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방법 입문: <심도 The Depths>(2010)를 둘러싼 몇 가지 노트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과 만나, 자신의 가치관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체험, 전 그 가혹한 체험이야말로 교류라고 생각합니다. 가치관이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힙니다. 그것이 퇴행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 상처와 균열은 또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 하마구치 류스케

0.
지난 6월 초 하마구치 류스케의 <심도 The Depths>(2010)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처음 감상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돌출되어 보이는 이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이야기가 엉성하다', ‘연기자들의 연기가 어색하다'는 혹평을 남겼다. 당시에 이런 혹평에 반발하는 글을 작성하던 도중 (‘기말고사'라는) 개인 사정상 글을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은 <심도>를 딱 한 번 보고 줄거리나 숏 등을 복기한 노트와 6월 1일과 2일 두 차례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의 대화’에서 들은 것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이다. (이 글이 <심도> 자체를 심도 깊게 분석하는 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심도>의 세부적인 부분과 관련해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미리 양해를 구한다. 나중에 <심도>를 다시 보게 된다면, 폴 발레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에서 한 것처럼 이 글에 변경/발전된 생각을 코멘터리처럼 덧붙이고 싶다.)

1.
1978년생 하마구치 류스케는 도쿄예술대학(TUA) 영상대학원 졸업작품으로 <열정>(2008)을 내놓은 뒤 사실상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감독이다. 2010년대의 끝인 2019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이 열렸고, 약 일주일 동안 단편을 제외한 하마구치의 작품들, 즉 <열정>(2008), <심도>(2010), <친밀함>(2012), <해피 아워>(2015), <자나 깨나>(2018), (사카이 고랑 공동작업한 동일본 대지진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파도의 소리>(2011), <파도의 목소리: 신치마치>(2013), <파도의 목소리: 게센누마>(2013), <노래하는 사람>(2013)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언급한 영화들을 모두 감상하면서 <해피 아워>와 <자나 깨나>를 경유해서 미약하게 인지하고 있던 하마구치의 세계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하마구치 작가론'을 구상하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특히, 그의 단편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분명히 알게 된 건 <열정>, <심도>, <친밀함>이 있었기에 <해피 아워>가 나올 수 있었고, 또 동일본 대지진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작업했기에 <자나 깨나>가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들 중 <심도>에 집중하고자 하는 이유는, 우선 <심도>는 하마구치 필모 중 가장 돌출된 작품이기도 하고, 또 하마구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한일합작 작품인데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거의 조명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하마구치는 본인의 작품 중 <심도>를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심지어 <자나 깨나>를 찍으면서 <심도>를 찍을 때의 느낌을 많이 떠올렸다고 한다. 이런 점들과 더불어,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심도>는 ‘하마구치 류스케 연출 방법'의 은유적 모델이 될 법한 작품이기에 하마구치 필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2.
먼저 <심도>의 제작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009년, 심윤보 프로듀서가 쓴 <심도>의 원안이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와 도쿄예술대학 영상대학원의 프로듀싱 전공 공동 워크숍의 경쟁 피칭에서 뽑혔고, 한일 합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심도>를 제작하기 위해 양국의 스태프들이 선정되었다. 그렇게 (정성일 감독의 <천당의 밤과 안개>(2015), <녹차의 중력>(2018)의 촬영감독으로 잘 알려진) 양근영이 촬영을, 하마구치가 연출을 맡게 되었다. 배우는 한국에서 보낸 캐스팅 리스트를 보고 하마구치가 직접 선정했으며, 각본은 하마구치와 오우라가 한국 측에 검사를 받으면서 공동 집필을 했다(아마 한국어 대사 등을 검사받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심도>에는 한국인 배우(김민준, 박소희 등)와 일본인 배우(이시다 호시, 요메무라 료우타로 등) 모두가 출연하게 되었다. 대사의 언어와 관련해선, 배환(김민준)과 류(이시다 호시) 사이에서 통역을 해 주는 길수(박소희)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각자 모국어(한국어, 일본어)만을 사용한다. 물론 예외적으로 배환이 종종 영어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극 중 인물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 설정을 두고 한일 스태프들 사이에서의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이 극 중 상황으로까지 반영된 것이다, 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즉, 한일 합작이라는 특수한 제작 환경 때문에 ‘완전한 소통의 불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소통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영화 내/외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된 것이다. 어쨌든 2010년 3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시작된 촬영은 약 한 달 동안 총 21회차로 진행되었으며 편집이나 초반 믹싱은 일본에서, 색보정이나 마스터 믹싱은 한국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하마구치의 말에 따르면, <심도>는 CJ엔터테인먼트의 배급으로 약 일주일 정도 한국 영화관에 걸렸다. (즉, 사실상 하마구치는 한국에서 <해피 아워>보다 <심도>로 먼저 소개가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회해야 할 것 같다. <심도>를 찍기 이전에 하마구치의 연출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도쿄예술대학 재학 시절 하마구치는 <솔라리스>(2007)를 찍으면서 배우들에게 디렉션을 꼼꼼히 내렸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배우들에게 시선을 마주쳐라, 마주치지 말아라 등의 디렉션을 내릴 정도로 디테일한 것까지 관여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하마구치는 연출에 있어서 전권을 쥐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이 연장선상에서 <열정>을 준비하고, 찍었을 테다. 물론 하마구치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열정>에선 <솔라리스> 때만큼 배우들에게 크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세부적인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마구치는 <열정>에서 자신의 “영화 열정"(리차드 라우드의 책 제목)을 쏟아붓는다. 그래서인지 <열정>을 보고 있노라면, 하마구치의 시네필리적인 면모(특히, 하마구치가 여러 번 좋아한다고 고백한 에릭 로메르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가 두드러지고, 또 대사를 쓰는 데 있어서 자신의 장기를 감추지 않고 십분 발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열정>에서 ‘대화'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하마구치가 도쿄예술대학 재학 시절 평론가 우에모토 요이치의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우에모토가 일본 영화에서의 말의 빈곤함을 지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공력을 총동원해서 <열정>을 촬영하던 도중에 하마구치는 몇 번의 우연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교훈을 얻게 된다. 바로 감독의 연출 영역 바깥에서 ‘우연'(혹은 ‘운')을 포착하는 것 역시 영화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교훈은 하마구치가 <열정> 이후 10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연출 비전으로 삼게 된다.

하마구치의 말에 따르면, 그가 <열정>을 작업하면서 얻은 교훈은 두 가지이다. 먼저, 이상적인 그림을 얻기 위해선 ‘손에서 한번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그저) 상황에 맡겨야 한다'는 말인데, ‘무계획'의 의미는 아니다. 물론 상황에 맡긴다고 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딱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우연적 순간'은 분명히 발생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삶에 대한 감각이 형성된다. 그다음, ‘우연'(coincidence)이 화면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착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마구치는 <열정>의 두 장면을 언급한다. 후반부의 두 장면인데 바로 트럭 씬과 (엔딩의) 소파 씬이다.

먼저 트럭 씬의 경우, 겐이치로가 가호로부터 자신의 진심을 인정받은 줄 알고 좋아서 풍차돌리기를 한 뒤 다시 키스를 하려는데, 가호가 안 되겠다고 말하며 프레임 바깥으로 빠지는 장면을 말한다. 문제는 가호가 프레임 바깥으로 빠지는 순간 발생한다. 가호가 빠져나간 뒤 곧바로 거대한 화물 트럭이 갑자기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관객은 순간적으로 가호가 트럭에 치이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실제로 하마구치도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로 그 순간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사실 트럭은 촬영 현장에서 20~3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망원렌즈로 촬영을 하다 보니 거리감이 왜곡되어 그런 효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하마구치는 이 장면을 두 번 찍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새벽의 시간대'(매직 아워)가 하루에 딱 한 번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번째 테이크에서 원하는 결과물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좀 더 여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담기 위해서 두 번째 촬영을 하게 된 것인데, 갑자기 트럭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우연적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후 편집실에서 하마구치는 두 개의 테이크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즉, 첫 번째의 ‘아름다운 장면이 담긴 테이크'와 두 번째의 ‘우연적 순간이 담긴 테이크' 사이에서의 고민. 결과적으로 하마구치는 후자를 택했다. 그 이유는, 그 장면이 이 세계에서 딱 한 번만 벌어질 수 있는 것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트럭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우연의 순간이 당시 연기하던 인물들의 상황이나 감정과 적합하게 ‘링크’(link)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다음 소파 씬의 경우, 도모야와 가호가 이제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도모야가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용서해달라고 한 뒤 둘이 같이 프레임 바깥으로 빠지는 장면을 말한다. 이 장면에서 도모야와 가호의 시선은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혹은 같은 방향으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런 시선 처리는 하마구치의 디테일한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감독이나 스태프 등이 의도적으로 연출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배우들이 시선 처리를 그 상황(에서의 감정)에 맞게 한 것이다. 이는 곧 배우들 사이에서 발생한 우연적 순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순간을 과연 카메라로 잘 포착할 수 있는가이다. 즉, ‘서로 무관한 두 개인, 혹은 두 개체가 서로 링크되는 순간’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위치, 장소에 카메라를 놓는 것이 연출의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하마구치는 이런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달리 말해, ‘현장(혹은 배우)과 카메라 사이의 링크' 지점을 찾은 것이다. 이때부터 하마구치는 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것이 카메라라는 장치의 본질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연출이란 (‘운에 단순히 맡기는 것’과는 구분되는) ‘운을 만들어내는 것'이자 ‘우연을 잘 포착하는 것'이라고 믿고, 이를 발전시켜온 것이 자신의 10년의 커리어라고 말했다.

