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2003) : 모든 장기수 선생들과 김동원 감독 자신에 대한(을 위한) 영화

  • 참고: 재학 중인 대학교 철학과 내 영화 소모임에서 발제할 때 작성했던 글입니다. (2018년 5월 24일 모임)
  • 참고2: 본문에서 쓰인 씬 넘버는 다소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송환>은 다음과 같은 자막을 삽입하면서 시작한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통일을 위해 긴 옥고를 치르신 모든 장기수선생님들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 반공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이 작품을 보셨다면 무척 화를 내셨을 것이다. 장기수선생님들도 썩 만족하시진 않을 것 같다.” 이 문구는 단순히 ‘dedicated to’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아버지모든 장기수선생님이라는 문구에 주목해보자.

먼저 아버지는 당연히 김동원의 아버지이다. 특히 이 영화가 김동원의 사적인 고백 혹은 내레이션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아버지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과 아버지와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어떤 헌사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의 어르신 전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아버지 세대의 어르신은 반공주의가 각인된 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을 찬양하는 장기수 어르신들을 다루는 이 영화는 그런 세대의 분들에게는 당연히 탐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장기수 어르신들을 영웅화하는 영화가 아님에도 말이다. 다음으로 모든 장기수선생님이라는 문구는 단순히 이 영화가 비전향 장기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향/비전향 장기수 모두를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 이 영화는 국가 폭력에 고통받은 자들을 조명하기 위함이지 비전향 장기수의 고귀한 사상적 올바름따위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송환>은 결국 아버지(의 세대)나 장기수 선생들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이념적으로 회색 지대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영화의 근본적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특정 이념 지지장기수의 영웅화가 아니라 강제전향 공작 등 국가의 거대한 폭력 혹은 역사의 폭력에 맞서 인간으로서의 존엄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상의 자유를 지키고 싶어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향서를 쓰고 안 쓰고가 각 장기수 사이의 삶에서 중대한 차이를 만들었지만, 장기수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에 영향을 주진 않은 것이다.

그리고 드라이브 장면(S#_1)이 시작된다. 영화 내에서 몇 안 되는 흑백 장면이다. 그리고 그분들을 처음 본 건 92년 이른 봄이었다. 독재 타도의 함성이 길거리를 덮던 저항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이라는 내레이션이 삽입된다. 곧바로 장기수 선생들의 얼굴로 시작하지 않고 이렇게 흑백의 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브 쇼트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내레이션을 듣다 보면 답이 나온다. 바로 두 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데리러 가는 과정을 찍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몇 안 되는 흑백 장면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 2003년에 제작이 완성된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은 2003년 이후에 이 영화를 보는 것일 텐데, 마치 이 관객들로 하여금 1992년의 그 순간으로 데리고 가는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영화 속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감독의 인터뷰를 확인한 결과, 이 쇼트는 2003년에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실제 1992년에 두 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데리러 갈 때 찍은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1992년에 찍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 시작부터 내레이션이 삽입된다는 것을 눈여겨서 봐야 한다.

영화의 제목 이후에 바로 비전향 장기수의 얼굴이나 어떤 역사적 기록물 혹은 사진을 몽타주해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감독의 결단일 것이다. 다시 말해, 비전향 장기수를 만나기 위한 일종의 마음의 준비로서 드라이브 쇼트와 내레이션은 기능하는 것이다. 내레이션이 이 영화를 찍게 된 경위 더 나아가 그 쇼트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즉 한 신부가 비전향 장기수 두 명을 우리 동네로 모셔오는 일을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쇼트 다음에 어떤 장면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 바로 비전향 장기수 두 명을 마주하는 것이다. 교도소에서 나와 어느 요양원에 계시다는 내레이션 직후에 요양원 간판을 카메라가 바라보고, 이때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된다.

그리고 199237일이라는 자막과 함께 김석형(당시 78, 30년 복역)과 조창손(당시 63, 30년 복역) 어르신 두 분이 등장한다(S#_2). 이때 이 둘을 마주할 때 느끼는 어떤 생경함. 특히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어떤 사전적 지식도 없다면 북한을 추종하는 이 둘을 마주할 때 느끼는 생경함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에 대해서 역사 수업이나 여러 기사를 통해 접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언행을 마주한 것은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특히 자막에서 ‘30년 복역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그 긴 세월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심지어 필자의 경우, 30년이라는 기간을 살아보지도 못했다. 이때 떠오르는 여러 질문. 도대체 이들은 그 세월을 어떻게 버텼는가. 단순히 그들의 고집인가? 왜 전향서를 쓰지 않고 자신의 양심을 지켰을까? 등의 질문. 이 질문이 시작되었을 때, 등장하는 한 쇼트. 바로 김석형과 조창손 어르신 사이에 김동원이 앉아있는 쇼트이다. 이때 처음으로 김동원 자신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내레이션의 주체이자 이 영화의 감독인 김동원. 스스로 카메라 앞에 등장한 이 쇼트는 이질적인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내 내레이션이 삽입된다. “어쩌다 보니 두 분 사이에 내가 앉게 되었다. 촬영이 몹시 거슬렸지만, 자리를 바꿔 앉을 수가 없었다. 촬영하러 왔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 내레이션을 듣고나자 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을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에 대한 김동원의 내적 감정과 결단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 메타적인 의미에서 영화 만들기의 고충과 어르신을 대하는 감독의 감정이 영화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송환>이 요나스 메카스의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2000)[1] 와 같은 영화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되선 안된다. <우연히(...)>와 같은 정도의 사적인 기억과 감정으로 가득찬 영화는 아니지만, 분명 <송환>에는 김동원의 사적인 기억과 감정이 담겨있다. 이는 이 영화의 한 축을 맡게 되는데, 그 시작이 바로 앞서 언급한 쇼트와 내레이션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의 태도, 결단은 그 쇼트와 내레이션을 통해 알 수 있다. , 영화를 위해, 감독 자신을 위해 장기수분들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인위적인 것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과 만남에서 발생하는 불편함(거슬림)은 감독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태도 말이다.

