 됐다."라고 분명히 고백했다. 이에 그는 (오즈의 정신을 이어받아)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라며 "나의 영화 〈달과 연못〉[이 영화는 아마도 〈파이브〉의 마지막 프레임을 지칭하는 것 같다.]을 오즈 감독과 '본다는 것'에 충실한 관객에게 바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키아로스타미를 규정할 수 있는 여러 명사들이 있겠지만, 나는 주로 그를 교육자, 주석가, 혹은 실타래 푸는 자 등으로 규정한다. (실타래? 이는 〈페르시안 카펫 Persian Carpet〉(2007)이라는 옴니버스 영화에 실린 키아로스타미의 6분짜리 단편 ‘다가갈 곳이 있을까?(Is There a Place to Approach?)’를 보면서 떠올린 단어다.) 키아로스타미는 자기 영화를 교재 삼아 마치 교육자, 주석가, 혹은 실타래 푸는 자처럼 다시 영화를 찍었다. 나는 키아로스타미의 이런 유의 영화를 내 식대로 '댓글달기(talking/filming a commentary)' 영화라고 부른다. 키아로스타미의 소위 '댓글달기'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10 온 텐 10 on Ten〉(2004)일 것이다. 〈10 온 텐〉은 IMDb에 키아로스타미 필모그래피 중 한 작품으로 버젓이 올라와 있으며(사실 이 작품은 2004년 제5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에 초청된 바 있다.), 또 하스미 시게히코가 "비디오로 찍은 작품 중에 정말 대단한 작품" 중 하나로 골랐기 때문이다. (참고로 하스미는 두 편을 골랐는데, 나머지 한 작품은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No Quarto da Vanda〉(2000)이다.) 〈10 온 텐〉은 키아로스타미가 자동차 안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에, 주로 운전하면서 자신의 연출방식과 〈텐〉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영화다...

...사실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에도 댓글을 달았다. 이 '댓글달기' 영화는 〈어라운드 파이브 Around Five: Abbas Kiarostami's Reflections on Film and the Making of Five〉(2005)라는 제목으로 〈파이브〉 DVD에 서플먼트로 수록되었다. (〈어라운드 파이브〉는 〈파이브〉 DVD 여러 판본 모두에 수록된 것으로 확인된다.) 나는 〈어라운드 파이브〉를 유튜브에서 8분짜리 발췌본(☞ 링크)으로 처음 접했기에, 원래 러닝타임이 그 정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라운드 파이브〉의 실제 러닝타임은 대략 50분 정도로 거의 본편(75분)에 맞먹는 수준이다...

...그러고 보니 키아로스타미는 이런 '댓글달기' 작업을 카눈 시절부터 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키아로스타미는 70년대 이후에도 카눈 기반으로 영화작업을 했다. 가령,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the Friend's Home?〉(1987), 〈숙제 Homework〉(1989),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Life, and Nothing More...〉(1992)가 모두 카눈 작품이다. (물론 '스크린으로서의 세계: 키아로스타미의 버추얼리티'(21.05.16.)라는 제목의 유운성의 강연에 따르면, 이 세 작품은 카눈뿐만 아니라 다른 제작사로부터 투자를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야말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댓글달기' 영화 아닌가? 또한 (전무후무한 걸작) 〈올리브 나무 사이로 Through the Olive Trees〉(1994)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대댓글달기' 영화 아닌가? 키아로스타미는 정말 실타래를 풀어나가듯이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지속적으로 확장했던 작가였다...

...이런 식으로 '댓글달기'라는 표현을 광의로 해석한다면, 키아로스타미의 '댓글달기' 영화의 한 정점은 아마도 그가 빅토르 에리세의 영상-편지에 답장의 형식으로 보낸 영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키아로스타미와 에리세 간의 서신교환 작품을 감상하지 못했다.) 다른 정점은 아마도 〈파이브〉의 또 다른 '댓글달기' 영화 〈24 프레임 24 Frames〉(2017)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여러 번 '불완전 영화'를 얘기한 바 있다. 가령, 키아로스타미는 장-뤽 낭시와의 대화에서 “관객이 개입하여 공백(空白)과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미완성되고 불완전한 시네마(cinéma inachevé et incomplet)'를 구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개념을 두고 다미앙 매니블은 "불완전 영화란 상영이 끝난 뒤에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계속 발전되는 그런 영화다."라고 적확하게 지적했다. 결국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믿었던 작가였다. 그렇다면 우리 관객은 키아로스타미의 믿음에 따라 그저 그의 영화를 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키아로스타미 본인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키아로스타미는 자기 영화에 댓글달기를 감행한 것일까...