3.
하마구치가 <열정> 다음 작품으로 <심도>의 연출을 맡기로 결심한 것은,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일종의 실험을 하고 싶어서였을까? 즉, 한국인 스태프들, 배우들과 번역, 통역을 거쳐서 불완전하게 소통하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차이'와 ‘우연의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고 싶어서(즉, 영화 안으로 끌어오고 싶어서) 하마구치가 <심도>의 연출을 맡지 않았을까? 아니, 질문의 방향을 다소 바꿔야 할 것 같다. 하마구치는 <심도>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분명 <심도>의 촬영 현장은 <열정>에서처럼 자신의 공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텐데, 하마구치는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고 과감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를 배웠다. 그다음 2010년 말부터 하마구치는 배우 코스 수업을 3개월 정도 담당했다. 이때, ‘(영화) 배우들과의 친밀해지는 과정'을 통해 ‘(연극) 배우들 간의 친밀함'을 주제로 한 <친밀함>을 찍었다. 그러다 2011년 3월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마구치는 사카이 고랑 동일본 대지진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하기로 결심하는데, 바로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듣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방식은 카메라 앞에서 (한 씬에) 한 사람이 계속 이야기를 하는 왕빙의 <중국 여인의 연대기>(2007)나 <사령혼>(2018)과 같은 류의 영화에서의 방식과는 다르다. 하마구치와 사카이 고는 (서로 관련이 있는) 두 사람 이상의 사람을 짝을 지어 마주 보게 만들고 ‘대화’를 하게 한 뒤 그것을 카메라로 담았다. 왜냐하면 “대화하는 행위 자체에 굉장한 희망이 담겨있다”고 생각해서이다. 하마구치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도 우연을 포착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그러기 위해선 카메라의 위치 선정이나 피사체들이 대화를 잘 할 수 있게끔 촬영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일련의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하마구치는 ‘숏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배우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하마구치는 존 카사베츠와 장 르누아르를 참조한다. 특히, 하마구치가 카사베츠로부터는 배운 것은 배우가 안심하고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며, 르누아르로부터 배운 것은 이탈리아식 책 읽기를 통해 텍스트와 배우 사이의 친화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르누아르와 관련해선 자크 리베트의 <우리의 후견인 장 르누아르 2부: 배우의 연출>(1967), 지젤 브룬베르거의 <장 르누아르의 연기지도>(1968)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마구치는 자신의 경험 외에 카사베츠와 르누아르를 끌어와 연기 지도법을 고안했고, 이를 접목시켜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해피 아워>를 찍게 된다. 한편, <해피 아워>를 선보인 후에 하마구치는 <해피 아워>의 제작 기록을 담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 カメラの前で演じること』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요컨대, 하마구치는 허우샤오시엔과 또 다른 의미로 학생의 입장에서 계속 무언가를 배우면서 영화를 찍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열정>에서 <해피 아워>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하마구치 연출 방법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그 분기점이 <심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마구치가 <심도>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하마구치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 인용. 하마구치는 <심도>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배우들과 토론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다 특히 촬영 부분과 관련해서 촬영감독과 단순한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즉, 하마구치는 배우 연출만 하고, 그것을 촬영감독은 카메라로 찍기만 하면 되는 그런 관계가 된 것이다. 하마구치는 이런 간단한 관계 속에서도 영화를 찍을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가설. 혹은 하마구치 세계에서 <심도>라는 퍼즐 조각을 이해해보려는 시도. 분명 <심도>는 <열정> 때와 달리 하마구치가 연출적으로 전권을 쥘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철저히 분업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아마 하마구치가 밝힌 것처럼 토론을 거쳐 자연스럽게 도달한 결과일 테다. 사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다른 촬영 현장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충분히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마구치가 <열정> 때 마주한 질문을 다시 떠올려보자. ‘영화에서 연출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실 이와 관련해서 하마구치는 이미 당시의 경험으로부터 ‘운을 만들어내는 것' 혹은 ‘우연을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마구치가 <심도>에서 연출자로서 공력을 기울인 것은 바로 서로 다른 개체들 간의 링크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서로 다른 개체들'은 ‘배우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연출자' 모두를 함축한다.

하마구치가 <심도>라는 특수한 제작 환경에서 연출자로서 한 역할을 내 식으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심도> 촬영 팀이라는 하나의 집합이 있다. 이 집합은 ‘한국 스태프/배우들'이라는 소집합과 ‘일본 스태프/배우들'이라는 소집합의 합집합이다. 두 개의 소집합 사이엔 어느 정도의 교집합이 있지만, 그 범위가 넓지는 않다. 그리고 각각의 소집합 내에도 이질적인 서로 다른 원소들이 있다. 두 소집합의 합집합의 원소 중엔 연출자 하마구치라는 원소가 있다. 이 원소(하마구치)는 적어도 다른 원소들(스태프/배우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분명 지위적으로 우위에 있다. 이것이 다른 원소들과 차별되는 연출자 하마구치 원소의 특징이다. 여기서 하마구치는 이 합집합의 방향을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하는 방향'이 아니라 ‘같이 영화를 만드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일종의 우정의 시스템 속에서 같이 영화를 만드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아마 소통의 불완전함이 전제된 한일 합작이라는 특수한 제작 환경에서 하마구치가 최선으로 선택한 연출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마구치는 타자의 타자성을 긍정하면서, 즉 타자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밀해지는 것'(물론 친밀함의 과정은 쉽지 않다. 오히려 하마구치의 말마따나 “가치관이 흔들리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을 연출 방향으로 잡고, 그 교류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의 순간, 감정의 링크의 순간을 영화에 담아내려고 시도한 것이다. 즉, <심도>를 연출하면서 하마구치는 스태프/배우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되, 대신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친밀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어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그리고 그 공존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의 순간, 감정의 링크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영화 작업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여기서 문득 떠오른 사례가 있다. 바로 알베르 세라의 경우다. 세라 역시 <내 죽음의 이야기>(2013)에서 스태프들과의 불완전한 소통의 상황을 영화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라는 <내 죽음의 이야기>를 4:3 비율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촬영이 진행되던 도중 세라는 문득 ‘이 영화는 사실 2.35:1 비율로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세라는 이 사실을 스태프들과 논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라는 ‘나는 화면 비율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스태프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계속 찍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라고 생각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그리고 영화 촬영이 다 끝난 뒤 편집실에서 세라는 4:3으로 찍은 영화를 2.35:1로 편집했다. 정리하자면, 세라는 촬영 중 우연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했지만, 이를 스태프들과 소통하지 않고 밀고 나아가 영화를 완성한 것이다. 이 사례는 하마구치랑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하마구치는 세라처럼 극단적으로 ‘불통(의 상황)’을 영화 안으로 끌어 오지 않았다. 오히려 하마구치는 소통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되 그럼에도 교류를 하려고 시도하고, 그 과정 자체가 영화 작업에서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해피 아워> 때부터 정식화되어 본격적으로 영화에 접목되는) 하마구치의 ‘함께 촬영하는 과정에서 스태프/배우들 간의 발생하는 우연적 순간, 감정적 반응을 캐치하는 연출 방식'은 불통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신뢰를 전제로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자나 깨나> 작업 당시 하마구치는 도쿄예술대학 때부터 알고 지낸 사사키 야스유키에게 촬영을 아예 맡겼다. 물론 하마구치와 사사키는 각자 추구하는 예술적 비전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둘은 같이 작업하면서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같이 영화를 보고, 토론을 거쳐 기준점을 찾았다. 가령 <자나 깨나> 촬영 전에 하마구치와 사사키는 같이 나루세 미키오의 <흐르다>(1956)를 봤다. 그리고 하마구치는 사사키에게 ‘나루세가 인물의 시선들로 공간을 조직하는 느낌'을 <자나 깨나>에서 살리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에 사사키는 <흐르다>에서 몇 개의 렌즈가 쓰였는지 숏 분석을 해왔다. 그리고 둘은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촬영을 하면 좋을지 토론을 했다. 요컨대, 하마구치 연출 방법에서 우선적으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토론을 통한 신뢰 관계 형성인 것이다.