그다음 이어지는 장면들은 봉천동으로 차를 타고 와서 그 주민들과 어울리고, 그 당시를 회상하는 봉천동 주민(정봉수와 김순자)의 인터뷰이다. 그 인터뷰 이전에 조창손, 정봉수, 김순자, 김석형(이 순서대로 앉아서 찍힌)이 앉아있는 사진을 삽입한다. 그리고 나온 정봉수의 증언과 더불어 삽입된 자막을 보면 당시 봉천 9동 주민 운동가라고 되어있다. , 이 인터뷰는 1992년 당시에 찍은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아마도 2003년 즈음에 찍은 것일 테다. 그래서 사진을 삽입해서 그 당시에 조창손, 김석형과 정봉수, 김순자 간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어쨌든 정봉수의 김순자의 인터뷰 이후에 이어지는 세 장면(S#_9, S#_10, S#_11)에선 김석형과 조창손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장면 구성은, 이 영화가 전체적인 틀로 보면 시간 순서대로 진행하지만, 중간중간 현재(물론 그 당시의 현재를 의미하는데, 즉 감독이 1992년부터 찍은 수많은 장면들[2] 외에 추가적으로 삽입하기 위해 인터뷰를 찍을 당시의 현재)의 관점이 삽입되면서 영화의 진행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 김동원은 <송환>이라는 영화 속에서 단순히 비전향 장기수의 이야기만을 따라가지 않고, 그 당시 같이 생활했던 (남한) 주민들의 생각과 감정을 지속적으로 삽입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장면 뒤에 조창손 어르신이 김동원의 아이들을 귀여워 했다는 내레이션이 깔리면서 그 당시에 김동원의 아이들을 앉고 있는 사진을 삽입한다.(S#_14, 네 장의 사진) 이 장면에선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삽입된다. “나도 어느새 그를 할아버지 혹은 선생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히 이 네 장의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 시점에서 김동원은 이 비전향 장기수와 감정적 친밀감이 생겼음을 관객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

그리고 장기수 가족협의회 양평 야유회(S#_15, 1992427)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는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가 나온다. 이 장면 역시 중요한데, 이 장면에서 김동원은 솔직하게 낯설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 감독은 비전향 장기수를 바라보는 자신의 불편한 시선을 숨길 생각이 없다. 이는 김동원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장기수 어르신 중 한 분은 우리 내부를 파악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내가 선생에게 솔직하게 얘기를 못하는 거요.”라고 말한다. , 장기수 어르신과 김동원이 아무리 유사가족적 친근감, 거리를 유지한다고 한들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있는 것이다.

김동원은 이런 것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만약 이런 것들을 숨기고 오로지 자기가 바라본 비전향 장기수를 보여주려고 결단을 내렸다면, 이런 인터뷰 쇼트나 자신의 고백적 내레이션을 되도록 집어넣지 말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장기수들에 대한 애정과 불편함그 길항관계를 가시화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길항관계의 가시화가 잘못되면 최근에 개봉하는 일련의 사적 다큐멘터리처럼 전개될 위험이 있다. , 감독 자신이 영화에 앞서서 등장하는 데 관심이 있고, 자기 생각을 나열하는 등의 다큐멘터리 말이다. 하지만 <송환>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길항관계의 가시화라는 형식적 방법이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왜냐하면 우리 관객이 장기수를 바라보는 것 역시 이런 길항관계 혹은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친밀감을 느끼고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가까워질 수 없는 그 딜레마. 하지만 <송환>은 이 길항관계에 머물지 않고, 더 보편적인 가치, 인권과 사상의 자유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최근의 사적 다큐멘터리들과 <송환>은 질적으로 다르다.

다시 돌아와서, 야유회 장면 이후에는 김동원이 어렸을 때 봤던 영화 시작 전에 틀어주던 대한 뉴스를 삽입한 장면(S#_15)이 이어진다. 이 장면은 간첩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엄청 많았고, 사망하거나 실종한 수도 7,000명이 넘는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감독은 이런 과정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북한과 남한 양 국가에서 잊혀지고 있음을 내레이션으로 덧붙인다. 그리고 조창손의 과거(S#_16) , 19623월말 남파되었고, 연락선 부기관장이었으며, 한 일행의 배신으로 인해, 붙잡히게 된 경위가 내레이션과 조창손 선생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조창손 선생의 진술과 다른 내용의 조선일보 기사를 삽입함으로써 그 당시의 사건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이 둘의 다소 다른 정보 중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일 테다. 어쨌든 조창손 선생은 같이 남파된 일행 중 전향해 전주에서 살고 있는 두 사람(진태윤 ,김영식)을 만나러 간다. S#_18에선 진태윤이 어렵게 생활하는 모습이, S#_22에선 김영식과 대화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여기서도 야유회 때처럼 카메라로 인해 어색해진 분위기가 포착된다. 그래서 김동원은 거리를 두고 클로즈업으로 조창손과 김영식을 담아내고, 그들의 말을 들을 순 없다고 고백한다. , 이 지점에서 김동원은 김영식의 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말을 대신한다.