...키아로스타미는 누구보다 관객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했던 작가였던 것인가? 그래서 '댓글달기'를 통해 관객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해답을 주었던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유운성이 지적한 키아로스타미의 교육학적 전략(pedagogical strategy)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유운성은 키아로스타미의 버추얼리티는 영화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탄로 나도 계속 펼쳐진다고 말했다. 즉, 관객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의 비밀을 알더라도 스크린적 세계의 경계가 끝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페다고지이자 버추얼리티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이어받자면, 키아로스타미는 의도적으로 (유운성의 표현인) 보충적 에세이 필름, 즉 '댓글달기' 영화를 제작하여 본편의 비밀을 가감없이 밝혔는데, 이는 우리 관객의 감각을 (재)교육하기 위함이었다. 감각의 (재)교육? 바로 이 (재)교육을 통해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세계의 버추얼리티는 붕괴하지 않고, 오히려 증식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극장의 스크린에서뿐만 아니라 관객의 머릿속에서도 계속 상영되도록 불완전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不完全) 영화'는 '미완(未完)의 영화'나 '저질(低質)의 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타래를 풀고, 그 실을 붙잡을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실타래를 푸는 자는 일차적으로 감독이다. 그 풀어진 실을 붙잡고 미로를 빠져나가는 자는 관객이다. 그런데 이 미로는 계속 증식한다. 기존 형식의 미로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또 다른 미로판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관객은 붙잡고 있던 실을 묶어 자기 실타래를 만든 뒤 그것을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불완전 영화란 관객의 머릿속에서 계속 발전되는 그런 영화다."(매니블)라는 언사를 내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결국 감독의 '실타래풀기' 작업은 관객에게 실을 붙잡을 '기회' 혹은 '장(場)'을 마련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즉,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이나 해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그 미로를 빠져나갈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만들고, 또 그 능력을 스스로 계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타래풀기' 작업은 단순히 영화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풀어진 실을 붙잡고 더듬더듬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세계/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영화에서 다른 영화, 사진, 시 등에 다다르게 된다. 결국 '실타래풀기' 작업의 궁극적 목표는 '영화에서 벗어나 영화(적 체험) 바라보기'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키아로스타미식 교육학적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키아로스타미는 자신만의 교육학적 전략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너머로 (들뢰즈식의) '사유'를 하게 할 뿐 아니라 (발을 딛고 서 있는 물리적) '장(場)'까지도 이동하게끔 인도했던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감독일 뿐만 아니라 사진작가이자 하이쿠 시인이기도 했다. 특히 키아로스타미는 타르코프스키처럼 하이쿠를 즐겼으며, 또 직접 썼다. 그런데 하이쿠란 무엇인가? 각 행마다 5, 7, 5음(총 17음)으로 구성된 일본 정형시의 일종이다. 바쇼에 따르면, "하이쿠는 현재의 일, 눈앞의 일을 읊는 것"이다. 즉, 하이쿠는 통상적인 시조와 달리 자연물을 이념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쿠는 단순히 암호 해독하듯 해석하는 방식으로 향유되지 않는다. 하이쿠는 아이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하이쿠 향유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독자의 능력이다. 가령, 똑같은 시구를, 아이와 철학자와 물리학자는 각기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하이쿠 세계에서 동일한 시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며, 해석의 함의가 넓으면 넓을수록 대단한 작품이 된다...

...키아로스타미는 자기 영화가 하이쿠가 되기를, 혹은 닮기를 바랐던 것 같다. 물론 이 말은 키아로스타미가 (수사적 의미에서) '시적인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저 말에서 하이쿠는 '시적인 리듬'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하이쿠는, '불완전 영화'를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불완전 시' 정도로 바꿔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독자가 개입하여 공백과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시 말이다. 그런데 하이쿠 독자가 하이쿠를 '해석'하고, 영화 관객이 영화를 '상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독자나 관객이 주체의 자리에 있으면서 하이쿠나 영화를 객체의 자리에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과 '상상'은 하이쿠와 독자가, 영화와 관객이 '공호흡(共呼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의 명증 L'Évidence du film』에서 낭시가 이미 적확하게 지적했다시피 결국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영화에 '접촉'하게끔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접촉? 이는 곧 『무위의 공동체 La Communauté Désœuvrée』를 비롯한 낭시의 여러 저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외존(外存; exposition)'이나 '열림'과 같은 개념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용어다. 이 접촉이라는 용어를 나는 내 식으로 '공호흡'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접촉과 공호흡을 여기서 더 상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백하자면, 아직 낭시의 철학에 관한 공부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 대한 개인적 생각은 하이데거와 낭시의 철학을 더 공부한 뒤에 훗날 정리해보고자 한다...

...때때로 나는 21세기 영화의 '제로 이어(zero year)'는 다름 아닌 2003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2003년에 나온 두 편의 영화 〈가배시광〉과 〈파이브〉로부터 출발해서 21세기 영화를 다시 사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오즈는 중요하다. 정확히는, 오즈가 아니라 오즈의 영화가 중요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오즈의 영화에 담긴 "화면 안의 평등한 요소끼리의 조화"(코스타)가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재)사유할 때, 반드시 (오즈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야마나카 사다오(의 영화)를 소환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야마나카는 마르크스로 무장하여 고다르보다 더 일찍이 '필름 소셜리즘'을 꿈꿨던 작가다.) 이쯤에서 앞서 인용한 키아로스타미의 말—"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을 내 식으로 수정할 수 있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보고 듣는 것이다." 〈가배시광〉과 〈파이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향이미지였기 때문이다. (한편, '음향이미지'와 관련하여 즉각 떠오르는 한 감독이 있다. 바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5살 형인 오즈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던 올리베이라가 바로 오즈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토킹 픽처 Um Filme Falado〉(2003)를 내놓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흥미롭게도 2010년대 들어서 허우샤오시엔과 키아로스타미는 모두 음향이미지의 중요성을 각각 〈자객섭은낭(刺客聶隱娘) The Assassin〉(2015)과 〈24 프레임〉을 통해서 드러낸 바 있다. 전자는 '섭은낭(섭(聶):들으면서/은낭(隱娘):숨은 여자)'이라는 이름을 따라 시점이 아닌 청점(聽點) 위주로 전개되는 영화이고, 후자는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에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다. (특히 〈24 프레임〉에서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소리는 바로 다섯 번째 프레임의 '총소리'다. 왜냐하면 스물네 개의 프레임을 관통하는 하나의 모티브가 바로 '사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번째 프레임은 사냥꾼을 그린 그림이지 않았던가...)