4.
하마구치 연출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토론'(혹은 ‘대화', ‘소통', ‘교류' 등)이다. 이는 일종의 우정의 시스템하에서 ‘같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연출자와 스태프/배우들 간의 토론도 중요하지만, 이는 사실 배우들 간의 우연한 감정적 링크를 더 잘 포착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간의, 혹은 배우와 텍스트와의 대화다. 그래서 하마구치는 <해피 아워> 때부터 ‘워크숍'을 진행했다. <해피 아워>의 경우, 촬영에 들어가기 6개월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총 23회 워크숍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워크숍에서 진행하는 것은 대사나 동작을 리허설하는 것이 아니라, 르누아르의 이탈리아식 책 읽기처럼 시나리오나 부수적인 서브 텍스트를 읽는 작업이다. 즉, 워크숍 기간 동안 배우는 감정적 뉘앙스를 배제한 채 전화번호부를 읽듯이 텍스트를 계속 읽는 것이다. 배우는 아무 감정 없이 읽는 훈련을 반복하면서 각본을 덮은 상태에서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사를 외운다. 이런 식으로 리딩 훈련을 하면, 일단 배우와 텍스트는 ‘친밀해진다.’ 그리고 큰 실패 없이 몇 번이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배우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러면 현장에서 배우는 텍스트를 자신의 심지로 말하게 된다. 이 정도 단계에 오르게 만드는 것이 하마구치 워크숍의 목적이다. 촬영 현장에선 하마구치는 배우에게 ‘책 읽기' 때와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배우 본인이 원하는 대로 연기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한다. 왜냐하면 만약 배우에게 “어떤 감정이 일어날 경우, 솔직하게 발전시켜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실 배우와 텍스트는 ‘무관계'의 관계에 있다. 배우는 배우이기에(즉, 외적인 동기에 의해) 텍스트를 외워야 하긴 하지만, 텍스트를 자신의 심지로 말할 이유는(즉, 내적인 동기는) 딱히 없다. 그렇다면 배우가 직접 즉흥적으로 애드리브를 하게 하면 어떤가? 하마구치는 애드리브를 요구하는 것은 각본가나 연출자의 역할을 배우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텍스트, 즉 대사는 필요하다. 그런데 배우가 대사를 단순히 외워서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면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말 그대로 ‘연기’를 하는 것이다.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고 진실되게 ‘텍스트를 말하게' 하기 위해선 바로 배우와 텍스트가 친밀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마구치가 워크숍을 고안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하마구치가 인정했듯이, 배우와 텍스트가 친밀해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배우가 텍스트를 완전히 자신의 심지로 말하게 되는 단계는 사실상 이상(理想)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완전히 친밀해질 때까지 무제한 워크숍을 진행할 순 없다. 그래서 하마구치는 리딩 훈련을 통해 배우가 어느 정도 텍스트와 친밀해졌다고 판단하면 같이 촬영 현장으로 간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선 배우의 ‘연기'와 텍스트에 대한 배우의 ‘반응'의 혼재를 포착한다. 이와 관련해서 하마구치는 “제가 배우를 찍을 때 초점을 두는 것은 단순히 배우가 대사를 잘 외우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배우가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대사(‘좋아한다', ‘싫어한다' 등)를 말할 때 신체에서 벌어지는 우연성입니다.”고 말했다. 여기서 바로 하마구치는 텍스트를 통한 형상-픽션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텍스트는 각본가가 창조한 픽션의 영역에 있다. 그다음 텍스트에 대한 배우의 감정적/신체적 반응은 연출자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종의 다큐멘터리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이 두 영역이 맞닿는 순간을 하마구치는 텍스트와 배우 사이의 ‘우연의 일치(coincidence)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이 ‘우연의 일치’는 이제 배우들 간의 감정적 링크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하마구치가 진행하는 워크숍의 장점 중 하나는 배우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을 충분히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게 되면서, 촬영 현장에서 보다 진솔한 (텍스트에 대한) 반응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하마구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우의 ‘목소리’다. 왜냐하면 하마구치는 배우들이 진솔한 반응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의 증거는 바로 배우의 ‘진실한 발음(發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마구치는 <열정> 이후 10년의 커리어 동안 자신의 관심이 ‘이미지’에서 ‘사운드’로 전이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하마구치는 동일본 대지진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면서 어떤 목소리를 영화에 담아야 할지를 배웠다고 한다.