이 쇼트는 김동원이 이례적으로 내레이션으로 말하는 것 대신에 보여주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는 그 당시의 시간적 한계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는 카메라의 한계이다. 김동원이(, 카메라가) 조창손만큼 김영식과 가까워지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김영식의 눈물을 카메라로 담아냈고, 영화 편집 과정에서 삽입했다. 이는 왕빙이 눈물을 착취하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어떨까? 김동원은 김영식의 눈물을 착취한 것인가? 김동원은 진태윤과 김영식을 만나는 장면 이전에 조창손이 출감 이후 처음으로 그 둘을 만나러 가고 있다는 내레이션을 삽입했다. 다시 말해, 조창손이 진태윤, 김영식을 처음 만나듯, 김동원 역시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이다. 그리고 마주한 상황(김영식이 카메라를 어색해하는 것)에서 김동원은 거리감을 두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더욱이 내레이션으로 마이크를 꺼낼까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무례한 짓이기도 했지만, 김영식씨의 얼굴은 전향한 사람들이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좀처럼 씻기지 않는 고통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김동원은 김영식씨의 얼굴이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 김동원은 이 쇼트를(, 김영식의 눈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관객에게 내레이션으로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이런 논리를 설득시킨다. 만약 이런 내레이션 없이 그냥 김영식의 눈물을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착취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동원은 내레이션을 삽입했기에 이 장면을 착취라고 보긴 힘들 것이다.

더욱이 이 내레이션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향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다음 장면(S#_23)에서 서대문 구치소의 외관과 내부를 보여주고, ‘72년 남북적십자 회담당시의 모습을 삽입(S#_24)한다. 그리고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 북한에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교도소의 모든 좌익수를 석방하기보다는 강제 전향하기 위해 각종 수단, 특히 고문을 동원해서 전향 공작을 펼쳤음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시퀀스는 김영식 선생의 눈물이 단순히 김영식 개인의 눈물로 그치지 않고, 그 당시에 전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아픈 추억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 아픈 추억은 이경찬(S#_25), 고광인(S#_26), 최선묵(S#_27) 장기수 선생들의 당시 회고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S#_28에서 자막으로 “1972년 당시 전꾹 교도소에 500명이 있었으나, 350명 정도가 전향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히며, 전향 공작 중 사망한 장기수의 이름을 나열한다. 이는 김동원의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그리고 7년 이상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사진들이 몽타주되면서 김동원은 내레이션으로 그들이 고독과 공포 속에서 어떻게 수십 년을 버텼는지 의문을 제기한다(S#_29). 그러면서 그들과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정보로 추정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이런 질문들을 받으면 선생들 대부분은 정치적 신념을 포기할 수 없어서 혹은 민족과 민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곤 했다. 실제 선생들은 감옥 안에서도 자신들만의 신호로 통방을 하면서 사상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서로를 채찍질하며 격려했다. 그들은 감옥에 그냥 갇혀 있던 것이 아니라 쉼 없이 활동을 하고 치열하게 사상 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향 공작으로부터 지키려 한 것이 단지 민족주의만은 아닐 것이다. 또 이들을 지켜준 힘이 사회주의에서 나온 것만도 아닐 것이다. 이념이란 결국 인간 이성의 한 부분일 뿐이며 이성 또한 인간의 여러 속성 중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잠시 휴지) 내가 들은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선생들이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혹은 버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전향 공작의 폭력성 그 자체에 있었다는 말이다. 선생들은 전향 공작을 당하면서 자신들이 저항해야 하는 정당성과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비인간적인 폭력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오기를 건드렸고, 인간이라는 느낌과 품성을 지키기 위해 선생들은 저항하는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김동원은 비전향 장기수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을 그 당시의 시대적 모순에서 기인한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바라본다. , 김동원은 장기수 어르신들을 단순히 이념이나 사상에 도취하여 고집을 부린 사람들로 바라보지 않고, 그들이 한편으로는 시대적 모순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저항한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한편, 이 내레이션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나라는 접속부사이다. 실제로 김동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하지만이라는 표현을 자주 씀으로써 기대를 불러일으키게 하고는 기대를 배반해서 새롭게 이야기를 진전시켜 나가며” “이런 식으로 뭔가 최소한 두 가지 층위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4] 이후 삽입되는 내레이션에서도 하지만’(혹은 그러나’)은 자주 사용된다. 다시 돌아와서, 이 내레이션의 근거로 몇 명의 인터뷰를 삽입한다. 서준식(S#_30), 심현칠(S#_31), 이공순(S#_32)의 진술이 그것이다. 그리고 앞선 내레이션의 연장으로 다시 비전향 장기수들의 사진들을 몽타주하면서 또 다른 내레이션 -“내가 아는 한, 선생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청년 시절 누구나 가질법한 열정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선생들의 평범한 그러나 빛나는 얼굴은 누구나 폭력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그 열정을 지켜낸다면 그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하략)”-이 삽입된다. 그리고 페이드-아웃(fade-out)된다.

이제 앞서 착취의 문제의 대상이었던 김영식 씨가 나온다(S#_34). 개인적 생각이지만, 김동원은 앞서 김영식의 눈물을 착취했다는 모종의 죄책감 때문인지 그의 일화를 추가적으로 촬영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김영식의 정보가 (드디어!) 노출된다는 것이다. ‘1972년 전향, 1988년 출감이라는 자막을 통해서 말이다. 이 자막이 삽입된 것은 분명 처음 김영식 씨를 만났던 상황과는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김동원은 김영식과의 첫 만남 이후에(, 그의 눈물을 마주한 뒤에) 김영식과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친밀도를 높였을 것이다. 물론 김동원이 내레이션으로 김영식 선생이 아니라 김영식 씨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조창손 선생만큼 김영식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진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김영식은 카메라를 크게 어색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서 김영식의 눈물의 얼굴과 상반되는 김영식의 웃음의 얼굴을 (심지어) 스톱(stop)해서 보여준다. 그러면서 난 김영식 씨보다 순박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누구든 그의 얼굴을 본다면 인간이 선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박한 미소 뒤에는 전향의 아픈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사실, 영화 포스터를 보면 가장 크게 보이는 얼굴이 바로 이 김영식의 웃음의 얼굴이다. 김동원은 더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조창손의 얼굴이 아니라 김영식의 얼굴을 자신의 영화가 가장 먼저 관객과 만나는 포스터에 크게 삽입한다. 물론 포스터에 감독이 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제작이 푸른 영상(동아리 개념으로 김동원이 만든 다큐 공동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추측건대 포스터에 삽입된 김영식의 사진은 김동원의 주문이 반영된 것일 테다.