...계속 주절주절하다 보니 하마구치 류스케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문득 떠오른다. 하마구치는 자신의 관심이 '이미지'에서 '사운드'로 전이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아피찻퐁의 신작들—〈침묵 Silence〉(2020), 〈메모리아 Memoria〉(2021) 등—을 체험하는 데 있어 집중해서 깨워야 하는 감각은 다름 아닌 '청각'이었다. '듣는다'라는 행위의 의미가 영화에서, 혹은 영화적 체험에서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부터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각적 경험을 텍스트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이것이 심히 고민이 되는데...


[2]


2-(1) 나는 삼수 끝에 2016년 3월 철학 전공으로 학부에 입학했고, 2017년 9월에 불어불문학을 제2전공으로 택했으며, 2022년 2월에 학부를 졸업할 예정이다. 그런데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지난 나날을 되돌아볼 때 '나는 정말 철학과 불어불문학을 공부한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점점 '공부(工夫)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몇 글자 끄적이게 되었다.

2-(2) 저 거창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현시점에서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은 '공부'라는 용어가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국립국어원이 인용한 자료(박숙희,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 책이있는마을, 2004)에 따르면, '공부'는 원래 불교에서 말하는 '주공부(做工夫)'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공부'란 '불도를 열심히 닦는다'의 의미다. 그렇다면, '공부'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다'의 의미인가? 일면 타당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다음으로 국어사전에 따르면, '공부'는 곧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다. 일단 사전적 뜻을 이어받자면, '공부'에는 두 개의 계기가 함축되어 있다: '무언가를 배운다'가 일차적 계기이고, '배운 것을 익힌다'가 이차적 계기다. 이런 공부의 두 개의 계기의 의미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을 끌어들여 '이성(λόγος)'이나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의 관점에서 따져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여기서의 관심 주제가 아니다.

2-(3) '무언가를 배우고 익힘'의 의미로 '공부'를 이해한다면, 대중적으로 많이 쓰이는 한 언사는 다소 이상하게 느껴진다. 바로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부'는 '잘한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론 이 '잘한다'가 '열심히 한다', 혹은 '집중해서 한다'의 의미라면, '공부'가 '잘한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우리는 '잘한다'를 저런 의미들로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저런 의미들로 사용한다면 대부분 조롱 조인 경우가 많을 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하는 것인가? 복습, 예습을 철저히 하면 잘 배우고 익히는 것인가? 나는 여전히 '공부'가 '잘한다'의 대상이 (대체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4)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는 '공부'의 사전적 뜻과 큰 관련 없이 사용된다. 차라리 '공부를 잘한다'는 일종의 관용어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다.' 떠올려 보면, 보통 우리는 시험에서의 고득점자들, 특히 상대평가 시험에서의 고득점자들을 보고 공부를 잘한다고 말한다. 물론 고득점의 기준은 시험의 종류에 따라 다를 테다. 어떤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아야 1등을 할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시험에서는 30점만 맞아도 1등을 할 것이다. (말하고 보니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다'보다 '높은 등수에 들다'가 좀 더 적합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2-(5) 흥미로운 것은 어학시험이나 자격증시험 같이 절대평가 시험의 경우 누군가 고득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토익, 토플, 델프-달프 등의 어학시험 성적이 높은 사람을 두고 '영어/프랑스어를 잘한다'라고 말하지, '영어/프랑스어 공부를 잘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운전면허시험을 비롯한 여러 합·불(P/F) 시험의 경우 합격했을 때 '특정 분야를 숙지한다'라고 말하지 '그 분야에 관한 공부를 잘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2-(6) 사람들이 상대평가 시험과 절대평가 시험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두 시험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다'라는 시험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두 시험은 동일하다 할 수 있지만, 상대평가 시험에선 누군가를 이겼을 때 유의미하고, 절대평가 시험에선 주최 측에서 제시한 커트라인을 넘겼을 때 유의미하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능력 평가'에 좀 더 집중하는 절대평가 시험이 시험의 본질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상대평가 시험과 절대평가 시험 간에 어떤 위계도 있지 않으며, 오히려 '두 시험 모두 정말 수험생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수단인가'와 같은 물음을 제기하고 싶어진다.

2-(7) 결국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는 상대평가 시험에서 누군가를 짓누른 자, 즉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남발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경쟁에서 이기는 것, 그 결과로 소위 명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것, 더 나아가 고위직 공무원이 되거나 전문직—특히 '-사'가 붙은 직업들—에 종사하는 것은 '공부'에 관해서 드러내 주는 것, 혹은 증명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은 '시험공부'이지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8) '시험공부'와 '공부'는 다르다. 이 두 항의 관계는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서 밝힌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사람들 중 대부분은 '시험공부'를 '공부'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시험공부'를 하는 데 쓰면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 '시험공부를 통해 배우고 익힌 것'은 시험이란 수단에 대부분 귀속되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에서 '공부'는 사실 '시험공부'를 의미하며, 애초에 저 말은 그 자체에 어폐가 있기에, '공부'를 이해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2-(9) [(2)로 회귀] '공부'의 일차적 계기인 '무언가를 배운다'에서 '무언가'는 일종의 빈칸으로서 이 안에 지식, 삶의 태도 등 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있다. 한편, '배운다'는 '내 것으로 만든다'의 의미다. 그리고 이차적 계기인 '배운 것을 익힌다'에서 '익힌다'는 '내 신체에 각인하다'의 의미다.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배운다'라는 행위다. 무언가를 '배워야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으로 만듦'의 의미로서 '배움'의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보는 방식'과 '듣는 방식'—가 있다. 물론 '감관 일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공부'에 내포된 '배움'의 방식은 '보는 방식'과 '듣는 방식'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텍스트나 이미지를 보면서,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배움을 얻기 때문이다.