이처럼 하마구치가 본격적으로 ‘말'과 ‘대화’를 다시 시네마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주지할 만하다. 왜냐하면 “21세기 영화의 한 가지 경향은 다큐멘터리에 대한/의한 새로운 질문"(정성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행처럼 일군의 다큐멘터리는 마치 아다치 마사오의 풍경론을 (잘못) 배운 듯한 태도로 말을 단순히 최소화하고, 인물이나 풍경을 오랜 시간 동안 응시하였다. 그렇게 말이 제거된 이미지로 범벅된 영화들이 나왔다. 즉, ‘이미지주의 시네마'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런 흐름이 형성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기억해야 할 작품도 있다. 가령 연출자가 아니라 (카메라) 설치자로 불러야 할 루시엔 카스탱-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의 <리바이어던>(2012)과 같은 작품. 이 영화는 어떤 감정, 판단, 설명 없이, 즉 말이 없이 배에 설치한 카메라로 채집한 이미지만을 나열하며 21세기에 뤼미에르적 태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서 몇몇의 감독들 중 특히 하마구치는 마치 로메르가 그러했듯 “말의 힘"(장-뤽 고다르의 1988년도 작품 제목)을 강조하고 있다. 하마구치는 “타자와 공존하기 위해서, 또는 관계를 맺기 위한 도구로서" 말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마구치는 ‘대화’를 자신의 영화 내/외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대화의 과정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은 ‘해피 아워'이고,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은 ‘언해피 아워'이다. 하마구치는 이 두 가지 순간 모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동질적인 느낌이 달성되었을 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산산조각이 났을 때도 소중한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하마구치는 (현실에서 연출자와 스태프/배우들 간의, 혹은 가상에서 인물들 간의) 대화의 과정에서 생기는 이 두 가지 순간을 영화에 담아내거나, 영화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런데 <심도>에는 언어적 장벽 때문에 대화를 하기 힘든 두 사람이 주연으로 나온다. 그 둘은 바로 한국의 유명 사진작가 배환과 방황하는 일본 소년 류이다. 잠시 우회해서 <심도>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심도>는 배환이 일본에 도착해서 친구 길수의 결혼식을 가면서 바깥 풍경을 카메라로 찍는 숏으로부터 시작한다. 길수는 일본인 유카와 결혼을 한다. 한편, 길수와 유카의 결혼식날 근처 호텔에선 류가 남자 손님을 상대한다. 류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직에 몸을 담고 있으며, 영화 속 표현에 따르면 남창(男娼)이다. 류가 상대하던 남자가 갑자기 미끄러져 죽자 류는 매니저를 불러 시체를 처리한다. 다시 결혼식. 유카는 결혼식장에 찾아온 한 여자의 손을 잡고 떠난다. 즉, 길수와의 결혼을 포기한 것이다. 유카가 떠나는 모습은 잠시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온 아이와 배환에 의해 목격된다. 배환은 그 순간을 카메라로 찍는데, 찍으려는 순간 류와 부딪힌다. 그렇게 배환은 류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순간적인 시선의 교환. 류는 아이가 놓친 풍선을 잡아준다. 배환은 그 순간도 카메라로 찍는다. 유카가 떠나 소위 멘붕 상태에 빠진 길수를 위해 배환은 일본에 며칠 머물면서 길수의 스튜디오(UP Studio)에서 사진작가 일을 하게 된다. 며칠 지내면서 배환은 길수가 유카를 위해 사진 스튜디오를 세웠고, 그 과정에서 사채업자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을 알게 된다. 돈을 갚기 위해 길수는 누드 사진이나 특이한 컨셉 사진을 찍어왔다. 그런 의뢰가 배환이 체류하는 동안에도 몇 번 들어왔고, 그때마다 배환은 개의치 않고 다 작업을 했다. 배환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유명작가라서 하지 않았을 사진 작업들에 재미를 느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길수가 돈을 빌렸던 조직에 속한 류가 홍보 사이트에 게재할 목적의 사진을 찍으러 매니저와 함께 스튜디오에 오게 된다. 배환과 류의 재만남. 사실 배환은 처음 류를 마주했을 때부터 무언가를 느끼고, 그걸 사진으로 포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프로필 사진 작업이 끝나고도 배환은 류에게 자신이 돈을 더 줄 테니 조금만 더 사진을 찍자고 부탁한다. 류와 매니저는 승낙하고, 결과적으로 프로필 사진보다 그 이후에 찍은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하게 된다. 매니저는 배환이 고급 고객이라고 판단하고, 류의 머리를 염색시킨 뒤 좋은 옷도 사 입힌다. 하지만 이렇게 외양적으로만 변화된 류를 보고 배환은 매력이 사라졌다며 촬영을 접어버린다. (그리고 류는 바람을 맞으면서 쓸쓸하게 걸어간다.) 이후 류는 스튜디오에 다시 찾아오는데, 촬영은 답보 상태에 빠진다. 길수는 옆에서 류에게 모델로서 능력이 없다고 핀잔을 준다. 그리고 류의 결단. 삭발을 하고 나타나 카메라를 응시한다. 배환은 류의 그런 모습을 보고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며, 자신이 한국에 갈 때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길수는 제대로 통역을 해주지 않는다. 그러자 배환은 진심이라면서 제대로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류는 이 제안을 들어도 한국으로 갈 생각은 없다. 혹은 자신이 정말 모델로서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류가 속한 조직의 보스는 류와 매니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음(고객이 죽은 것을 보고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매니저는 류를 빼낸 뒤 멀리 도망가라고 한 뒤 다시 조직으로 돌아간다. 류는 비를 맞으면서 스튜디오로 간다. 그리고 배환에게 자기를 한국으로 데려간다는 말이 진심인지 물으며,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배환은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여기서 며칠 같이 생활하면서 정말 한국으로 가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 같이 가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날 밤, 길수가 류가 쉬고 있는 방으로 들어와 ‘너가 배환을 망치게 될 것이다'고 말하며 빨리 나가라고 말한다. 류는 지지 않고 ‘당신에게도 보답이 있을 거다'고 말하며 길수의 눈을 응시하다 키스를 한다. 그렇게 둘은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이 상황을 모른 채 배환은 류와의 사진 작업을 이어나가다 우연히 류가 길수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고, 결국 길수는 배환에게 ‘너는 다 가졌으니 류라도 놔두고 가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 말을 듣고 배환은 화가 나서 길수를 때려눕힌다. 그리고 류를 빼내어 같이 공항으로 간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비행기가 결항하여 어쩔 수 없이 근처 호텔로 가게 된다. 둘은 각자 방을 쓰기로 한다. 그리고 배환은 류에게 ‘내일 아침 8시에 보자’고 말하는데, 통역자였던 길수가 없으니 이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배환은 사진 작업을 하면서 류에게 모델로서의 매력 그 이상을 느꼈는지, 자기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류의 방 앞에서 서성거린다. 이때 자기 방에서 전화벨소리(자신의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자 그냥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류 역시 나와서 배환의 방 앞에서 서성거리는데 이내 포기하고 대신 바(bar)로 내려간다. 바에서 한 남자가 추파를 던져도 류는 무시하다가 결국 시비가 붙게 된다. 갑자기 비행기가 이륙하는 숏이 삽입된 뒤 다음날이 된다. 류는 그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한편, 배환은 류를 깨우지 않고, 오해가 생겨 길수와 몸다툼을 하기 직전에 암실에서 작업하던 사진을 류의 방문 틈새로 집어넣은 뒤 유유히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탄다. 류도 무언가 느꼈는지 가방을 챙긴 뒤 1층 로비로 내려가서 배환이 없는 것을 보고 택시를 탄다. 그렇게 두 대의 택시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우연히 배환은 옆 택시에 류가 타고 있는 것을 본다. 류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손 인사를 건넨다. 그 순간 길이 갈린다. 류는 배환을 따라 공항으로 가지 않고 또다시 떠도는 삶을 택한 것이다. 배환은 부리나케 카메라를 들어 마지막으로 류를 찍으려고 한다. 하지만 류가 탄 택시는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그래서 배환이 셔터를 누르는데 프레임 안에 류는 담기지 않는다. 배환이 찍은 숏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를 보고 나면 드는 의문. 아침이 밝자 배환과 류는 왜 같이 공항으로 가지 않고 각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우선 배환과 류는 소통을 할 수 없다. 배환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고, 류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길수가 통역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인, 일본인과 소통이 가능한 길수는 아내가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자신을 도와준 친구와 싸웠으며, 심지어 같이 하룻밤을 보낸 갈 곳 없는 소년을 붙잡으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달리 말해, 언어적인 측면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해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말 대신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면서 오해가 생기고, 관계는 서서히 금이 가다 결국 파국을 맞을 수 있다. 반면, 배환과 류는 언어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서로에게 조심스럽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언어 외의 다른 방식을 통해 서로의 의중이나 감정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표정이나 제스처, 목소리 등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둘이 정신적 교류를 할 수 있었던 매개체는 바로 ‘사진’이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심도>가 하마구치 필모에서 돌출적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하마구치는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유독 <심도>에서 소통의 도구로서 ‘말’(대화) 외에 ‘사진’(이미지)을 전면적으로 채택한다. 정확히는, ‘사진을 찍는/찍히는 행위'에 대한 강조. 이런 맥락은 하마구치의 연출 방법과 더불어 메타적으로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배환과 류는 작가와 모델이라는 관계 속에서 몇 번의 사진 작업을 하면서 자기 자신과 상대방(타자)에 대해서 알아간다. 먼저 배환은 일본에서 우연히 마주친 소년에게 모델로서 묘한 매력을 느끼고, 같이 사진 작업을 하면서 류의 잠재능력을 발견한다. 또 류에게 잠재된 무언가를 찍으려고 노력하면서 작가로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쾌감을 느낀다. 한편, 류는 자신의 잠재능력을 알아봐준 배환과 작업하고, 그 결과물을 보면서 처음으로 신뢰받고 존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이전까지 몰랐던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과 가능성을 발견해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배환과 류는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같이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배환과 류는 링크되었지만, 그러지 못한 길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길수가 둘의 관계에서 빠진 뒤 처음으로 배환과 류는 통역자 없이 단둘이 남게 된다. 둘은 공항으로 갔다가 서울행 비행기가 결항하는 바람에 근처 호텔로 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둘은 딱히 대화를 하진 않는다. 그리고 각자의 방에서 밤새 숙고할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고, 둘이 결심한 것은 ‘헤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소통의 불완전함 때문은 아니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할 정도로 친밀해졌기에 언어적인 장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헤어지기로 결정한 것은 왜일까? 일단 배환과 류가 같이 한국으로 가려는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면, 단순히 감정적으로 링크가 되어 둘이 한국으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감정적 링크 이면에 각자의 도구적 목적이 있다. 일종의 동상이몽적 상황. 배환은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소년 류를 모델로 만들어 작가로서 느끼는 권태로움을 이겨내려고 한다. 한편, 류는 조직에서 도망쳐 나온 입장에서 어디로든 도망을 가야 한다. 물론 이런 도구적 목적 자체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배환과 류는 서로의 니즈를 충족하는 선에서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같이 떠나기로 했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둘은 작가와 모델로서 느끼던 감정이 다른 감정으로 전이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배환과 류가 호텔에 도착해서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가 서로 다른 타이밍에 한 번씩 나와서 상대방의 방 앞에서 서성이던 씬을 상기해보자. 이는 분명 배환과 류가 서로에게 동성애적 감정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이 감정이 언어적인 맥락이나 일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둘이 서로에게 느끼는 가장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배환은 결혼을 해서 자식이 있다. 그래서 배환은 전화벨소리가 울리자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편, 류 역시 배환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류는 배환의 방문을 열지 않고 바에서 술이나 마신 것이다. 왜냐하면 배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선을 넘으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둘의 관계, 특히 작가와 모델의 관계가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둘은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기에 별일 없이 밤은 지나갔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각자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그래서 둘은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렇게 아침이 밝고, 둘은 서로의 방문 앞에 잠시 서서 어떤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하고 따로 택시를 탄 뒤 각자 갈 길을 간다. 그렇다면 짧지만 강렬한 교류의 결과로서 헤어짐은 각자에게 상처만 남긴 것일까? 그렇진 않다. 하마구치가 했던 말이 있다. 교류와 과정에서 “가치관이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퇴행적인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상처와 균열은 또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헤어짐이 배환과 류에게 남긴 교훈이자 가치이다. 결국, 배환과 류는 이 상처와 균열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삶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6.
‘교류'에 관한 하마구치의 이 말, 서문에도 인용했던 이 말은 <심도>의 제작 배경과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여러 번 음미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심도> 이후 하마구치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마구치는 “<심도>를 찍은 후, 이제부터는 정말 내 자신이 찍고 싶은 것만 찍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자나 깨나>까지 상당히 수월하게 진행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즉, <심도>는 하마구치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던 것 같다. 다만 하마구치는 <심도>를 작업하면서 소통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타자의 타자성을 긍정하며 교류하는 방식, 그리고 교류의 끝에 헤어짐을 마주하더라도 그 헤어짐에 가치가 있음을 배웠다. 이는 분명 하마구치가 이후 작품을 작업하는 방식이나 이야기의 주제를 잡는 데 있어서 어떤 의미로든 영향을 끼쳤다. 결국 <심도>는 일종의 메타 영화, 혹은 ‘하마구치 연출 방법'의 프로토타입 모델이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하마구치 필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하마구치의 <자나 깨나> 이후 신작 <Our Apprenticeship>(‘우리의 견습 수업' 정도로 직역이 가능할 것이다.)에서도 <심도>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시놉시스에 따르면, <Our Apprenticeship>은 한때 아이돌이었던 일본 소녀 나오미가 연기를 배우기 위해 파리에 있는 드라마 스쿨에 가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가치와 에너지를 얻는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나오미는 프랑스 게이 커플인 피에르와 장, 시리아 출신의 타힘, 벨기에 출신의 메리, 한국 출신의 여배우 소니와 친구가 된다. 이 친구들은 한 가지 규칙을 정하는데, 바로 ‘각자의 모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가 인상적이다. 나오미가 떠나는 날, 공항엔 소니만 배웅하러 온다. 이때 나오미는 소니에게 “나는 너를 항상 좋아했어. 그런데 말하기가 두려웠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니는 나오미의 손을 잡은 채 “그런 말 하게 해서 미안해. 나도 너를 무척 좋아해.”라고 답한다. 둘은 웃으며 포옹하고 영화는 끝난다. 아직 시놉시스만 읽은 상태라 조심스럽지만, <Our Apprenticeship>은 상황 설정이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심도>가 분명 떠오른다. 특히 ‘각자의 모국어로 대화를 하는 규칙'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헤어지는 설정'은 <열정>, <심도>, <친밀함>과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 <Our Apprenticeship>은 하마구치가 판이 좀 더 커진 <심도>를 파리에서 다시 찍는 작품이 될 것인가? 혹은 외국에서(적어도 지금까지 본 하마구치 영화에서 일본 바깥의 국가가 배경인 적은 없었다.) 자신의 초기작들의 변주를 시도하는 작품이 될 것인가? 물론 아직 확신할 순 없다. 다만 조만간 하마구치가 흥미로운 결과물을 가지고 돌아올 것임은 분명하다. 벌써부터 <Our Apprenticeship>이 기대가 된다.