다시 돌아오자면, 김동원은 이 장면에서 자신의 내레이션을 삽입하기를 되도록 지양하고 오히려 김영식의 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들려준다. 유일하게 김동원의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은 상황 설명에 불과하다. “그는 남한에서 살기엔 너무 순박했고 그래서 여러 번 사기도 당했으며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이전 장면과 달리 김동원은 김영식의 말을 고스란히 듣는다. (중간중간 김동원이 김영식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의 쇼트가 삽입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영식은 누구에게도 쉽게 하지 못했던 하소연이나 서러움을 털어놓는다. 물론 이렇게 털어놓는 과정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의 고통이 이 몇 시간의 대화로 풀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말에서 묻어나오는 어떤 진심이다. 이 진심 어린 발화(發話)에는 그가 비록 전향하긴 했지만, 그 뒤의 삶이 절대 순탄하진 않았음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김영식의 말에 공감할 수 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남북 관계가 진전되는 듯했다. 왜냐하면, 취임 직후 5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석방되는데, 그중 이인모 노인은 북으로 곧바로 송환되었기 때문이다(S#_37). 하지만, 이런 송환과 관련해서, 그 당시에 비난 여론이 있었고, 1994년 즈음 북핵 문제와 김일성 주석의 서거가 맞물리면서 남북관계가 냉각된다. 그 당시에 상황을 설명하고 난 뒤에, 영화는 다시 조창손 선생의 과거를 살핀다. 조창손 선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그는 위가 약해서 교도소 내에서 병약했고, 석방 당시에도 돈과 거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나가지 않으려고도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석방 직후 요양원에 있다가 바로 봉천동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특유의 생활력으로 나름 적응해서 살았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내레이션. “그러나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지 않아 의료 보험이나 노인들을 위한 생계 보조금 등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 그는 남한에서 온갖 잡일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가협[5]은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특히 민가협이 주최하는 양심수 후원회 산행에 조창손 선생은 자주 참여했다(S#_43~44). 이와 관련해서 김호현(S#_46), 최현숙(S#_48), 한경남(S#_49)의 진술은, “종교 계통의 후원회원들은 대부분 독실한 신자들이었고, 따라서 이념적으로 장기수들과 거리가 먼 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과 장기수들 사이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고, 가끔 이념의 벽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지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의 내레이션의 근거로 삽입된다.

그다음 장면(S#_51)에선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삽입된다. “장기수들은 더 이상 외롭거나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어느새 90년대 변혁운동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 체제를 맹신하는 고집불통의 노인네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들은 그들의 업적이나 이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운동의 힘과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2006)에서나 볼법한, 영웅화의 과정처럼 보이는 쇼트들이 삽입된다(S#_52). 그리고 페이드-아웃(fade-out)된다.

앞선 S#_5152에서 보이는 것들이 장기수를 영웅화하는 것인지 의심할 겨를도 없이, S#_53에선 이래선 선생의 장례식(1993611일 별세)을 보여준다. 앞서 보여준 영웅화의 과정처럼 보이는 쇼트들은, 이미 죽음에 가까워진 나이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 그들이 사회의 변혁의 운동의 중심이 되고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아버지의 깃발>에서 젊은 군인들이 영웅이 되어가는 것과 다르며, 김동원이 이 S#_5152를 넣은 것은 일종의 사실 전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장기수 선생들은 돌아가셨다. 김도한(S#_54, 1996514일 별세), 윤기남(S#_55, 1995224일 별세) 선생의 모습. 이들의 죽음에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윤기남 선생의 말은 상기할 가치가 있는데,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회한에 차서 죽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남기신 말씀. “당과 조국에 대한 임무를 마무리 못 해 죄송히 생각합니다.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조국의 젊은이들이 승리해 줄 것을 바랍니다.” 이어서 권양섭(1997318일 별세), 왕영안(19971029일 별세), 금재성(1998817일 별세), 최남규(19991211일 별세) 선생의 영정사진이 나타난다(S#_56).