2-(10) '공부'의 근본의미는 '보고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배움'이다. 이때 '보고 들음'은 그저 반응(reaction)으로서 '인상(impression)이나 이미지(image) 등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성을 띠는 행위(action)로서 '자기시간경험'이다. '공부'하는 자는 보고 듣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물리적인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일종의 주관적인,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듦을 경험한다. 이 빠져듦의 시간, 즉 몰입의 시간 속에서 '공부'하는 자는 무언가를 배우는데, 이때 무언가의 내용을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무언가에 퇴적된 시간을 배우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무언가의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사유의 흐름(flow)을 배우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자기 기억의 밑면과 그 무언가의 기억의 밑면이 '접촉'하여 형성된 기억의 공동의 평면에서부터 서로의 퇴적된 시간이 상호침투하고 융합되어 새롭게 증축된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증축된 자기만의 시간을, '공부'하는 자는 자기 신체에 각인한다. 결국 '보고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배우고 익힘'인 '공부'는 연쇄적 계기들의 집합으로서, 단순히 고정태적 명사가 아니라 유동태적 동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단어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어떤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2-(11) 사실 한자 결합어 '공부'는 원래부터 '시간'을 의미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중국어 사전에서 '工夫(공부)'를 검색해보면 '시간'이 첫 번째 의미로 나온다. 여러 가설 중 하나를 따르면, '공부'는 '장인 공'과 '지아비 부'가 결합한, 즉 대장장이가 망치질하는 형상에서 기인한 단어다. 그래서 한동안 '공부'는 '노역'을 의미했는데, 노역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인지 점차 그 뜻이 변화하여 '시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한자 결합어로서 '시간'을 의미하는 '공부'가 우리나라에선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의 뜻을 갖게 된 것이다.

2-(12) 이제 던져져야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공부에 내재된 시간성을 우리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나라에서 '공부'라는 단어가 '시간'의 의미로 통용되진 않는다. 그런데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의 공부만 하는, 그래서 공부가 현생을 집어삼키는 소위 공부의 나라에서 '공부'에 내재된 시간성을 망각하는 것은 문제다. 이를 곧 '공부망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테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란 삶 그 자체인데, 대다수의 학생은 '공부'가 무엇인지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있다. 이때 공부란 당연하게도 '시험공부'다.

2-(13) 그런데 이런 말을 끄적이고 있는 나도 여전히 '공부'가 무엇인지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있다. 다만, 이 글을 끄적이면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은 (a) '공부'는 '시험공부'와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b) '공부'는 '보고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배움'을 근본의미로 갖고 있으면서 '시간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더 나아가기 위해, 즉 '공부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 안에 내재된 '시간성'을 복권하여 논의의 장으로 소환해야 한다.

2-(14) 시간성? 나는 '시간성'을, 하이데거의 용어—'Zeitlichkeit'—를 염두에 두고 쓰고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제1부의 제목을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이라고 정한 뒤 현존재(現存在; Dasein)를 '시간성'으로 환원하여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하이데거에게서 '시간성'이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적 성격을 의미하며, 무엇보다 현존재의 실존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이기상 교수의 글 참조 ☞ 링크)

2-(15)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답하기 위한 예비고찰은 여기까지다. '공부'는 어쩌면 인간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이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ζῷον λόγον ἔχον)'이라는 규정과는 다른 의미다.) 물론 아직 확언할 수 없다. '공부' 안에 내재된 '시간성'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하이데거의 사유의 흐름을, 더 나아가 '시간'에 대한 베르그송(⇢들뢰즈)과 화이트헤드의 상반된 사유의 흐름을 배워야 한다. 결국 '공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또 공부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생기게 되는데...


[3]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배우고 찍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영화연출/기획(제작) 전공이 있는 대학원으로의 진학이다...

...작년에 나는 두 개의 대학원에 지원했었다. 한 곳은 석관동 소재의 K대고, 다른 한 곳은 죽전동 소재의 D대다. K대의 경우 학교가 서울에 있고, 또 학비가 다른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 때문에, D대의 경우 장편영화제작 과정을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고, 또 실제로 장편영화를 연출/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K대와 D대의 입시방식은, 두 학교가 서로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이 글은 두 학교의 입시 과정 전반에 관한 리뷰다. 

먼저 K대는 입시 과정이 크게 '예비심사'와 '1차시험'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예비심사는 사실 서류심사를 뜻하며, 1차시험은 필기시험와 구술시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K대는 서류심사를 통해 지원자의 60% 정도는 탈락시킨다. 따라서 서류심사를 통과한 40% 정도만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을 칠 수 있다. 내가 지원했던 3년제 과정의 예비심사에서 심사하는 서류는 기본서류(졸업예정증명서, 출신대학성적증명서), 자기소개서, 장단편 작품계획서다. 2년제 과정은 여기에 추가로 작품 포트폴리오와 그 해설서를 제출해야 한다. (제출해야 하는 여러 서류 중 기본서류는 말 그대로 참고서류다. 그런데 대학원 입시에서, 기본서류를 통해 드러나는 전적대학 간판과 학점은 단순히 참고자료가 아니라 꽤 유의미하게 성적에 반영된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적어도 서류심사에서 말이다.)