※참고자료

1. 백종현, “[인터뷰] <심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현실의 균열 속에서 영화는 탄생한다””, 맥스무비, 2011년 3월 16일, http://news.maxmovie.com/85818
2. 심윤보, 이주익, “<심도> : 해외공동제작의 모든 것”, 한국영화아카데미 네이버 블로그, 2011, https://blog.naver.com/kafafilm/40125653909
3. 정성일, “[리뷰] <리바이어던> - 뤼미에르의 순간”, 서울아트시네마 티스토리 블로그, 2015, https://trafic.tistory.com/entry/리뷰-리바이어던
4. 정한석, “<루이 14세의 죽음>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 2018년 6월 30일
5. 하마구치 류스케, “하마구치 류스케 인터뷰 1. 오오데라 신스케와의 대담”, 월간소식지 『시네마테크 Cinematheque』 vol.166, 2019, pp. 12-15
6. 하마구치 류스케, “하마구치 류스케 인터뷰 2. 홍상현과의 대담”, 월간소식지 『시네마테크 Cinematheque』 vol.166, 2019, pp. 16-18
7. 하마구치 류스케, “<열정>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2019년 6월 1일
8. 하마구치 류스케, “<아사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2019년 6월 2일
9. HAMAGUCHI Ryusuke, “<Our Apprenticeship> Synopsis”, The Hong Kong - Asia Film Financing Forum, 2019,  https://www.haf.org.hk/upload/files/project/20190118143554_2358.pdf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 地球最后的夜晚>(2018)에 관한 몇 가지 노트, 혹은 59분의 롱테이크로 구성된 2부의 (시)공간에 관한 가설


  • 참고: 본문에서 사용된 영화 이미지는 합법적으로 다운받은 영화 파일에서 캡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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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 스포일러에 민감한 사람들을 위해 글을 취지를 문장으로 적자면 다음과 같다. 바로 ‘<지구 최후의 地球最后的夜>(2018) 극장에 걸려 있는 동안 놓치지 말라는 '이다. 최근 네이버에서 <지구 최후의 > VOD 스트리밍/다운로드 서비스가 시작된 것으로 보아 극장에 오래 걸려 있을 같지 않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1.
올해, 현재까지의 시점을 기준으로,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처음 작품 중에서 혹은 국내 정식 개봉한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흥미로운 작품을 하나 고르라면, 단연 비간의 <지구 최후의 > 뽑을 것이다. <지구 최후의 > 2018 국제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고, 국내에선 7 25일에 정식으로 개봉하여 극소수의 상영관에서 상영 중이다.

(여담. 만약 작품 외에 개를 뽑는다고 한다면, 목록엔 그레미용의 영화들, -마리 스트라우브의 <호수의 사람들>(2018), 아녜스 바르다의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2019), 하마구치 류스케의 <심도>(2010) 동일본 대지진을 다룬 다큐멘터리 3부작, 야마모토 아키라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줘>(2018),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있어>(2018), 브루노 뒤몽의 <꽥꽥과 잉여인간>(2018), 마리아노 이나스의 < 플로르>(2018), 자무시의 <데드 다이>(2019),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2018), 봉준호의 <기생충>(2019) 등이 포함될 것이다.)

2.
사적인 기억. 저번 영상자료원에서 호기심 , 의심 반인 상태로 <지구 최후의 > 처음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고 나서 영화에 즉각 반하게 되었다. 반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특히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나의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영화를 보고 노트에 적었던 것을 취합해서 다시 정리한 것이다.)

3.
먼저, 영화를 보고 있으면, 2 구성(엄밀히 말하면, 프롤로그까지 포함해서 3 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에선 프롤로그 이후에, 타이틀이 뜨기 이전과 이후를 각각 1부와 2부라고 정했다.)이나 숏의 구도, 롱테이크 등의 형식적 측면에서, 그리고 (혹은 ), 폐허, 기차, 기억, 시간 등의 소재적 측면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는다는 서사적 측면에서 여러 영화/감독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실 이는 비간이 의도한 지점 같기도 한데, 예를 들어 데이빗 린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알랭 레네, 왕가위,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허우샤오시엔의 경우, 엔딩 크레딧 'THE DIRECTOR WISH TO THANK'에도 이름이 적혀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타르코프스키를 교집합으로 해서, 비간( 카메라)() 유사하면서도 다른 '왕빙' 종종 떠오른다. 왕빙은 여러 인터뷰에서 타르코프스키를 언급했고, 심지어 집에 『봉인된 시간』을 두고 자주 읽는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 등이 떠오른다. 물론 이런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인용들(혹은 오마주의 이미지들) 찾아내는 작업 자체는 별로 생산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점에서 유운성 평론가의 지적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 최후의 > 세계에서 이런 인용들은 정합적으로 해석이 가능하게끔 평화롭게 공존해있는 상태가 아니다." "사실은 전체적으로 해체가 되어 있다." "문화적 산물들을 가져와서 지금 영화의 상태에 상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식의 요소들, 사물들, 인물들이 평화롭게 혹은 정합적으로 공존할 있는 세계를 영화로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솔직한 영화다." 결국 <지구 최후의 > 파편화된 기억과 인용들(혹은 오마주의 이미지들) 나열(1. 개의 시간대가 평행적으로 진행되는 서사) 종합(2. 개의 시간대,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일종의 꿈의 서사)으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있다. 바로 지점에서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인랜드 엠파이어>(2006) 처음 보고 느꼈던 충격과 감흥을 <지구 최후의 > 보면서 느꼈던 같다.

한편, <지구 최후의 > 비간의 장편 데뷔작 <카일리 블루스 路邊野餐>(2015)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오히려 <지구 최후의 > 2부에서의 대담함(특히, 새가 그려진 탁구채를 돌렸을 돌연 1인칭 시점 숏으로 전환된 , 카메라가 날아오르는 순간) <카일리 블루스> 때보다 나아간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카일리 블루스> 역시 수작이며, 특히 중후반부에 카메라가 갑자기 오토바이를 따라가는 것을 그만두고 샛길로 빠졌다가 다시 쫓아가는 순간은 잊지 못한다. 이처럼 촬영하던 피사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움직이는 카메라 무빙은 <지구 최후의 > 엔딩에서 반복된다.) 어쨌든 비간은 자신이 영화나 문학 등지에서 배운 것들을 '시네마' 영역에 끌고 들어오는데, 방식이 21세기, 특히 2010년대의 현재 시네마의 상태, 부서진, 위태로운 상태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방법론을 비간은 <카일리 블루스>에서 처음 시도한 <지구 최후의 >에서 변주, 반복하고 있다.

4.
다음으로 흥미로운 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도 이어지는데, 바로 2부에서 펼쳐지는 시공간이다. 개인적으로 파편화된 1부보다 이를 봉합한 2부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봉합의 방식이 바로 '롱테이크'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2부는 59 동안의 롱테이크로 진행된다. '59 동안'이라는 시간이 지속된다는 . 끊어지지 않는 숏들을 통해 시공간의 통일성을 유지한다는 . 나아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최대한 미루려고(혹은 회전하는 집에서 사랑을 나누기엔 너무 짧은 밤을 최대한 늘리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의 중반부에 뤄홍우(황각) 당마이에 가서 완치원(탕웨이) 찾는다. 9시에 그녀의 공연이 있다하여 그때까지 시간이 뤄홍우는 어느 극장에 들어간다. 극장에 앉은 3D 안경을 쓰고 벽에 기댄다. 이때 갑자기 '지구 최후의 ' 타이틀이 뜨고 뤄홍우는 어둠 속을 헤쳐서 어느 집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추후 '꼬마 백묘'라고 부를 12살짜리 소년을 만난다. 뤄홍우는 소년에게 자기가 극장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어두운 미궁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년은 탁구 시합을 해서 이기면 이곳에서 나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뤄홍우가 탁구 시합에서 이겨서 소년은 뤄홍우를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케이블을 타는 곳까지 안내해준다. 뤄홍우는 케이블을 타고 당구장이 있는 곳까지 내려온다. 그곳에서 완치원인 같아 보이는 (그러나 '카이전'(카일리의 진주라는 )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만난다. 타이틀이 뜨고 뤄홍우가 어둠 속을 헤쳐나가는 순간부터 영화는 계속 롱테이크로 진행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2부는 과연 무엇인가? 흔히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 이후에 진행되는 2부부터가 '영화' 것인가? 실제로 뤄홍우가 극장에 들어가서 3D 안경을 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부는 뤄홍우가 영화인가, 아니면 뤄홍우가 영화를 보다 잠들어서 꿈인가. 다른 질문. 59 동안 숏이 단절되지 않으면서 1부에서 언급되었던 정보들과 묘사되었던 소재들이 변주되어 2부에서 반복되고 있는 전개 방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과 관련해서 데니스 림의 언급은 참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데니스 림은 2부를 "한밤의 "(a nocturnal dream)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비간의 롱테이크를 두고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압축' 개념, 안에 쌓이는 강도를 우리가 아는 형태로서 현실의 보호벽이 파열되기 직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보고, 이에 "비간은 정신적 영역을 창조하는 동시에 육체적 감각을 전달하는 영화의 잠재력에 관심이 있다" 덧붙이며, 결국 2부는 "생생한 , 자유로이 부유하는 의식의 체현이라는 다른 유형을 모의하" "(...) 카메라를 돌리며 움직이는 인물들과 회전하는 , 덧없음의 상징임에도 터무니없이 오래 타는 폭죽을 보여주" "(...) 모든 실은 일종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각성을 유보하기 위한 안간힘"이라고 평한다.