1994년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으나, 1995418일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노인은 북송호소 기자회견을 연다(S#_57). , 이인모 노인 송환 이후 잠잠했던 송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여론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래서 김동원은 이들의 운동에 보탬이 되고자, 성실한 저널리스트 지로 이시마루에게 일을 부탁한다. 하지만, S#_61의 이시마루의 인터뷰에 따르면, 물론 이는 그 당시에 찍은 인터뷰는 아니지만, “95년도 말에 북조선에서 식량곤란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지방형편을 내게 보여주기 싫어서 북으로 촬영을 가는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에 북한의 식량 문제가 있었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남한의 신문은 선정적인 기사를 낼 뿐이었다. 김동원은 이런 신문 기사와 동시에 이공순, 김창원 선생의 불편함을 같이 보여준다. 물론 김동원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이념이 생명보다 우선할 수 있는 것인가. 국가가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일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리고 <송환>을 제작 중에 이시마루를 만나서 얘기했던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일단 김동원은 북한을 오랫동안 관찰했던 이시마루의 의견을 존중한다. 특히 김동원 역시 이시마루처럼 북한의 인권 유린적 태도를 전혀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견해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시마루는 북한이 50년 이상 전쟁 중이며 그 상대가 남한이 아닌 미국이라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전쟁이야말로 북한 주민의 인권을 제한하고 식량난을 악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며, 그 책임은 불가침조약을 거부하고 있는 미국에 있다. 한반도 문제는 북한만이 아닌, 북한과 미국 간의 문제인 것이다. (하략)” 그리고 전향 공작의 경우를 언급하며 미국의 강압적 태도가 북한을 굴복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앞서 이념에 대한 생각이나 한반도 문제는 북한과 미국 간의 문제라는 등의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김동원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물론 혹자는 이처럼 감독이 자기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필자 역시 이와 같은 일인칭 내레이션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또한, 영화적으로 훌륭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송환>에서 나오는 이런 발언들은 왜인지 모르게 거부반응이 들지 않는다. 이는 감독이 솔직하게 고백하는 내레이션이 앞서 나왔기 때문에 감독에 친밀감이 들어서인가? 혹은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헌사이자 가족 비디오같이 느껴져서일까? 이에 대해서 답하긴 쉽지 않다. 다만, 김동원 감독의 말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동원은 분명 일단 내 안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야 글을 쓰든 영화를 하든 하는 거 아냐?”라고 말했다.[6] 다시 말해, 그의 영화는 일차적으로는 그의 생각, 사적인 경험이 주로 담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그의 영화의 주된 요소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송환 운동과 별개로 장기수 석방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장기수 문제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1995815, 40년 이상 복역한 최장기수들이 석방되는데, 그 이름은 바로 안학섭(44년 복역), 김선명(45년 복역), 한 장호(39년 복역). 특히 김선명은 이 셋 중에서도 가장 오래 복역했으며,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사연을 공개한다. 그는 늙은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었으나 그의 가족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민가협의 설득 끝에 결국 김선명은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이때 이 재회의 순간은 사진의 나열로 보여진다. 이는 그 순간을 박제하려는 의도, 즉 마치 크리스 마르케의 <방파제>(1962)의 형식적 전략과 유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단지 가족들이 김선명과 어머니가 재회하는 모습이 외부로 반출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회의 순간을 영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마치 사진 찍은 것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듯한 효과를 통해, 당시의 분위기 정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렇게 김동원은 최대한 김선명의 가족의 요구를 반영한다. 사실, 이 영화 전체에서 보면 이 장면은 중요하다. 일차적으로 보면, 수십 년간 만나지 못한 모자가 재회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뭉클함을 자아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둘을 가로막은 시대적 모순과 국가의 폭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장면은 김선명이 놓인 아이러니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선명은 45년 만에 신체적으로 자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외면을 받음으로써 정신적으로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는 앞으로 평생 (어머니를 재회하고) 가족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석방 이후에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장기수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긴장감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1996614일 형사들이 푸른 영상 사무실을 습격하는 장면(S#_78)이다. 이 장면은 마치 70~80년대 군부독재 시기 검열을 당하는 감독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 희생자로는 이만희와 하길종 외에 여러 감독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김동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혔지만 이내 여러 동료의 독립영화운동 탄압하는 비디오 악법 철폐 운동덕택에 3일 만에 풀려나게 된다(S#_80). 이 장면을 삽입한 이유는 바로 다음 장면의 내레이션에서 나온다. “비록 며칠간의 구류에 불과했지만, 이 경험은 선생들을 더 가깝게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S#_81) , 강제 전향 공작 등의 억압을 받으면서 장기수들 사이에 더욱 연대감이 생기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던 것처럼, 국가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김동원은 장기수 선생들에게 연대감과 친밀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난 작업의 긍지를 갖고 더 열심히 선생들을 촬영했다. 그러나 선생들과 이념적 거리감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은 여전히 촬영이 어려웠다.”