D대도 입시 과정이 크게 '서류전형'과 '면접' 두 개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D대는 기본서류를 제외하고 별도의 서류 제출을 요구하지 않는다. 즉, 졸업예정증명서와 출신대학성적증명서만 내면 되고, 자기소개서, 장단편 작품계획서, 작품 포트폴리오 등은 '공식적으로는' 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행정실에 문의한 결과, 별도의 서류를 제출한다면 교수님이 읽어는 보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자기소개서만 추가로 제출했다. 물론 이렇게 추가로 제출된 별도의 서류는 성적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지원자들은 어떤 필터링 없이 모두 구술시험을 볼 수 있다.

K대와 D대에 공통으로 제출했던 서류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볼까 한다. 그런데 기본서류인 졸업예정증명서와 출신대학성적증명서는 딱히 특기할 것이 없다. 이 두 개의 서류는 재학 중인 학교 행정실이나 포털에서 간단히 출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 학점(평점평균)을 정보 제공 차원에서 공개하자면, 7학기까지를 기준으로 4.5 만점에 4.32였다. 다음으로, K대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와 장단편 작품계획서를 얘기해보자. 이 두 개의 서식은 K대 입학정보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다. 나는 자기소개서와 작품계획서를 작년 9월 초부터 작성하기 시작해서 K대 원서접수 기간인 10월 중순쯤에 완성했다. 거의 한 달 반 정도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것이다. 여담으로, 작년 10월 초중순은, 부산에서 며칠 동안 체류하면서 영화를 보고, 줌(Zoom)으로 학부 수업도 듣고, 자기소개서와 작품계획서를 철학과 친구들과 함께 퇴고하는 데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였기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자기소개서의 경우, K대는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또한 3년제 과정은 분량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자유롭게 내 식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나는 자기소개서의 내용을, '(1) 성장 과정', '(2) 지원 동기', '(3) 대학 재학 중 활동(교내, 교외 구분)', '(4) 관심 영화', '(5) 영화론: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고 싶은가?', '(6) 미래 계획' 총 여섯 개의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채웠다. 특히 힘을 주었던 것은 (4)와 (5)였다. 먼저 (4)의 경우, '영화란 무엇인가'와 '영화에서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에 어떤 답을 주는 영화 네 편을 적었다. 특히 전자의 물음과 관련해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별자리〉(2018)와 〈메모리아〉(2021)를, 후자의 물음과 관련해선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역사 수업〉(1972)과 장-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1988-1998)를(을) 적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K대 영화연출/기획 전공을 지원하면서 자기소개서에 저런 영화들을 적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5)의 경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불완전 영화' 개념을 상술하며, 그런 유의 영화를 지향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감정과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론 중 발화 행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소위 '토킹 픽처'(A Talking Picture)의 방법론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 외에 (1), (2), (3), (6)은 자기소개서 전반적인 톤앤매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영화'라는 주제와 연결 지어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글을 다 쓰고 난 뒤에 확인한 총 글자수는 대략 9,500자 내외였다. 학교가 제공하는 자기소개서 서식의 요구 조건(신명조, 12포인트, 줄 간격 160)을 모두 맞추었을 때 총 페이지수는 7페이지였다. 물론 이는 프로필(학력 사항, 경력 사항, 특기 사항) 한 페이지를 포함한 페이지수다.

다음으로 장단편 작품계획서의 경우, 자기소개서와 마찬가지로 형식에 제한은 없으나 분량은 제한이 있다. 단편은 트리트먼트를, 장편은 시놉시스를 작성해야 하는데, 특기할 것은 모집요강에 단편은 '1편 이상', 장편은 '1편'이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아이디어와 시간만 있다면 단편은 여러 편의 트리트먼트를 작성해서 제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단편 1편의 트리트먼트와 장편 1편의 시놉시스만 작성했다. 학교가 제공하는 작품계획서 서식은 크게 단편 트리트먼트 파트와 장편 시놉시스 파트로 양분화되어 있다. 전자의 경우 '로그라인(한 문장)', '시놉시스(1/2 페이지 이내)', '트리트먼트(2 페이지 이내)'로 구성되어 있고, 후자의 경우 '로그라인(한 문장)', '기획의도(1/2 페이지 이내)', '시놉시스(2페이지 이내)'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카테고리 중 나는 '시놉시스'를 세분화하여 그곳에 '제목', '등장인물', '줄거리'를 작성했다. 내가 계획한 작품을 여기서 상술할 수는 없겠으나, 한마디만 하자면 장단편 모두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하며 '2014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에 '수험생'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11월 초 발표된 K대 서류심사 결과는 합격이었다. 다음 단계인 1차시험은 11월 중순 즈음에 잡히는 바람에 나는 짧은 시간 동안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사실 나는 영화과 입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서류심사 합격 이후에 짧게나마 잠원동 소재의 영화과 입시학원에 등록해 다니면서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특히 학교 차원에서 필기시험 기출문제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학원을 통해서야 비로소 기출문제 몇 개를 얻어 풀어볼 수 있었다.

