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록] 『투명기계』 저자 김곡의 강의: 영화와 화이트헤드(2018.12.13.)

 

▲"『투명기계』 출간 기념 김곡 저자 님 특강 : 영화와 화이트헤드"(2018.12.31.) https://youtu.be/g5rMI2t8eow

• 참고1. 본문은 유튜브 채널 "다중지성의 정원"에 2018년 12월 31일에 전체공개로 업로드된 김곡의 『투명기계』에 관한 강의의 전사(轉寫)다. (영상과 강의의 저작권은 다지원과 김곡에게 있다.)
• 참고2. 단, 영상의 앞부분(서론, 약 10분)과 뒷부분(질의응답, 약 30분)은 제외하였다. 또한 문어체를 채택하였으며, 강의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 기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  ] 안의 내용은 내가 추가한 정보다. 마지막으로 전사의 특성상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양해를 구한다.
• 참고3. 베르그송의 원뿔도식을 김곡은 뒤집어서 사용한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김곡의 답변(영상 1:38:20 지점)을 참고하라.


-들어가기에 앞서, 여담(혹은 사담)- 

나는 2018년 11월 『투명기계』를 구매했다. 구매 직후 책을 펼쳤더니, 김곡이 끊임없는 철학적 용어의 나열을 통해 (성찰적 태도를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며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끔 '유혹lure'을 하고 있길래, 거의 미친 듯이 '홀려haunted'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당시에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완독을 하진 못했다. 크게 두 가지의 난점 때문이었다: 하나는 (이 책의 핵심 두 축인)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철학. 다른 하나는 언급되는 방대한 수의 영화(작품, 비평, 이론 등). 따라서 『투명기계』의 가치와 퍼텐셜은 충분히 인지했으나,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난점 때문에 『투명기계』의 철학에 관해서는 피상적인 이해만 할 수 있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철학과 학부생 수준에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심도 있게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책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영화를 단번에 다 보기 위한 일련의 '여건datum'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다시 『투명기계』를 읽게 된 것은 2019년 10월 벽제 경찰학교 입교하면서부터다. (벽제에서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도, 영화를 마음대로 볼 수도 없는데, 이 책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자대 배치 후, 일경(一警)이 되고, 『투명기계』의 보론(補論)인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이 발행되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의 선물.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을 읽으니, 『투명기계』란 타이틀의 작업이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즉 김곡의 의도가 무엇인지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군 복무 기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을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투명기계』에 관한 강의가 유튜브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강의를 본 적은 없었다. 『투명기계』의 강의, 지금 내가 전사한 이 강의를 집중해서 처음으로 본 것은 전역을 석 달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그전까진 졸업 요건인 DELF 시험 패스를 위해 공력을 몰빵해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느라, 많은 시간을 철학과 영화 공부에 투자할 수 없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투명기계』를 완전 정복'할 수는 없다. 이 강의는 말 그대로 '트레일러trail-er'에 가까운 강의다. 달리 말해, 김곡이 이 강의에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매력적으로 (그리고 아마 내가 아는 한 어떤 논문이나 입문 서적보다 쉽게) 설명해서, 그 둘의 철학을 공부하게끔 '유혹lure'한다는 것이다. 마치 김곡은 (다소 유치한 표현이지만) 철학 전도사 역할을 이 강의에서 기꺼이 맡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강의는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경유하여 다시 『투명기계』 내로 들어가게끔 인도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강의의 후반부는 (『투명기계』 철학의 핵심 중 하나인) '내러티브narrative'에 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나는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있다. 이제, 전사한 『투명기계』 강의록을 탐독하면서,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경유한 후 『투명기계』 안으로 다시 들어갈 일만 남았다. 『투명기계』는 여러 번 반복해서 (재)입장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강의록- 