진태윤 선생이 돌아가신 모습이 보여진 뒤에, 19992월 비전향 장기수 17명이 특별 사면되는 모습이 이어진다. 이때 조창손과 같이 남파된 장병락이 석방된다. 당시 일행이었던 사람들 중 한명은 돌아가셨지만, 한명이 세상에 나와 조창손을 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법무부 장관의 발표를 통해 송환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그래서 송환과 관련하여 국내 언론과 토론 프로그램이 앞다투어 문제를 제기했다(S#_87~88). 특히 북에 있는 국군 포로나 납치된 어부들과의 교환을 주장하거나 송환 자체를 문제 삼는여론이 등장했다. 이런 모습은 2018년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S#_89, 19996월 우리탕제원이 개원한다. 조창손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 선생들은 이곳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는 종교단체의 후원 개념으로 마련된 것이다. 물론 탕제원이 생계유지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힘들게 일을 했다는 내레이션이 덧붙여진다. 이후에 개별 인물들의 에피소드, 즉 안학섭(S#_94~99), 류한욱(S#_100~104) 그리고 신인영(S#_105~106) 선생의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먼저 안학섭 선생은 석방 직후 화환 크기로 차별대우를 받은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이때 인서트 쇼트로 안학섭, 김선명, 한장호가 서 있는 사진이 보이는데, 안학섭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는 한 명의 스타(김선명)를 내세우는 것으로 상품적 가치를 만드는 일이었다.”는 말을 한다. 고집스러운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류한욱 선생의 경우, 과거 시라소니의 친구였으나 이제는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다. 그래서 가끔 바깥으로 나갈 때 어린아이처럼좋아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신인영 선생의 경우, 늦게 탕제원에 합류했는데, 그 이유는 골수암으로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98년도에나 병 보석으로 출감했기 때문이다. 김선명 선생과 마찬가지로 아흔이 넘는 노모를 두었고, 98년도 313일 노모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처럼 각각의 인물에 대해 조명하는 시퀀스를 넣은 이유는 분명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연을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연이 소개된 직후에는 송환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S#_107), 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위한 토론회 장면(S#_108)이 이어진다. 다시 말해, 앞서 소개한 장기수 선생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는데, 이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혹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송환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송환이 영화의 주된 화두로 대두된다. 김동원은 송환을 촉구하는 시위를 도와주기도 하는데, 이 장면에서 자신이 이 작품(<송환>)을 기획한 것도 그 무렵이라고 한다. 기존에 찍은 촬영분은, 이 작품(<송환>)을 위해 찍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동원과 푸른 영상 제작팀은 1992년부터 장기수라는 시대적 모순과 국가의 폭력의 피해자이자 한편으로는 저항의 상징으로, 기묘한 세월을 보내며, 석방 이전과 이후에 계속 고통받는 이들을 그저 기록했던 것이다. 김동원의 내레이션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기획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는 송환 추진위원회와 결합하여 송환 운동에 도움이 되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송환이 가능하게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영화를 제작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송환에 지지를 표명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든 국민이 송환 문제에 정서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무조건적 송환을 반대하는 시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S#_110).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송환과 관련해서 외부적으로 논란이 있었던 것만큼 장기수 선생들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왜냐하면, 고향이 남쪽인 몇몇 선생들이 심한 마음의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과 북에 모두 가족을 두고 있는 신현칠 선생(25년 복역)은 송환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인터뷰(S#_115)를 보면, “()쪽에는 이미 그렇게 안정된 사람이고, ()쪽 사람은 내가 가면 새로운 이산가족이 생겨. 그런 고뇌가 없진 않았어.”라고 말하는데, 이 문제는 결국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해결될 수 없는 딜레마인 것이다. 여기서 신현칠 선생은, 분명 북으로 올라가서 사회주의 우월성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하는, 즉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송환을 포기했다. 이에 대해선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고령이기도 하고, 남한에서 (비록 대접받지 못하더라도) 살았던 정과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추측해볼 뿐이다.

이런 송환의 문제가 가시화되는 와중에, 2000523일부터 28일까지 장기수 선생들과 김동원은 강원도로 여행을 떠난다. S#_116의 드라이브 장면에 삽입된 내레이션-“내겐 선생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을 보면, 이 여행이 모두에게 즐거운 여행이었던 것 같다. 이전 시퀀스와 다르게 이 여행 시퀀스에는 배경음악이 삽입되었다. 송환 이전에 즐겼던 마지막 순간. 이 순간을 김동원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장면들, 예컨대 물가에서 놀거나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고, 바닷가 근처 수산시장에서 회를 떠먹고, 놀이동산에서 사격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먹는일련의 장면들을 몽타주하여 마치 가족 비디오를 찍은 것처럼 편집을 해두었다. 여기서 가족 비디오란,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을 찍는 홈 비디오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영상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이 시퀀스는 영화적으로 보면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어떤 측면에서는 아마추어적이다. 하지만 이런 기술적인 잣대를 이 시퀀스에 들이대고 싶지 않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김동원 감독 자신에 대한(을 위한) 영화이다. 따라서 이 시퀀스를 김동원이 장기수 선생님들과 추억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헌사이자 간절한 시도로 읽는다면, 그 자체로 뭉클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이 시퀀스에서 우리는 김동원의 장기수 선생들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이거면 된 거다.

이 여행 직후에 역사적 순간이 펼쳐진다. 바로 2000615일 평양에서 있었던 ‘6·15 남북 공동선언말이다. 이런 역사적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인지 ‘2000.6.15. 00:20’이라는 구체적인 시각까지 자막으로 삽입된다(S#_132). 열두시간 뒤 장기수 선생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기자들이 찾아온다. 이 중 조선일보 최00 기자가 질문하는 쇼트가 삽입되는데, 다른 자막과 달리 이 사람의 이름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름을 노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 최 기자로 대변되는 보수 언론에 대해 조롱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6·15 남북 공동선언 이전에 보수 언론은 비전향이라는 단어조차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통념상에 있는) 조선일보 기자답게 이 최 기자역시 엉뚱한 질문만 한다. 그래서 CG로 땀방울을 최 기자 머리에 그리기도 한다. 일련의 자막과 CG는 분명 김동원의 기자에 대한 장난 혹은 조롱이다. 물론 이것을 기자에 대한 경멸이나 혐오로 읽어선 곤란하다. 오히려 장기수 선생들에 대한 옹호와 지지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에 안학섭 선생의 결혼 문제가 대두되면서 탕제원 내에 갈등이 생긴다. 왜냐하면, 시기적으로 송환 문제가 나오는 순간에 결혼은 여러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장기수 선생들이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200071일 안학섭 선생의 결혼식 날 한 장기수 선생은 (그의 결혼이) 샘난다고 말한다. 그러자 김동원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영화밖에 없다는 듯이 그의 소원을 영화적으로이루어준다. , S#_142에서 핑크색 프레임을 통해 상상씬을 만들어 결혼을 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 장면의 마지막은 그의 웃는 얼굴을 스톱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결혼식이라는 경사가 있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송환 직전에도 고통을 받고 있었다. 김선명 선생은 송환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 산소를 찾으러 양평까지 가지만, 가족들이 알려주지 않아 끝내 찾지 못했다(S#_143). 김선명 선생뿐만 아니라 김용수 선생의 상황 역시 유사했다. 특히, S#_146에 삽입된 내레이션-“친척들과 환송회 자리를 갖는 남한 출신의 장기수를 촬영하면서, 나는 장기수 가족들이 지닌 피해의식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과 그 이후 가족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볼 때, 김용수 선생과 그의 가족 사이에는 가까워지기 힘든 거리감 혹은 벽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S#_147에선, 한 친척이 김동원의 카메라를 지적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 이렇게 촬영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가족들 사이에 있는 벽과 트라우마를 대화로 풀고 있는 과정에서 카메라의 시선(혹은 외부의 시선)은 당연히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동원도 이 지점을 인지하고, 종종 집 바깥으로 나가 롱 쇼트로 집 안을 바라보며, 내레이션으로 난 미안함을 느끼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피해 먼저 자리를 떴다고 말한다. 친척들 역시 촬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진 않는다. 다만, 각서를 통해 이 영상이 어떤 목적을 갖고 배급되는지를 알려주고, 가편집본을 보여달라는 등의 약속을 한다. 김동원 역시 이 각서가 타당하다고 여겨 받아들인다.

