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기적을 만들어내기 - 다미앙 매니블과의 대담 (카이에 뒤 시네마 2022년 7/8월호 수록)

 Fabriquer des miracles (Entretien avec Damien Manivel)

Entretien réalisé par Olivia Cooper-Hadjian à Paris, le 21 juin.


  • 참고1: 본문("기적을 만들어내기")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2022년 7/8월호에 수록된 글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저작권은 일차적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에 있다.
  • 참고2: 본문 속 그림은 카이에 뒤 시네마 측이 아닌 내가 임의로 삽입한 것이다.

Q1. <막달라 Magdala>(2022)는 엘사 월리아스톤(Elsa Wolliaston)과 세 번째 협업 작품입니다. 감독님과 그녀 사이의 관계가 이 영화의 시작점이었나요?

A1. 원래 저는 댄서였습니다. 엘사는 무용가이자 훌륭한 댄서입니다. 엘사는 제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2009년에 <레이디 위드 더 독 La dame au chien>(2010)을 엘사와 함께 작업한 이후로 저는 항상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사도라의 아이들 Les enfants d'Isadora>(2019)의 마지막 숏[그림1], 즉 엘사가 하늘을 우러러보는 그 숏을 보면서 저는 다음 영화는 반드시 성스러움(le sacré)을 중심으로 하고, 또 전적으로 그녀에 의해서 진행되게끔 해야 한다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저는 엘사에게 신격화의 형상 속에서 웅장한 영화적 죽음(une mort cinématographique)을 연기하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종교적 인물들(즉, 수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Marie Madeleine)로 결정하기 전에는, 성모 마리아(Vierge Marie)를 생각해보기도 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영적인 사막이나 숲으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보이던데, 숲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공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상상적 작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림1]

Q2. 기적을 재현하는 것에 망설임이 있진 않았나요?

A2. 통상 기적과 같은 주제를 택한다면, 이런 주제를 완벽하게 다룰 수는 없습니다. 적은 제작비로 기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 일은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적은, 관객이 영화에 자신을 투영하고 영화를 믿는 능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Q3. 영화 제작 과정에서 16mm 촬영이 도움이 되었나요?

A3. 필름으로 촬영하는 것은 매우 직관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이 영화가 엘사와 작업하는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녀라는 존재를 물리적인 매체에 기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경계에 놓인 상황, 가령 새벽에, 안개 속에서, 촛불이 켜진 어둠 속에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과 엘사의 신체 사이에는 대화(un dialogue)가 있습니다. 매우 불안정한 대화죠. 이미지는 부스러져 언제든지 소멸할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냅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핸드헬드 카메라(caméra à l’épaule; 어깨에 건 카메라)로 촬영된 첫 번째 영화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엘사를 향한 시선(un regard sur Elsa)을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4. <막달라>는 이야기가 매우 희박한 초기 단편들처럼 내러티브적 미니멀리즘(minimalisme narratif)으로 돌아가는데요. 그 결과 영화는 무용(la danse)과 연결됩니다. 연기자의 제스처를 무용적인 방식으로 운용했나요?

A4. 미니멀리즘은 제가 사물들을 느끼는 방식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는 삶이나 대부분의 영화 속에서 보지 못하는 모든 디테일들을 사람들이 감지하게 되기를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신체 내에 감정이 있음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만드는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어떤 형식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까다로운 환경에서 촬영을 했기에 저희는 엘사와 테이크를 많이 가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엘사에게 카메라를 가지고 무엇을 찍으려고 하는지, 그녀가 행해야 하는 제스처가 무엇인지에 관해 간략히 설명했고,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물들을 육화(incarner)하여 그것들을 체험하게끔 내버려 두었습니다. 촬영이 제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저는 차라리 제 관점과 아이디어를 바꾸었습니다. 매 테이크가 불가능함과의 싸움이었죠.

Q5. 항상 감독님 본인 회사[MLD Films]를 통해 영화를 제작하나요?

A5. 마틴 베르티에*가 저희 쪽으로 합류했는데요. 그가 없었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매 순간이 전쟁 같거든요. 저는 시나리오 없이 작업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번 저희와 동행할 용기를 가진 파트너를 찾아야만 합니다. 한 영화로 벌어들인 돈은 다음 영화에 재투자됩니다. <막달라>의 경우, 저희는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제 영화가 대중 친화적이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점점 더 위축된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는 각종 기관과 영화관 경영자의 책임이 상당 부분 있어요. 최근에는 영화제 쪽에도 책임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저를 매우 슬프게 만듭니다. 저는 예술가가 되려는 성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는데, 저를 압도하는 어떤 작품들을 만나면서 그런 기질이 생겼습니다. 영화가 어떠해야 한다고 표준화(uniformiser)하려는 것, 이는 곧 관객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화를 계속 예술로 여길 책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예술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2019년 <이사도라의 아이들>의 프로듀서였다. 최근에는 파스칼 태그나티의 <코르시카의 여름 I Comete>(2021)의 프로듀서였다. 편집자 주.