5.
잠시 우회. 데니스 림의 "비간은 정신적 영역을 창조하는 동시에 육체적 감각을 전달하는 영화의 잠재력에 관심이 있다." 표현으로부터 기인한 생각. 사실 '육체적 감각을 전달하는 영화의 잠재력' 관심이 있는 감독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독은 바로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다. (물론 앞서 잠깐 언급했던 '왕빙' 영화들, 예를 들어 <철서구>(2003), <중국 여인의 연대기>(2007), < 자매>(2012),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 <타앙-경계의 사람들>(2016), <사령혼>(2018) 등도 떠오르긴 한다.) 임재철 평론가는 <너무 이르거나/너무 늦은>(1982) 두고 풍경을 보여 주는 장면이 지나칠 정도로 길어서, 보는 자체가 거의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들을 통해서 스트라우브-위예가 노리는 것은 보는 것의 고통을 통해서 결코 주관적인 의미로는 환원되지 않는 이집트의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의 신체적으로까지 감지하도록 하는 "이라고 덧붙였다.

'거의 신체적으로까지 감지하도록 하는 ' 밑줄.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는 카메라(비간) 혹은 오랜 시간 동안 고정된 카메라(스트라우브-위예) 통해 '거의 신체적으로까지 감지하도록 하는 '. 달리 말해, 비간과 스트라우브-위예는 분명 서로 다른 방법론을 자신의 영화에 적용하지만, 궁극적으론 모두 "물질화된 감각"(태그 갤러거) 관객에게 전달하는 관심이 있다. 이는 비간이 <지구 최후의 > 2부를 후반 작업에서 3D 컨버전한 사실과 겹쳐볼 보다 확실해진다. 원래 비간의 의도대로라면 영화의 중반부에서 뤄홍우가 3D 안경을 관객들 역시 3D 안경을 끼고 2부의 시작을 맞이해야 한다. (국내에선 안타깝게도 2부를 3D 상영하는 극장은 없다.) 이처럼 중간에 감상 방식을 바꿈으로써 관객과 영화 인물인 뤄홍우를 동일화시키는 전략은 "물질화된 감각" 관객에게 보다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있다.

하지만 비간이 스트라우브-위예의 방법론을 계승해서 영화를 찍고 있다고 없다. 일단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들은 임재철 평론가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크게 '번역의 영화들' '탐구의 영화들' 나눌 있다. '탐구의 영화들' 계열의 스트라우브-위예 영화들(<역사 수업>(1972), <쇤베르크의 영화 반주 음악 입문>(1973), <구름에서 저항까지>(1979), <너무 이르거나/너무 늦은> ) 국한해서 생각해보면, 스트라우브-위예는 어떤 공간에 직접 , 그곳에서 마주한 평화로운 풍경 등에서 저항과 투쟁의 흔적을 읽어낸다. 이런 식으로 스트라우브-위예는 어떤 공간의 객관적인 현실에서 기인하는 감각들을 물질화하는 관심이 있고, 이것이 바로 스트라우브-위예의 이미지의 (정치적) 목적이다. 임재철 평론가가 언급한 바대로 스트라우브-위예는 "(본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자체에 대해 고민한 고다르와 달리) 보는 것에 대한 성찰 이전에 보는 자체에 집중하며, 그러한 보는 과정을 통해서 보는 방법 자체를 배울 있다고 믿" 감독이다. 그래서 스트라우브-위예는 카메라에 잡히는 사람들을 전혀 방해해선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이런 맥락에서 가장 완벽한 '도덕적인 지점'(moral point)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비간 역시 어떤 공간에 직접 간다. 바로 자신의 고향 카일리에 말이다. 여태까지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거의 조명된 적이 없는 카일리. 이곳이 바로 비간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다. 비간은 <카일리 블루스> 두고 "사적인, 개인적인 작품"(a private, personal piece)이라고 밝힌 있다. 달리 말해, 비간이 자신의 영화에서부터 카일리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아마 그곳이 자신이 아는 공간이고 자신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여기서 스트라우브-위예와 차이가 있다. 비간은 자신이 아는 공간, 아니 자신이 살았던 공간으로 직접 , 그곳에서 자신의 기억과 마주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 '지역과 관련한 기억'(예를 들어, 먀오 전통문화(죽관악기 생황 ) 인물, 장소에 대한 기억. 특히 어머니는 미용사고 아버지는 운전수였던 기억) '시네필리적인 기억'(예를 들어, 영화 수업이나 다운로드해서 봤던 영화 등에서 배운 ) 모두를 함축한다. 기억은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가면서 필연적으로 흐릿해지고 왜곡된다. 여기서 비간은 기억 혹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 아니 그것을 붙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불가능함을 깨닫는 "각성"(데니스 ) 순간을 최대한 늦추는데 효과적인 매체로 영화를 택했다. 그리고 비간은 늦추는 방식으로 롱테이크를 택하는데, 방식을 통해서 기억과 시간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화할 있다고 믿는다. 바로 지점에서 아피찻퐁이나 타르코포스키의 영향을 발견할 있다. 달리 말해, 비간의 ()에서 아피찻퐁이나 타르코프스키적 이미지가 아른거린다면 그건 단순한 오마주의 맥락 이상으로 비간이 그들의 태도와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6.
기억과 역사에 관한 짧은 노트. 유운성 평론가는 '개인적 추억이나 공동체적 기억의 상상적 집합' '역사' 구분하면서 "역사는 무한에 대한 사유, 무한한 잠재적 기억들과 추억들까지도 포괄하는 보편적 사유이며 따라서 앞서 언급한 상상적 유한집합으로부터 역사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도약' 필수적이다. 역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말했다. 이에 "역사는 가상이고 환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실재의 행위와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상이요 환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불필요한 허구는 아니"역사를 발견한다는 것은 윤리적 탐색을 가능케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덧붙인다. 만약 역사를 가상이 아니라 실체라고 믿고 단지 도덕적 교훈을 담은 이야기들의 더미로 보는 태도로부터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단지 "무용담이나 음모의 스릴러가 수밖에 없다."

비간이 영화에 자신의 기억을 끌고 들어왔기에 중국의 통상적인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와는 다소 달라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간의 영화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사실 얼핏 보면 비간의 영화는 단순히 비간의 기억이 파편화되어 산재된 영화 같다. 하지만 표현에 보다 적합한 작품은 비간의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요나스 메카스의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2000)라고 생각한다. (물론 메카스의 <우연히(...)> 역시 단순히 기억이 파편화되어 산재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메타적으로기억기억을 다루는 영화 대해서 사유할 있는 시간( 5시간) 제공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메카스와 달리 비간은 가지 차원의 층위를 만든다. 하나는 자신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의 이야기, 픽션이다. 그리고 둘을 섞어나가기 시작한다. 사실 관객의 입장에서 둘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픽션의 주요 서사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있다. ‘<카일리 블루스> , <지구 최후의 > 뤄홍우는 각각 자신이 사랑하지만 사라져버린 사람(전자는 웨이웨이, 후자는 완치원) 찾는다. 과정에서 자신의 기억과 지나간 시간을 마주한다.’ 이런 탐색과 여정의 서사 자체에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가상의 인물들이 마주하는 기억과 지나간 시간이 바로 비간의 기억과 지나간 시간과 뒤섞여있다는 것이다. 가령 가상의 인물들이 만나는 사람들(이발사, 의사, 트럭 운전사, 경찰관 ) 머무는 공간, 겪는 날씨 그리고 이런 것들을 포착하는 숏의 구도, 방식 등에서 우리는 비간의지역과 관련한 기억'시네필리적인 기억' 흔적을 찾아볼 있지 않은가.

지점에서 잠시 <지구 최후의 > 서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같다. 1부는 개의 시간대가 평행하게 진행된다. 심지어 개의 시간대는 뒤죽박죽 섞여서 편집되어 있다. 개의 시간대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파악해볼 있다. 먼저 뤄홍우가 완치원을 찾는현재' 시간대가 있다. (물론 시간대가 명확하게현재'인지 없으나, 기준을 잡기 위해 일단현재 표기한다.) 그리고 뤄홍우와 완치원이 사랑을 나눴던과거' 시간대, 2000 여름이 있다. 먼저 현재의 뤄홍우는 카지노를 운영 중이다. 뤄홍우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카일리로 돌아간다. 카일리로 돌아가면서 친구 백묘의 죽음을 떠올린다. 과거에 백묘는 노름빚 때문에 도망 다녔다. 백묘는 줘홍위안에게 사과를 예정이었는데, 뤄홍우가 나중에 듣기로 그는 갱도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카일리에 도착한 뤄홍우는 어머니 식당에서 고장 시계를 가지고 나와 빗물이 새는 폐가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시계 뒷면에 있는 여인의 사진을 꺼내어 본다. 누군가 담뱃불로 지진 것인지 사진 여인의 얼굴을 알아볼 없다. 이때부터 과거 자신의 애인이었던 여인, 완치원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완치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서 말이다. 타이자오메이, 완치원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왕즈청, 백묘 어머니, 당마이 술집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완치원을 확실하게 만날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당마이의 술집에 당도한다. 그런데 완치원의 공연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극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3D 안경을 쓰고 벽에 기댄다. (이후에 뤄홍우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극장에서 잠에 들었다.) 이것이 현재의 마지막 숏이다. 한편, 과거의 뤄홍우는 자신의 친구 백묘를 죽인 갱의 보스 줘홍위안을 찾기 위해 그의 애인인 완치원을 미행한다. 산사태로 인해 멈춘 기차 안에서 뤄홍우는 완치원에게 줘홍위안이 어디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완치원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결국 뤄홍우는 그녀를 어머니 식당에 데려가 같이 저녁을 먹고, 계속 트럭을 타고 쫓아다닌다. 어릴 사라진 친어머니와 닮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둘은 가까워지고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얼마 후에 완치원은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줘홍위안이 카일리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완치원은 아이를 지운다. 뤄홍우는 아예 카일리를 떠나 멀리 미얀마로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줘홍위안에게 들켜 둘의 도망 계획은 실패한다. 둘은 줘홍위안에게 잡혀있다 도망쳐 나와 줘홍위안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뤄홍우는 극장에서 줘홍위안이 앉은 의자 뒤에 총을 가져다 댄다. (실제로 총을 쏴서 죽였는진 없다.) 이것이 과거의 마지막 숏이다. 현재 시점에서, 당마이의 극장에서, 페이드 아웃된 타이틀이 이어지는 2. 2부는 뤄홍우가 어둠 속의 동굴을 헤쳐나가면서 시작하는데, 뤄홍우가 길을 잃은 이곳에서 뤄홍우는(혹은 관객은) 현재와 과거의 기억들이(혹은 1부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이) 뒤섞여 자신의 앞에 펼쳐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뒤섞임은 픽션 인물의 기억과 비간의 기억의 혼재다.