이 시퀀스 이후 200091일 출발 전날까지 6개의 시퀀스가 차례로 등장한다. 먼저 (1) 2000719일 날 장기수 선생들이 진태윤의 묘를 찾아간다. 이때, 김동원은 이례적으로 자신의 내레이션 대신에 김영식 선생의 말을 내레이션으로 삽입한다. 그리고 (2) 2000816일 조창손 선생은 봉천동 주민들과 환송 저녁 식사를 한다. 조 선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 표시로 목걸이반지를 친하게 지내던 주민들에게 준다. 그리고 (3) 그다음날 조창손 선생은 울산 근처 해안가로 간다. 조 선생은 하염없이 해안가를 걸어간다. 이때 김동원은 어떤 내레이션도 삽입하지 않는다. 사실, 조 선생이 같이 남파된 일행을 잃었던 그 장소로 다시 간다는 것은 어떤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송환때문일 것이다. 그는 석방 이후 여러 이유로 인해 자신의 일행을 잃었던 장소에 올 수 없었다. 단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으며, 일종의 죄책감 때문에라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송환이라는 불가항력적 기회를 통해 (왜냐하면, 북으로 간 뒤에는 다시 올 수 없기 때문) 용기를 내서 울산을 찾은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쇼트가 덧붙여지는데, 군사 지역이라서 촬영이 금지되는 쇼트가 그것이다. 하지만 김동원은 계속 찍고 싶었고, 그렇게 몰래몰래 촬영한 쇼트가 삽입된다. 여기서 김동원 영화의 마법 같은 순간으로 우연성이 개입된다. 소대장이 학군 후배라서 겨우 촬영을 마치게 된 것이다. 물론 김동원은 이와 같은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선배의 권위와 약간의 거짓말을 보탰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일련의 쇼트와 내레이션을 보면, 김동원은 영화 내내 촬영의 욕구를 감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촬영을 메타적으로 바라본 시각을 갖추고 있음을 동시에 드러낸다. 다시 말해, ‘거짓말을 했다혹은 미안함을 느꼈다는 등의 말을 볼 때, 김동원은 촬영이 본질적으로 폭력이 될 수 있다던가 혹은 비윤리적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런 촬영 자체에 대한 딜레마적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사적인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솔직하며 윤리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더욱이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를 통해 다양한 층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던 김동원의 인터뷰를 상기해보면, 여러 측면에서 그는 길항관계 혹은 다층 면을 가시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4) 2000826일 송환 추진위원회가 주최한 환송회가 있었고, (5) 2000827일 어느 교회에서 장기수 환송 예배가 있었다. 그런데 (5)에서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예배 시간에 사전 예고 없이 납북자 가족들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찾아온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다만, 장기수 선생들은 납북자라는 단어조차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날에 대해서 김동원은 선생들이 좀 지나쳤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고 밝히며, “잠시라도 그들을(납북자 가족을) 만나주는 편이 낫지 않냐고 김선명 선생에게 물었다. 하지만 김 선생은 나는 변함이 없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 김동원이 아무리 장기수 선생들과 친밀감이 높아진다고 한들, 그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6) 가벼운 폐렴 증세 때문에 조창손 선생이 국립 의료원에 입원한다(S#_170). 잦은 환송회로 인한 무리 때문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역시 김동원은 촬영에 대한 욕구와 그것의 문제점에 대한 자각을 내레이션을 통해 드러낸다. “병원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조 선생의 입원과 몰려드는 방문객들은 나에게 최악의 상황이었다. 송환 전에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인터뷰를 해야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작별 선물로 그동안 촬영한 테잎을 복사해 드렸다.” 다시 말해, 촬영하고 싶었지만, 여러 이유로 (촬영보다는 그가 지인들과 있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에) 촬영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김동원이 조 선생에게 테잎을 건내주는 쇼트 직후에 안학섭 선생이 북한으로 갔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보자는 쇼트가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자막으로 미송환 장기수라고 삽입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이들은 비전향 장기수가 아니라 송환을 앞둔 미송환 장기수가 된 것이다.

200091일 짐 검사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내 해결이 되고, 그다음 날 92일 조창손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 선생들은 북으로 떠나게 된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라는 노래를 뒤로하며 수많은 사람이 작별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심지어 절을 하기도 한다. 2시간 동안 장기수 선생들이 어떤 분들인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들을 보내는 남한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 더욱 확실하게 장기수 선생들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 초반의 내레이션을 상기해보자. 그들은 단지 폭력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특별한 사람이 된 것에 불과하다.

장기수 선생들을 태운 버스가 판문점으로 향하는 드라이브 쇼트 직후에 우익 단체의 반대 시위 쇼트가 삽입된다. “왜 간첩을 보내면서 국군 포로는 안 보내냐는 외침과 빨갱이라는 폭언까지 다양한 군상이 포착된다(S#_183~184). 200092일 여러 갈등과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장기수 선생들의 북으로의 송환 프로젝트는 완수된다. 물론 그들이 북한으로 넘어가는 것은 촬영할 수 없기 때문에, ‘통일의 관문이 열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임학섭 선생의 표정이 대신 암시할 뿐이다. 그리고 페이드-아웃(fade-out)된다.