목소리의 테러리즘: 곡사의 〈보이스〉(2021)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삼은 곡사(김곡, 김선)의 범죄・액션 영화 〈보이스〉(2021)가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명확하다. 보이스피싱을 당하지 않기 위해, 돈을 요구하는 수상한 전화를 받으면 무조건 끊자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내용의 메시지는 영화 말미 카메라를 또렷이 쳐다보는 이규호(김희원)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노골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을 염두에 두고 개봉 당시 평자들이 〈보이스〉에 관해 좋지 않은 평가를 했으리라 추측해 본다. 그들의 공통된 평을 밝히자면, 그것은 바로 〈보이스〉가 영화 작품보다는 공익광고 영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평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보이스〉는 정말 공익광고적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보이스〉는 공익적 메시지 전달이라는 거대한 목적 아래서 등장인물이 모두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그런 영화라고 말이다. 이는 분명 〈보이스〉의 약점이다. 내친김에 하나 더 지적하자면, 〈보이스〉의 이야기 역시 황당무계하다. 아무리 아내 강미연(원진아)과 건설 현장 소장(손종학)이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이 일 때문에 미연이 입원하고 소장이 자살했다고 하더라도, 또 전직 경찰이라고 하더라도 한서준(변요한)이 블랙 해커 깡칠(이주영)의 도움을 얼마간 받아 자기 목숨을 걸고 혈혈단신으로 중국 선양의 조직 본거지에 잠입해서, 보이스피싱으로 인해 강탈당한 돈을 모두 되찾아온다는 상황 설정은 거의 히어로물에서나 봄 직한, 그런 과장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단순명료한 메시지와 과장된 이야기로 점철된 〈보이스〉는 비평적으로 특기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 영화 같아 보인다. 하지만 〈보이스〉를 그저 그런 영화 중 하나로 속단하고 넘어가기에는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영화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보이스피싱의 근간인 '보이스(목소리)' 말이다. 사실 제목으로서 '보이스'는, 이미 동명의 국내 드라마까지 존재하기 때문에, 딱히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몰개성적 제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이스〉의 중심 소재인 보이스피싱의 관점에서, 그 근간인 '보이스'는 문제 삼을 만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이스피싱이라는 범죄가 벌어지는 과정은 기기묘묘하다. 물리적으로 협박하거나 신체적인 상해를 입히지 않고, 전화기 너머에서 오로지 몇 마디 말로 상대방을 무력화시켜 거금을 내놓게 만드는 것이 보이스피싱의 주된 원리이지 않은가?

문득 든 의문. 전화를 받은 자는 전화를 건 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른 채 목소리만 듣고 불가항력적으로 송금하게 되는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암시적 답은 곽프로(김무열)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보이스피싱은 무식과 무지를 파고드는 게 아니야. 상대방의 희망과 공포를 파고드는 거지." 희망과 공포에 밑줄. 이 둘은 정확히 상상에 의해 발현되는 것들이다. 물론 목소리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에 관계된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얼마든지 상상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역량을 지닌다. (특히 나는 텅 빈 화면에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데릭 저먼의 〈블루〉(1993)와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백설공주〉(2000)를 감상한 경험을 통해 그 역량에 대한 믿음을 좀 더 갖게 되었다.) 보이스피싱은 바로 이런 목소리의 역량을 악랄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범죄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보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보이스〉의 초반부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사건은 미연이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연이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사건 자체보다 더 중요한, 그리고 주의 깊게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미연이 전화를 받을 때 숏 배치 말이다. 먼저 미연이 서준의 전화를 받을 때 영화는 교차편집을 통해 서울의 식당(에 있는 미연)과 부산의 건설 현장(에 있는 서준)을 한 번씩 번갈아 보여준다. 하지만 미연이 곽프로와 그의 부하들의 전화를 받을 때는 교차편집이 이뤄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로지 미연이 짓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집요하게 포착할 뿐이다. 사실 여느 영화처럼 입만 타이트하게 프레이밍하여 전화를 건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숏을 잠깐 삽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곡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즉, '미연에게 보이스피싱 전화를 걸어온 자들이 있는 쪽으로 교차편집을 통해 공간 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곡사가 영화 초반부에서 숏 배치를 할 때 세운 논리이자 내린 결단이다.