기출문제 몇 개를 풀면서 파악해본 결과, K대 필기시험은 크게 두 개의 유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제재 분석을 기반으로 '시놉시스 작성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작성한 시놉시스 중 핵심 장면을 영상 언어로, 즉 시나리오 형식으로 묘사하기'이다. 제재는 보통의 경우 단편영화, 기사지문, 제시어 등의 형태로 제시된다. 그런데 K대는 매년 필기시험 문제를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변형해서 낸다. 가령, 2020년의 필기시험은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들로 구성됐다: '나를 찍은 사진 이미지 그리기'(1번), '이 이미지의 상황 설명하기'(2번), '이 상황이나 장면이 영화화되기 힘든 이유 대기'(3번), '이 장면을 바탕으로 장편 시놉시스 작성하기'(4번) 총 네 문제가 출제됐다.

몇 차례 기출문제를 풀고 첨삭을 받으면서 느꼈던 것은 K대 필기시험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것이다. 사실 제재분석과 이야기구성 문제에 어떤 답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K대 교수들의 입맛에 맞는 답은 분명 있는 것 같았다. 즉, 그들은 고전적인 스토리텔러의 범주 내에서 창의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잘하지도 못했고, 더욱이 K대 교수들이 원하는 '창의성'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느끼기에) 준비가 덜 된 상태로 필기시험을 보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 시험장에서 마주한 문제는 학원에 다니며 준비한 것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적어도 단편영화나 기사지문 같은 분석할 제재가 제시됐다면, 작년에는 그저 IMDb 역대 고평점 영화들 제목 몇 개 나열된 게 끝이었다. 영화들에 관한 상세한 설명도 없었다. 즉, 학교에서 제시한 리스트에서 감상한 영화가 없으면 아예 답을 적을 수 없는 구조로 문제가 출제됐다. (물론 대부분 유명한 영화들이었기에 지원자 중 답을 적지 못한 사람은 없었을 테다.) 

시험의 주제는 '리메이크'였다. 사실 K대는 2010년대 초에 단편영화를 보여 주고, 그 영화를 각색하여 시놉시스를 작성하게 하는 문제를 이미 낸 적이 있기에 리메이크 자체는 낯선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작년에 출제된 리메이크 문제는 기존의 리메이크 문제와 결이 달랐다. 기출문제에선 '자유로운 각색'을 허용했다면, 작년 문제에선 '한국 상업영화로의 리메이크'로 제한을 두었다. 무엇보다 작년엔 통상적인 이야기구성 문제가 출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만들 리메이크 영화에 필요한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한 소속사 대표를 만나 그를 설득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문제가 출제됐다. 이것이 총 세 문제 중 마지막 문제였다. 

나는 리메이크할 작품으로 〈위플래쉬〉(2014)를 골라 나름의 답을 작성했다. 그런데 필기시험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문점들이 여태껏 남아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볼까 한다. 첫째는 '리메이크할 작품들에 대한 의문'이다. 먼저 리메이크할 작품들의 출처 혹은 기준이 왜 'IMDb 역대 고평점 리스트'여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제시한 영화들의 제작국가의 9할 이상이 '미국'인 것도 의문이다. 만약 지원자의 개성, 창의성, 안목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싶다면, 아예 리메이크할 작품을 각자 원하는 국가와 감독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작년에 학교 측에서 분석할 제재를 아예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제목 나열은 제재 제시가 아니다.) 사실 미국영화 말고 한국영화도 리메이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만희의 〈만추〉(1966)는 국내에서만 세 번(김기영, 김수용, 김태용) 리메이크되지 않았던가.

둘째는 '문제의 조건에 대한 의문'이다. 바로 '한국 상업영화로의 리메이크'라는 조건 말이다. K대는 한국에 있는 학교니까 '한국'이란 조건은 당연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상업영화'로 굳이 제한을 걸어두었는지가 의문이다. 영화연출이나 기획(제작) 과정에서 상업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예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운영되는 학교에서 영화에 대한 미학적 사유를 묻지 않고, 대놓고 '상업영화'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힘들다.