2부에서 펼쳐지는 ()공간은 뤄홍우의 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2부에서 뒤섞여 나오는 것들의 출처나 시작과 끝을 정합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비간은 픽션 인물의 기억과 자신의 기억을 뒤섞은 이것들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있는 세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간은 이것들이 서로 공존할 없는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불가능함 자체를 노출하는 방식의 전략을 취했다. 방식이 <지구 최후의 > 서사를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이런 작업은,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영화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메타적으로 보자면, <지구 최후의 > 가지 차원의 층위 가상의 서사, 픽션은 비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잠재적 기억으로 있다. 그리고 비간은 기억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물질화하려고 한다. 데니스 림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간은구체적인 장소와 문화, 그리고 세대적 감수성에 뿌리내리고 으며, “꿈과 기억에 대한 영화적 어휘를 제력하기 위한 비범할 정도로 대담하고 광범위한 원정" 하고 있다. , 비간은 구체적인 장소와 문화, 세대적 감수성으로부터 비롯한지역에 관련한 기억'시네필리적인 기억' 바탕에 두고 허구적인 이야기인 픽션을 직조하는데, 직조된 픽션 자체가 비간의 무한한 잠재적 기억 하나라면, 이것을 영화화(오디오-비주얼화)하는 것은 가능태(잠재태) 현실태로 발전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있다. 그렇다면 과정을 개인적 기억이 픽션이라는 허구적인 방식을 통해 역사로 이행하는 도약의 과정이라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비간의 기억 기억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들어진 픽션( 사실상 비간의 무한한 잠재적 기억이라고 있을 텐데.)’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뒤섞이고, 결과물인 <카일리 블루스> <지구 최후의 > 비간이 (어쩌면 현시점에서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역사의 형상을 발견하면서 윤리적 탐색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7.
4 번째 문단에서 던졌던 질문과 관련해서 5 6에서 미약하게나마 사유해봤다. 5 6에서 이어지는 추가적인 가설. 2(라는 픽션)() 비간의 무한한 잠재적 기억 하나라면, 2부에서 펼쳐지는 ()공간은 무엇인가. 공간은, 뤄홍우가 극장에서 잠들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꿈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확신할 없다. 사실 뤄홍우의 기억, 무의식, 뤄홍우가 감상한 영화, 혹은 뤄홍우가 감상한 영화와 꿈의 혼합 등으로 얼마든지 공간을 표현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간이어떤 곳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혹은 불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그래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는 작업은 뒤로하고, 오히려 중요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공간의 특성이다. 공간은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같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무시간적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왜냐하면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면 모든 사물과 사람의 움직임이 정지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없다. 이와 관련한 정보가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점에서 <지구 최후의 > 엔딩 숏을 상기해보자. 아니 구체적으로, 타이틀이 이후에 시작된 숏의 57~59분이 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뤄홍우가 주문을 외운다. 집이 회전한다. 뤄홍우와 카이전이 키스를 한다. 그리고 돌연 카메라는 둘을 찍고 있다가 떨어져 나와 그들이 걸어 나온 길을 그대로 다시 돌아가서 카이전이 노래를 부르려고 기다리던 대기실로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카메라가 응시하는폭죽'이다. 이전에 대기실에서 나눈 뤄홍우와 카이전의 대화 상기. 뤄홍우가 시계를 두고 카이전은영원' 의미한다고 말했으며, 카이전이 폭죽을 두고 뤄홍우는잠깐' 의미한다고 말했다. ‘잠깐 상징하는 폭죽. 그런데 카메라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서 폭죽을 응시하자, 그제서야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혹은덧없음의 상징임에도 터무니없이 오래 탄다.”(데니스 ) 그렇다면 폭죽은 공간의 규칙을 배반한 사물인가? 왜냐하면 원래 공간에선 카메라가 응시하지 않더라도, 프레임 바깥에선 사물과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간의 특성이자 규칙이다. 그렇다면 폭죽은 집이 회전하고 있는 동안 탔어야 한다.

잠시 우회해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앞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카메라로 찍은 영상물을 아무도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멈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프레임 바깥의 세상은 언제나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카메라가 응시하지 않더라도, 프레임 바깥에선 사물과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말은 당연한 말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항상’, ‘ 순간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혹은 우리는 아예 프레임 바깥의 세상을 잊은 프레임 , 스크린 위에서 상영되고 있는 숏의 연쇄에 집중하기에 바쁘다. (나쁘게 말하자면, 관객은 흔히 수동적으로, 프레임 안에만 시선이/의식이 갇혀 주어진 너머, 숏이 미처 담지 못한 시공간(세상) 능동적으로 상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구분해야 것이 있다. 다큐멘터리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이란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한편, 영화, 특히 완전 픽션을 추구하는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이란 감독이 직조한 가상일 것이다. 그리고 형상-픽션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은 현실이자 가상, 아니 사이의 미묘한 상태일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잘라 구분할 없으며, 오히려 프레임 바깥이 현실이냐 가상이냐는 결국 정도의 차이라고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화에는 현실과 가상이 모두 어느 정도는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샹탈 아케르만 같은 감독은 여러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며 구분이 중요하지도 않다.” 말하지 않았던가.

사실 프레임 바깥의 세상을 지속적으로, 적극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숏과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여 숏이 담아내고자 하는 시공간(세상) 하나의 일관된 시공간(세상)으로 인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레임 바깥의 세상까지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앙드레 바쟁적 의미의) ‘토탈 아카이빙적 이상(理想)’ 관련이 있다고 있다. 물론 이상은 세계를 통째로 기록해서 보관할 있는 가상의 기계 장치로만 실현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아카이빙' 하나의 신화이자 규제적 이념으로서 작동하는데 이념을 여러 감독들이 각자의 리얼리즘을 통해 수행했다. (그럼에도 채울 없는 잉여가 있고, 바로 잉여의 자리가 미학의 자리라고 있다.) 리얼리즘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아마도쁠랑-세깡스’(plan-sequence) 것이다. 그대로하나의 하나의 장면 되게 만들어 숏과 사이의 단절을 피하고, 시공간을 오롯이 담아내(려고 노력하) 방법이다. 하지만 쁠랑-세깡스, 롱테이크에서도 여전히 프레임의 한계를 피할 없고, 그래서 적극적으로사운드' 활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운드의 출처를 프레임 안과 모두에 두는 것이다. 이렇게 프레임 안과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면, 관객은 프레임 바깥까지 (순간적으로) 의식하게 되고, 바깥 어딘가에 사운드의 출처가 있을 거라고 생각,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 이런 방식을 통해 프레임 안에만 관객의 시선이/의식이 갇히지 않고 바깥으로까지 확장되며, 관객은 숏에 담기지 않은 시공간까지 상상하게 된다.

아마 이런 작업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던 사람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21세기에 들어와 돌연 대의 디지털카메라만을 안에 고정해서 찍은 <>(2002) 내놓았다. <>에서 우리는 택시를 타고 움직이는 운전자와 승객 명의 얼굴만 있다. 하지만 단순한 방식은 단숨에 우리를 낯선 이란의 택시 안으로 데려다 놓는다. 택시 창문 너머로 들리는 사운드(프레임 바깥의 사운드) 운전자와 승객의 대화만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란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 실험을 밀고 나간 작품은 <파이브>(2003)이다. 75 정도의 러닝타임 동안 다섯 개의 프레임만 나오는 영화. 프레임당 10~30 정도 파도와 지나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오리들을 그저 응시하는 전부인 영화. 응시의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까지 적극적으로 상상하라는 것이다. 이후 키아로스타미는 <쉬린>(2008) 내놓았다. <쉬린> 「코스로우와 쉬린」이란 연극을 보고 있는 여배우들의리액션'만을 카메라가 응시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프레임 바깥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상상해서 각자 재구성하게끔 만드는 영화이다. 그리고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에서 나아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24프레임>(2017)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물론 <쉬린> <24프레임>사이에 개의 단편들과 편의 이란 바깥에서 찍은 장편 극영화가 있다. 편의 극영화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의 숏은 주어진 세계 안에서의 입방체라고 불렀다. 그래서 모든 숏은 6개의 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롱테이크가 영화를 보는 사람이 주제 전체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정성일) 요컨대, 키아로스타미는 프레임의 한계를 한계라고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이것이 영화를 예술로 만들어 주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키아로스타미는 프레임 안을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응시하고, 듣는다면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으로 프레임 안을 바깥까지 확장하여 넓힐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그에 따르면,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각자의 능동적인 상상의 참여가 동반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고정된 숏을 보면서도 숏이 미처 담지 못한 시공간을 상상한 다음 시공간에 몰입해서 영화의 주제 전체를 체험할 있다. 이런 점에서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을 전적으로 믿었던 감독이라고도 있다.