요컨대, 미연이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장면에서 이미지(전화를 받은 미연의 모습)는 고정된 채 사운드(전화를 받은 미연의 목소리와 전화를 건 낯선 이들의 목소리)만 급박하게 변화한다. 여기서 가설. 저 장면에서 낯선 이들의 '모습'은 화면 안에 안착하지 못하는 반면 그들의 '목소리'만 화면 안팎에서 둥둥 떠다니는데, 이는 아마 상술한 보이스피싱의 원리가 영화 내에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테다. 이 사태를 김곡(혹은 그의 저서 『투명기계』)의 언어를 빌려 내 식대로 표현하면, 각각의 숏(혹은 포토그램)은 폐쇄적이고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숏들과 그 사이사이(혹은 스플라이스 영역, 즉 접합부) 모두를 다름 아닌 목소리가 관통하는 것이다. 사실 관통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한편으로는 폐쇄적이고 닫혀 있는 숏을 뚫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한 일상에 균열을 낸다는 점에서, 차라리 목소리의 숏에 대한 공격, 침투, 더 나아가 점령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확한 것 같다.

잠깐, 점령? 사실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의 일종으로 공기의 진동에 의해 울려 퍼지는데, 이런 성질을 고려할 때 목소리가 숏을 점령한다는 것은 곧 목소리가 숏에 담긴 '공기(혹은 김곡의 용어로 분위기)'를 장악함을 의미한다. 이때 공기란 그 숏에 포착된 인물이 공유하는 공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목소리가 공기의 흐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면, 그 변화된 공기는 인물의 신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말이다.

이런 관점을 견지할 때, 〈보이스〉의 초반부에서 눈에 띄는 장면은 다름 아닌 미연이 합의금이 필요하다는 곽프로의 말만 믿고 가짜 법률사무소 계좌로 7,000만원을 송금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복기해보면, "합의요?"라는 미연의 물음과 "예!"라는 곽프로의 대답을 끝으로 하나의 숏이 컷된 직후 마우스와 키보드를 작동하는 미연의 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숏들이 삽입된다. 이때 미연의 스마트폰은 분명 화면이 꺼진 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즉, 미연과 곽프로 간의 전화는 이미 종료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프로의 목소리는 노트북 앞에서 허둥지둥거리는 미연의 모습을 포착한 숏 위에 중첩되며 화면 안팎에서 울려 퍼진다. 그런데 이때 곽프로의 목소리는 환청이나 잔음으로서 단순히 숏에 잔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더 나아가 일종의 유령적 목소리로서 미연을 홀리고 조종한다. 결국 (화면상에서) 주인이 없는, 아니 애초에 (미연의 관점에서) 주인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숏을 점령하고, 또한 미연의 신체를 장악하여 그녀로 하여금 거금을 송금하게끔 부추긴 것이다.

물론 미연이 머물고 있는 식당 내의 공기, 달리 말해 미연이 마시는 공기를 어떤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내포한 상태로 몰고 가는 것으로는, 곽프로의 목소리 외에도 그의 부하들의 목소리도 있다. 상술했다시피 이들의 목소리는 (일차적으로는 미연의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여, 이차적으로는 유령적으로) 화면 안팎에서 울려 퍼지지만, 이들의 모습은 교차편집이 되지 않아 화면에 안착하지 못한다. 시각적으로는 차단된 채 청각적으로만 공격을 받는 과정, 즉 미연이 일련의 낯선 이들의 목소리만 들으며 불안과 공포의 상상을 하다 결국 혼이 나가는 과정 일체를 두고 조직적인 '목소리 테러'라고 규정해도 과장은 아닐 테다. 목소리 테러범들의 목적은 단 하나다. 전화를 받은 자의 돈을 강탈하는 것.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강탈하는 돈의 액수가 한두 푼의 수준이 아니라 누군가한테는 거의 전 재산의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초기작들(가령, 〈자본당 선언〉(2003), 〈프롤레타리아의 기원〉(2003), 〈빛과 계급〉(2003) 등)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곡사의 자본주의에 관한 관심을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보이스〉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보이스피싱 조직의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무차별적 공격일지 모른다. 범죄의 대상이 되는 계층이 부르주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인 것이 특히 문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전자와 달리 후자에게 돈은 거의 목숨과도 같다. 실제로 미연은 곽프로에게 "그거 진짜 제 목숨과도 같은 돈이에요"라고 말하며 울부짖지 않았던가. 당연하게도 곽프로는 미연에게 돈을 돌려줄 생각이 없으며, 심지어 "네가 와서 찾아가세요"라고 말하며 도발한다. 이런 비극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곡사가 택한 노선은 흥미롭게도 프롤레타리아의 '역습'이다.