셋째는 '마지막 문제(의 출제의도)에 대한 의문'이다. '배우 캐스팅 과정에서 소속사 대표를 만나 그를 설득하는 장면 묘사 문제'는 도대체 왜 출제된 것인가? 사실 내가 지원한 전공은 '영화연출/기획 전공'이다. 따라서 출제자 입장에서 얼마든지 연출의 관점이 아니라 기획의 관점에서 문제를 낼 수 있다. 아마 출제자는 기획의 관점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왜냐하면 세 문제 중 마지막 문제가 가장 많은 글자수의 답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출제자가 핵심이라고 생각하여 고집을 부려 결국 출제된 '기획의 관점에 기반한 문제'가 '리메이크'라는 시험 전체의 주제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각각 '여러 영화 중 하나를 골랐다면, 그 영화를 왜 골랐는지 서술하는 문제'와 '고른 영화를 한국영화로 리메이크할 때 어떤 부분이 달라질 것인지 서술하는 문제'였다.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순서에 따른다면, 세 번째 문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를 종합하는 문제, 즉 '내가 만들 리메이크 영화의 이야기를 시놉시스나 시나리오 형식으로 작성하게 하는 문제'가 되었어야 한다. 사실 기존의 시험 기조대로라면 이야기구성 유형의 문제는 반드시 한 문제 이상 출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출제자도 논술식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에 이어 세 번째에 이야기구성 유형의 문제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출제된 세 번째 문제는 '내가 만들 리메이크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속사 대표를 설득하는 논변'을 기반으로 하는 문제였다. 장면 묘사 형식은 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문제에는 적합하지만, 후자를 기반으로 하는 문제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장면 묘사 문제가 출제됐다면 식상한 문제가 되었을 테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를 기반으로 하는 장면 묘사 문제가 출제된 것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사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지원자가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소속사 대표를 설득하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을 텐데, 그 안에서 얼마나 창의적인 논변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캐릭터의 매력 위주로 설득한다'라는 조건이 있다고 한들 말이다. 게다가 마지막 문제는 세 문제 중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의 답안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자 내외로 써야 했다. 심지어 장면 묘사 형식의 문제에 대한 답은 필수적으로 시나리오 형식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원고지 글자수가 많이 부족하다. 즉, 내 생각을 풍부하게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획의 관점에 기반해서 문제를 낼 것이었다면 장면 묘사 형식이 아니라 다른 형식(가령, 논술식)으로 냈어야 하고, 장면 묘사 형식으로 문제를 낼 것이었다면 기획의 관점이 아니라 연출의 관점에서 문제를 냈어야 한다. 결국 마지막 문제는, '출제자 눈에만 신선해 보이는 기획의 관점에 장면 묘사 형식을 억지로 짜 맞추어 출제된 문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저런 상태의 필기시험이 얼마나 변별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 채 구술시험을 봤다. 그런데 구술시험 역시 내 예상과 다르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선 면접관은 총 세 명(이하 A, B, C교수로 구분하여 지칭한다.)이었다. 총 10분의 면접 시간 중 처음 4-5분 정도는 A교수가 (내가 필기시험 때 고른 영화인) 〈위플래쉬〉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마지막 장면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했다. 어떤 답을 해도 또 다른 답을 요구했다. 그러다 C교수가 필기시험에 대해서 자평해보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문제에 대한 답을 다소 무난하고 아쉽게 적은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가 고쳐 쓴다면 어떻게 할지를 묻길래, 나는 내 답이 아쉬운 이유에 관해 설명한 뒤 이런저런 문제의 요건에 맞춰 고치겠다고 답했다. 면접이 끝날 때까지 C교수가 계속 질문했다. 그는 '영화를 찍어본 경험이 있는지', 또 '상업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 맞는지'를 물어봤다. 면접 거의 마지막 즈음에 C교수는 한국영화감독 중에 롤모델이 누구인지 물었다. 나는 '배용균 감독님'이라고 말하려다가 '상업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 맞는지' 물은 자에게 배용균을 말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결국 '임권택 감독님'이라 말했다. 그러자 그가 임권택 감독님의 어떤 점이 좋은지 묻길래, 나는 한국 근현대사를 길어 올리는 임권택 감독님만의 '시간' 혹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C교수가 임권택 감독님이 훌륭하시지만, 왜 요즘에는 영화를 못 찍으시는지 그 이유를 아는지 물었다.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 그냥 떠오르는 대로 건강과 투자 문제가 있으신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가 롤모델조차 투자를 받지 못하는 상황인데, 지원자 본인은 어떻게 투자를 받아서 영화를 찍을 것인지 물었다. 이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시간을 잠시 달라고 하자, A교수가 시간이 다 되었으니 짧게라도 빨리 대답하라고 했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님처럼 미학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흥행적 요소도 고려하겠다고 얼버무렸는데, 그 순간 면접이 종료되었다. (그제서야 면접 내내 노트북 모니터에 시선을 두던 B교수가 나를 응시했다.) 

K대 구술시험은 필기시험의 연장이었다. 사람마다 받았던 질문이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필기시험과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학교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나 장단편 작품계획서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또한 모집요강에 있는 '2021년도 1월부터 9월까지의 월별 박스오피스 1-5위 중 한국영화를 모두 관람할 것'이라는 요구가 무색하게도 박스오피스 순위권 영화 관련 질문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여하간 나는 K대 시험을 만족스럽게 치지 못했다. 그것이 나의 실력 부족 때문인지, 학교가 낸 문제 혹은 학교의 입시방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K대에서 벗어나, 이제 D대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한다. 사실 D대는 입시 과정만 놓고 볼 때 말할 것이 많지 않다. 앞서 말했듯 D대 입시에는 서류심사와 필기시험이 없고 오로지 구술시험만 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D대의 구술시험은 스카이프 화상통화로 진행되었다. 면접은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내가 직접 면접관에게 전화를 걸면 바로 시작되었으며, 일대일로 진행되었다. 면접이 시작되자 면접관은 내가 추가로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잘 읽어보았다며 나름의 소감을 말했다. 그 뒤로 대략 15분 동안 면접이 진행되었다. 면접 분위기는 K대보다 훨씬 부드러웠으며, 면접관은 내 말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면접의 느낌보다는 면접관과 그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면접관의 질문은 내 답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어졌다. 따라서 각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을 적어보자면, '영화 연출해본 경험이 있는지', '지원 동기가 무엇인지', 'D대 출신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이 있는지', '그 영화의 어떤 점이 좋은지',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지', 'K대에도 지원했었는지', '연출 외에 세일즈나 제작에도 관심이 있는지' 등의 질문이 있었다.

입시 준비의 측면에서 볼 때, 여러 시험을 치르는 K대 입시에 당연하게도 더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였다. 상대적으로 시험이 간소화되어 있는 D대 입시는, K대 입시를 위해 준비했던 것(가령, 자기소개서나 구술시험 대비 스크립트)을 재정리해서 치렀다. 그렇다고 해서 D대가 K대의 대체 학교였던 것은 아니다. K대와 D대 모두 가고 싶은 학교였으며, 다만 각각 장단점이 뚜렷하여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두 학교 입시가 모두 끝났을 때, 다행스럽게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K대는 최종 불합격했고, D대만 최종 합격했기 때문이다.