하지만 이제 시네마는 VR 흐름을 타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다. VR 관련한 이론이 아직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았고, 여전히 VR 영화라고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네마의 VR로의 흐름 자체를 부정할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2D 스크린 위에 상영하는 포맷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 키아로스타미의 계보를 잇는 감독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을뿐더러 더욱이 관객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프레임을 오랜 시간 응시하면서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상상할 있는지 의문이다. 달리 말해, 키아로스타미가 믿는 것처럼 관객들은 프레임 바깥을 상상할 있는 능력이 있는가? 비교적 젊은 시네필인 비간은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 등의 경로를 통해 영화를 접했다고 밝힌 있다. 비간은 자신의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키아로스타미가 믿는 그런 관객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비간이 관객들이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상상할 있는 능력이 아예 없다고 믿는 회의주의자는 아닌 같다. 그래서 비간은, 키아로스타미의 노선과는 다르지만, 관객들이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보다 쉽게 인지하고 상상할 있게끔 그들에게 친숙하지만 기존의 영화들에서는 아직 적이 없는 그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마치 VR 영화에서나 볼법한 그런 공간. ‘VR 공간'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그런 공간. 그렇다. 많이 우회했지만, 다시 돌아가서 <지구 최후의 > 2부에서 펼쳐지는 이상한 공간의 특성을 파악해보면 이는 ‘VR 공간'이라고 정의할 있을 같다. 물론 <지구 최후의 > 2D 스크린 위에서 상영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를 착용하고 감상하는 VR 영화만큼 프레임의 한계를 벗어나 영상이 전달할 있는 정보량을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비간은 VR 공간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하나의 ,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종종 1인칭 시점 (케이블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이나 탁구채에서 새를 소환하여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순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2부를 마치 VR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를 두고 비간이 <지구 최후의 > 2부에서 VR 영화를 스크린 위에서 펼쳐 보이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말한다면 이는 과언일까?

VR 공간을 사유하는 방법 가지는 게임 공간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어느 공간에 진입하면 공간의 사물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 게임 공간은 무시간적 공간인데 다만 플레이어가 머무는 동안 내내 돌아가는 그런 공간이다. 이것이 게임 공간의 특성 혹은 규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의 시각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NPC 다른 플레이어 등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며 예민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끊임없이 인지하려고 노력한다. 요컨대,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잠재적인 이미지, 정보, 자극들에 포위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공간을 영화에 끌고 들어온다면, 관객은 게임 플레이어처럼 자기가 보고 있는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항상', ‘ 순간' 돌아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고, 프레임 바깥의 시공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구성하기 시작하며 결국 프레임 안과 밖에 걸쳐있는 공간을 하나의 일관된 공간으로 인지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바로 이런 지점을 비간이 노린 것이며, 이런 이유로 2부에서 펼쳐지는 공간이 VR 공간의 특성을 띠게 만든 것이다. 덧붙이자면, 뤄홍우가 겪는 일들도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처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들이 많다. 가령 뤄홍우가 처음 도달한 집에서 마주한 12 소년을 게임 NPC 있다면, 소년이 제시한 제안, 탁구 시합을 해서 자기를 이기면 나가는 곳을 알려주겠다' 것도 일종의 플레이어가 해결해야 하는 퀘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에선 일어날 없는 일들, 예를 들어 탁구채를 돌렸더니 새가 소환된다든지, 폭죽이 오랫동안 타는 역시 공간의 규칙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이 VR 공간(이자 게임적 공간)임을 입증하는 증거들로 봐야 것이다.

8.
1부에서 완치원은 뤄홍우에게우주가 아닌 이상 우린 함께 없어요.”라고 말했다. 말마따나 과거에 뤄홍우와 완치원의 사랑은 이루어질 없었다. 그래서 현재의 뤄홍우는 완치원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찾아다녔으나 결국 만날 없었다. 만나기 직전에 극장에서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나게 2부의 공간은우주' 같은 공간인가? 달리 말해, 현실 속의 공간은 아닌 어떤 . 앞서 말한 것처럼 VR 공간의 특성을 띠고 있는 어떤 . 이런 공간에서나 뤄홍우는 완치원과 재회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곳에서 뤄홍우가 만난 여인은 완치원이 아니다. 완치원 같아 보이는 그녀는 사실 카이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지점에서지구 최후의 '이라는 제목을 떠올려보자. 여기서지구 최후' 정말 지구가 최후를 맞이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루의 끝인 더불어 종말 의식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같다. 실제로 뤄홍우는 종말 의식을 갖고 있다. 잠에 빠진 길을 잃어 도달한 미궁 같은 공간에서 뤄홍우는 오늘 안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완치원을 이상 만날 없으리라고 믿는다. 현실에 돌아가서, 가라오케는 아마도 철수해서 완치원은 떠났겠지만, 다시 완치원을 찾으러 가면 되는데, 뤄홍우는 이상하게도 다시 만날 같다고 믿는다. 혹은 뤄홍우는 완치원을 다시 만나고 싶은데 미궁 같은 곳에 빠졌다는 절망적인 심정에서 끝났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포기하다시피 순간에 뤄홍우는 당구장에서 완치원과 닮은 카이전을 만나게 된다. 당구장에 갇히게 둘은 탁구채에서 새를 소환해서 빠져나오는데, 이때 뤄홍우는 카이전에게 다짜고짜지금은 그냥 당신이 여자(완치원)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카이전은 뤄홍우에게 여자나 찾아가요.”라고 말하며 이상 자기를 쫓아오지 말라고 말한다. , 카이전은 자기가 카이전으로 인정받길 원하지 완치원의 대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뤄홍우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여인 역시 백묘의 어머니인 같지만 백묘의 어머니는 아니다. 여인은 뤄홍우에게 남편이 항상 거짓말을 하지만적어도 남자는 내게 달콤한 꿀을 주었다.” 따라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뤄홍우는 남편을 총으로 협박해서 여인을 데려가게 한다. 보답으로 뤄홍우는 여인으로부터 고장 손목시계를 받아낸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려고 대기 중인 카이전에게 찾아간다. 뤄홍우와 카이전, 둘은 서로 시계와 폭죽을 주고받고 날이 새기 전에 붉은 머리 여인과 남편이 살던 (그러나 타버린) 집으로 간다. 뤄홍우가 주문을 외우고 집이 회전하자, 뤄홍우와 카이전은 키스를 하기 시작한다.

2부가 시작되면서부터 없이 인물을 쫓아다니거나 종종 인물의 시점이 되기도 했던 카메라는 이때 처음으로 찍고 있던 인물들에서 벗어나 타고 있는 폭죽이 있는 대기실로 홀로 돌아간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타버렸어야 하는 폭죽을 얼마간 응시한다. 공간의 규칙을 어긴 듯한 폭죽은 공간이 사실상가상 공간'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 공간은 뤄홍우가 현실로 돌아가면 사라지는 임시적인 공간이며, ‘지구 최후의 ' 은유하는 것처럼 종말적 상황에 놓여있다. (아마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뤄홍우는 현실로 돌아가지 않을까.) 카이전이 말한 것처럼 뤄홍우와 그녀 사이의 관계는 잠깐 뿐의 관계로 종결될 것이고, 결국 뤄홍우와 카이전의 사랑은 이루어질 없다. 만약 뤄홍우와 카이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가 애틋하다면, 이유는 단순히 둘의 만남이 잠깐이라서라기보다는 뤄홍우가 이상 완치원을 만나지 못한다는 종말 의식을 갖고 그녀와의 만남을 포기한 (그녀와 닮긴 했지만 분명히 다른) 카이전과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사랑이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인지 비간은 뤄홍우와 카이전이 키스를 하기 시작할 카메라를 돌림으로써 영화 속에서 둘이 키스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겨둔 둘을 퇴장시킨다. 그리고 뤄홍우와 카이전이 조금이라도 같이 있게 하기 위해서인 타들어 가는 폭죽을 오래 응시하고자 한다. “ 모든 실은 일종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각성을 유보하기 위한 안간힘"(데니스 ) 순간. 이는 아마 비간이 뤄홍우와 카이전 커플에게 보내는 소박한 위로가 아닐까.


참고자료

1. 임재철, 「스트라우브-위예의 세계로의 입문」, 『장 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 2004, pp. 24-32
2. 태그 갤러거, 「물질화된 감각」, 『장 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 2004
3. Abbas Kiarostami, Lessons with Kiarostami, Ed. Paul Cronin, 2015
4. 정성일, “당신은 벌써 곁에 없습니다 - 정성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추모하다”, 씨네21, 2016 7 18
5. 유운성, “역량과 유령 - 영화에 대한 개의 가설", 연속 강좌: 지금, 영화란 무엇인가?, 시네마테크 영화학교, 2017 9 12
6. 유운성, 「파편들」 '역사', 『유령과 파수꾼들』, 2018, p. 24
7. 오큘로 편집부, A Critical Dictionary of Virtual Reality, 『오큘로 OKULO 8, 2019
8. 데니스 Dennis Lim, 「시간을 가로지르는 운동 Moving Through Time, 『필로 FILO 9, 2019, pp. 88-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