물론 영화 내에서 서준이 중국 선양으로 떠난 까닭은 강탈당한 돈을 되찾고 곽프로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서준에게 나름의 합당한 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서두에서 지적했다시피 서준이 목숨까지 걸고 보이스피싱 조직에 홀로 잠입한다는 상황 설정은 과장이다. 어떤 전사(前史)를 끌어온다고 하더라도 이런 설정 자체가 억지스럽다는 것을 곡사도 모르지 않을 테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문이 던져져야 할 것 같다. 어떻게든, 무리해서라도 곡사가 서준을 중국 선양으로 보낸 까닭은 무엇인가? 당연히 일차적으로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운영 방식을 낱낱이 밝히기 위해서다. 사실 이것이 영화의 주된 목표 중 하나였을 것이고, 실제로 그 목표는 상당 부분 달성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성취 덕택에 〈보이스〉의 공익광고적 성격이 강화된다. 그런데 이를 인정하는 것과 무관하게 나의 관심은 서준의 역습이 조직적인 목소리 테러에 대한 대항적 행위라는 사실에 있다. 방점은, 다시 목소리 테러에 찍힌다.

목소리 테러로서 보이스피싱이 악질 범죄인 이유는, 조직원들이 단순히 사기를 쳐서 누군가의 돈을 뜯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모습이 노출되지 않음을 이용하여 어떤 죄의식도 없이, 마치 게임을 하듯 손쉽게 상대방의 인생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이스피싱의 악랄함과 지속 가능성은 테러범의 비가시성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비가시성은, 〈보이스〉 초반부에서 곡사가 테러범의 이미지를 화면 안에 불러들이지 않고, 사운드만 화면 안팎에서 울려 퍼지게 만듦으로써 일종의 불평등한 공수(攻守) 관계의 양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렇다면 서준의 역습은, 단순히 보이스피싱 조직 내부를 자세히 보여주는 기능적 수준을 넘어서서 테러범들의 모습을 가시화하여 화면 안에 각인시키는 것 자체에 근원적 목표를 두고 있다.

세르주 다네가 쓴 글 「고다르의 교육학」에 따르면, 장뤽 고다르는 〈여기 그리고 저기〉(1976)에서 '여기(프랑스)'와 '저기(중동)'를 '그리고(프랑스어로 et)'의 논리하에 그대로 이어 붙이면서 '저기'에서 착취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착취당한 이들에게 어떻게 돌려줄지 고민했다. 곡사는 〈보이스〉에서 서준을 접속 부사 '그리고'처럼 활용하여 '여기(서울)'와 '저기(중국 선양)'를 어렵사리 이어 붙인 뒤 고다르의 저 고민을 정확히 역으로 받아들여 밀고 나간다. 전화기 뒤에 숨은 채 목소리로 테러를 일으켜 돈을 갈취한 자들의 이미지를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하에 착취하여 전시하는 방식을 통해 말이다. 이로써 이미지와 사운드가 모두 노출된 테러범들과 서준은 적어도 화면상에서는 평등해지는데, 이는 곧 양측 간의 물리적 충돌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갖춰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말 영화 후반부에서 일련의 충돌과 싸움이 벌어진다.

영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서준과 곽프로의 옥상 대결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곽프로의 목이 실외기 줄에 의해 조여지면서 서준이 승기를 잡을 때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아무리 목소리로 테러를 일으켰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목이 조여지면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숨조차 쉴 수 없는 것이다. 〈보이스〉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준의 역습 말미에서 우리가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은, 목소리 테러를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란 결국 테러범과 공기를 공유하지 않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면하여 테러범의 숨통을 막히게 만드는 일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곡사도 모르지 않을 테다. 그래서일까. 곡사는 이규호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역으로 제안한다. 차라리 전화를 받은 자가 숨을 쉬지 않아야 함, 즉 전화를 끊어야 함을 말이다.




〈보이스〉는 목소리 테러를 피하는 허무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한 뒤 이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마무리된다. 가령, 돈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고, 서준은 경찰로 복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결말이 어떤 점에서는 안전하고 상투적이라 할 수 있지만, 섣불리 위로를 전하거나 희망을 노래하고자 덧붙여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과장된 설정(서준의 역습)에서부터 과장된 결말(원상 복귀)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태도가 일관되었음을 고려해볼 때, 어쩌면 〈보이스〉 식의 다소간 비현실적인 해피 엔딩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영화 안의 안전함과 영화 바깥의 위험함, 혹은 그 둘 간의 경계를 재고하게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보이스〉를 보고 나서 쾌감보다는 찝찝함을 더 느낀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