[4]


다음은 작년에 내가 지원했던 K대 영화연출/기획 전공 필기시험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복기한 것이다. (단, 내가 썼던 답안은 따로 공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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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Db 역대 고평점영화 250위 중 몇 개를 선정하였다.)
쇼생크 탈출 / 대부(1) / 석양의 무법자 / 좋은 친구들 / 라이언 일병 구하기 / 위플래쉬 / 아마데우스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 다이 하드 / 식스 센스 / 파고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그랜 토리노 / 포드 V 페라리 / 스탠 바이 미 

위 영화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한국 상업영화로 리메이크하려고 한다. 

Q1. 감독 또는 프로듀서인 본인이 해당 영화를 왜 리메이크하고 싶은지를 서술하시오. (100자 내외) 

Q2. 이 영화를 한국영화로 리메이크할 때 어떤 부분이 크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200자 내외) 

Q3. 당신은 리메이크 영화의 주연을 캐스팅하기 위해 톱스타가 소속된 회사의 대표를 만났다. 해당 배우가 이 영화의 주연을 맡아야 하는 이유를 캐릭터의 매력 위주로 설득하는 당신과 이 시나리오를 거절할 이유만 찾고 있는 대표, 두 사람 간의 대화로만 구성된 씬을 서술하시오. (설득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내용으로 답안을 마무리하지 말 것. 1000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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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K대는 학교 차원에서 전문사 과정 기출문제를 공개하지 않는다. 행정실에 전화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지만, 그저 학교 방침 때문이라는 답만 들을 수 있었다. 감히 추측건대, K대는 대학원 정도에 진학할 수준의 사람들에게 기출문제는 굳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수험생 입장에서는 시험을 보러 가는 데 기출문제가 없어 어떤 준비도 할 수 없음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기출문제를 구하려고 이곳저곳을 찾아보지만, 그 누구도 관련 자료를 공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나를 포함한) 몇몇 수험생은 과외나 학원을 알아보게 된다. K대의 기출문제 비공개 방침이 어느 정도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이다. (물론 사교육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결론적으로 나는 K대의 기출문제 비공개 방침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교육적 목적하에서 내가 직접 시험장에서 풀었던 문제를 복기하여 공개한다. (그런데 K대는 매년 필기시험 문제를 변형해서 낸다. 그래서 이 공개가 누군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5]


2021년에 감상했던 영화들을 떠올려 보며, 리스트를 작성한다. (단, 재감상은 제외한다.) 

5-(1) 2019-21년도 영화 
1. 침묵(2020) & 메모리아(2021)_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 미야모토(2019)_마리코 테츠야
3. 우연과 상상(2021) & 드라이브 마이 카(2021)_하마구치 류스케
4. 더블 레이어드 타운(2019)_코모리 하루카 & 세오 나츠미
5. 와일드 투어(2019)_미야케 쇼 
6. 다함께 여름!(2020)_기욤 브락
7. 끝없음에 관하여(2019)_로이 앤더슨
8. 스파이의 아내(2020)_구로사와 기요시
9. 운디네(2020)_크리스티안 페촐트 
10. 입법회 점령사건(2019) & 붉은 벽돌벽 안에서(2020)_홍콩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첨언: 리스트에 없는 영화들 중 미겔 고미쉬와 모린 파젠데이로의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2021)와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루치오를 위하여〉(2021)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정말 똑똑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오야마 신지의 〈구름 위에 살다〉(2020)는 걸작 같은데 아직 의심 중이고, 레오 카락스의 〈아네트〉(2021)는 기대보다 다소 별로였고,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2021)는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한편,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2021년의 발견이라 하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봤던 마리코 테츠야의 〈미야모토〉(2019)다. 나는 아직도 계단 격투 씬을 잊지 못하고 있다.

5-(2) 2019년도 이전 영화
1. 백만 냥의 항아리(1935) & 고우치야마 소슌(1936)_야마나카 사다오
2. 누드모델(1991)_자크 리베트
3. 맨느 오세앙(1986)_자크 로지에
4. 그림자 열차(1997)_호세 루이스 게린
5. 우리들의 사랑스런 8월(2008)_미겔 고미쉬

첨언: 야마나카 사다오, 야마나카 사다오, 야마나카 사다오... (무한 반복) 

5-(3) 한국영화
1. 당신얼굴 앞에서(2021)_홍상수
2. Trans-Continental-Railway(2021)_정재훈
3. 헛발질(2021)_배윤환
4. 인트로덕션(2020)_홍상수
5. 보이스(2021)_김곡 & 김선 

첨언: 처참했던 2021년의 한국 상업영화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단연 곡사의 〈보이스〉(2021)다.

[링크]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 (①~③)

• 참고1: 2021년 11월, 나는 tunainforest가 기획한 프로젝트 "비평의 '위드'는 가능한가: 비평가 22인의 릴레이 인터뷰"에 참여했다. 나를 포함한 총 22명의 사람들이 쓴 글은 '웹진 PONG'에서 열람 가능하다.

• 참고2: '웹진 PONG'에 게재된 글은 B안이다. A안은 tunainforest의 개인블로그 '숲속친구들'에 게재되었다. 한편, tunainforest는 '콜리그(colleague)'에 프로젝트 기획 후기도 남겼다. 각 글의 링크를 아래에 첨부해둔다.


본문(B안) 링크  

본문(A안) 링크 

tunainforest의 기획 후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