장기수 선생들이 떠난 이후 남북 사이의 냉전 분위기는 완화되면서, 경의선 복원 공사가 시작되고,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 공동입장을 하며,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북한의 물건이 남한에서 팔리며, 북한 군인이 나오는 광고를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방송국은 북한으로 취재를 떠나기도 했다(S#_187). 그리고 북한에서 온 소식, 즉 책 속의 사진과 비디오가 삽입되는데(S#_189), 이에 따르면 장기수 선생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영웅이 되어갔다. 또한 체제 강화 선전에 이용되었다. 김동원의 내레이션. “화면으로나마 선생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잘 빗어넘긴 머리와 가슴에 달린 훈장이 낯설어 보였고, 전처럼 편하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말에는 어떤 섭섭함과 아쉬움이 담겨있다. 분명 장기수 선생들은 북한의 체제를 옹호하는 자들이고, 또 그들이 북으로 송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남한에서 같이 웃고 떠들던 시간들이, 이 비디오 자료에서 보이는 장식적 이미지 때문에 퇴색되는 듯한 느낌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래서 김동원은 난 평양에 가고 싶었다. 조 선생과 가족들도 만나고 북한 분위기도 직접 느껴보고, 그렇게 작품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평양 가는 일은 쉽지 않았고, 나는 그저 기다려야 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동원은 북한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전 민가협 총무인 남규선에게 조 선생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김동원의 모습(S#_192). 남규선이 영상 편지 식으로 부탁해서 촬영하지만, 김동원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꺼렸는지, 금방 쇼트를 바꾸어, 그 장면을 찍던 남규선을 보여주고, 내레이션 형태로 영상편지를 끝마친다. 남규선은 평양에서 우연히 장기수 선생님들을 만난다. 그녀의 내레이션에 따르면, 조창손 선생의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진 않다고 한다.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는, 그녀가 담아온 조창손 선생의 영상 편지일 것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온다. “김동원이 못 와서 섭섭하다. 내가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아들이라고 해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 ” 아들같이 생각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앞서 말한 장식적 이미지로 인한 지나간 시간의 퇴색이란 말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 그 장식적 이미지는 말 그대로 북한의 홍보를 위한 이미지이지, 조창손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 선생들의 진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북한의 홍보 영상 촬영에서는 어떤 윤리적 고민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 반발이라도 하듯이 김동원은 자신의 윤리적 시선으로 장기수 선생들을 조명하는 <송환>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평양에서 장기수 선생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S#_207). 어느 식당에서 그들이 당당하게 부르는 노래 위에 김동원은 내레이션을 삽입한다. “선생들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멈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 앞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혁명과 투쟁의 길이 놓여있다. 어쩌면 남한에서보다 더 힘들게 그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긴장감을 주던 투쟁의 대상이 눈앞에 없고 이젠 스스로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선생들의 북한 생활이 무척 궁금했지만 난 평양 가는 계획을 포기하고 편집을 시작했다. 방북 허가를 받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고 간다 하더라도 선생들을 만나고 촬영하는 일이 무척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가보지 않아도 이제 웬만큼은 선생들을 알 것 같다고 스스로 다독이기도 했다.”

결국, 김동원은 물리적으로 조창손 선생을 비롯하여 장기수 선생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아마도 남규선이 찍어온 영상을 통해(, 이 영화의 마지막에 삽입된 노래 장면을 통해) 그들을 보는 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비록 조창손의 영상편지와 노래 장면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는 장기수 선생들의 진심을 느끼고, 그들의 미래를 응원한다. 아니 우리의 미래를 응원한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 비단 장기수 선생들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한반도 내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동원은 통일을 꿈꾸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전히 방북 계획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지나간 기억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송환>을 완성하게 된다. 이와 관련한 그의 마지막 내레이션. “조 할아버지가 날 아들처럼 생각하신다는 말에 별 해드린 것이 없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이 작품을 마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결국 <송환>은 모든 장기수 선생들과 김동원 감독 자신에 대한(을 위한) 영화인 것이다.

(cf. 진짜 마지막 장면(S#_208)은 그대로 인용한다. 김선명, 함세환 등 6명의 총각 장기수 선생들의 결혼. 20014월 리종환 선생 별세. 20016월 윤용기 선생 별세. 20021월 신인영 선생 별세 200212월 모친 고봉희 여사 별세. 김영식 선생 등 전향장기수 30명은 전향 무효 선언을 하고 현재 송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1] 요나스 메카스의 이 5시간짜리 영화 속 기억에 남는 내레이션은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기록하는 사람일 뿐이다.”이다. 이는 어떤 지점에서는 김동원의 다큐멘터리와 맞닿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무빙-이미지 혹은 영상을 영화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그 범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본문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기회를 통해서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2] 10년이 넘는 촬영 기간, 500개의 테이프, 800시간의 촬영 분량

[3] 여기서 말하고라는 표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예그림, “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안건형-김동원, 오큘로5, 2017에 따르면, 안건형은 김동원을 쇼잉(showing)의 감독이 아닌 텔링(telling)의 감독으로 파악한다. , 김동원은 단순히 무빙-이미지, 사진-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무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감독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해서, 본문에서 보여주다라는 표현과 말하다는 표현을 구분해서 사용했다.

[4] 예그림, “이야기꾼으로서의 다큐멘터리스트: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안건형-김동원, 오큘로5, 2017

[5]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1985년 창설됨.

[6] [4]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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