[영상 10:35 시작] (...)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를 비교하면서 시작하고 싶다. 왜냐하면 (둘은) 너무 대조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우리의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사로잡고 있다. 한 20년째 말이다. 그 개념들에 우리가 가장 익숙하다. 말하기 좋게 하기 위해 베르그송을 이용했다. 사실 이 책[『투명기계』]은 베르그송과 큰 관련은 없다. 중간중간 베르그송을 인용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나는 베르그송을 정말 좋아한다. 옛날에 공부 좀 해보겠다고 깝죽대던 시절에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책이 『물질과 기억』 1장이다. 너무 충격이었다. 영화로 치면 제이슨 본 시리즈 보는 느낌? 정말 액션 영화에 가까웠다. 그때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더 빡센 영화를 봤다. 그게 화이트헤드다. 물론 베르그송에 비해서 액션 영화는 아니다. 여하간 둘을 비교하면서 시작해보겠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철학자다. 베르그송이 등장하기 전까지 엄청났다. 운동을 부정하는 경향이 말이다. 기원전 500년 전부터 내려오는 문제가 있다. 엘레아 학파의 제논의 역설이다.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의 여러 가지 변주가 있다. 내가 알기로 스무 개 이상이 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형태만 하나 추출하겠다. 화살을 쏴도 날아가지 않는다는 문제다. 여기 목표 지점이 있고, 여기 시작점이 있다. 이쪽에서 화살이 이리로 가려면 절반(M1)을 지나야 한다. 또 이 지점(M1)을 가려면 절반(M2)을 지나야 한다. 또 절반(M3)을 지나야 한다. 이런 M은 무한하다. 그런데 시작점에서 목표점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은 유한하다. 유한은 무한보다 작다. 무한은 유한보다 크다. 그래서 화살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제논의 역설의 핵심이다. 운동은 없다는 것 말이다. 이 논쟁에 많이들 도전했다. 물론 누가 화살을 쏴서 죽는 것을 보여주면 '화살이 날아갔구나' 인정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존재 일원성의 문제이다. 운동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는 하나다. 이것의 보조 논증으로 등장한 문제다. 파스칼이나 콩디약 등이 도전했다. 그중에 최고가 바로 베르그송이다. 가장 잘 돌파를 해서 빅히트를 쳤다. 흥행대박이다. 나도 보고 감탄했다. 베르그송의 논파는 이것이다. ‘너는 운동이 지나가는 궤적과 운동 자체를 혼동하고 있다.’ 한마디로, 무한과 유한은 다른 층위로서 비교 불가능하다. 이것이 논파의 핵심이다. 전제를 깐 것이다. 반대로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지속은 분할 불가능하다. 이것을 많이 혼동한다. 지속은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말이다. 지속은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속은 분할하면 그 본성이 바뀌는 것이다. 한마디로, 순수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동과 시간은 또 다르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공간적인 표현을 뜻한다. 이런 것들을 개념적으로 분류하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이것이 실제로 논파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가 논파했다고 하면 검증하는데도 10년 정도 걸린다. 베르그송의 책들이 읽히면서 슬슬 검증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생각했다. 베르그송에 대한 인기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드디어 빠져나왔다. 유럽인들이 환호했다. 훌륭한 논파다. 

 베르그송이 진짜 말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 강의 주제가 아니다. 일단, 이 정도만 하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르그송은 생명이 궁금했다. 생물학자에 가깝다. 책들을 읽어보면 말이다. 진화론에 대한 사유 등. 『물질과 기억』을 요약해보면, 생명은 기억하는 물질이다. 이게 그 책의 주제다. 기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온 것이 혁명적이었다. 기존에는 대부분 자극반사, 신체, 무의식 이런 것을 다뤘는데, 베르그송은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오히려 피한다. 자신의 선배들과(프로이트 등) 차별점을 두기 위함이 아닌가. 어쨌든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이 빅히트를 쳤다.

 『물질과 기억』 3장에 나온 그 유명한 원뿔 얘기를 해보겠다. 원뿔이 혁명이었다. 이 책[『투명기계』]에서 나오는 원뿔은 베르그송의 원뿔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도 다 이렇게 생겼다. 원뿔은 영화한테 지배적이다. 영화는 이 원뿔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원뿔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 책[『투명기계』]을 쓴 것도 아니다. 이 원뿔은 존재의 감옥이다. 우리도 못 빠져나간다. 우주로부터 이미지 (베르그송은 이미지라고 말하는데) [즉,] 자극들이 온다. 생명체는 자기한테 필요 없는 것은 투과하고 필요 있는 것은 쟁여둔다. 굴절, 반사라는 표현을 쓴다. 매질로 표현한다. 빛이 이렇게 오다가 굴절을 하는데 어느 순간에는 반사가 되지 않겠느냐. 임계각, 이것이 잠재성의 탄생각이다. 요즘 말로 하면, 잠재태의 탄생각이다. 반사되면 반사상이 남는데, 고게 우리가 말하는 잠재태다. 잠재태가, 생명이 진화하면 진화할수록, 많은 잠재태가 쌓인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이 더 많아지고, 사유와 행동이 더 복잡해지고, 행동의 체계가 더 다각화되기 때문이다. 잠재태가 계속 쌓이기 시작한다. 파일 폴더에 우리가 작업을 많이 할수록 네이밍이 쌓이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잠재태가 쌓이면 쌓일수록, 근데 이것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대류 운동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들끼리 대류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이렇게 와서, 이렇게 빠져나가는 것이다. [영상 18:43 참고. 김곡이 원뿔에 그린 그림.] 그래서 지속이다. 이것을 밝혀낸 것이 혁명이다. 그전까지는 분리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사유와 운동』과 『물질과 기억』에서 계속 비판한다. 경험론, 합리론을 다 깐다. 칼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자토이치가 눈감고 다 썰어내는 것 같다. 장난이 아니다.

 그전에는 지속을 부분만 채가서 단편, 파편들만 채가서 대상을 재구성하거나, 이것이 경험론이다. 자아의 동일성을 재구성하거나, 이것이 합리론이다. 칸트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다. 얘네들의 모순을 막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칸트다. 다 쪼갰다. 이 둘은 서로 싸우지만, 베르그송이 보기엔 똑같았다. 지속을 잘라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제논이 하던 짓을 고스란히 철학에 옮겨왔다. 그래서 베르그송이 비판한 것이다. 베르그송이 시간이 이렇게 와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와 관련 해선 첫 번째 논문과 두 번째 논문에선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물질과 기억』에서 실증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기억이다. 시간이 왔다가 돌아서 나간다. 끊기는 법이 없다. 다만 얘네들이 행동체계가 복잡・다양화할수록, 이것이 더 내려가서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부분까지 내려간다. <인셉션> 생각하면 된다. 층수가 막 이렇게 있는 것. 충분히 내려가게 되면 밑에는 추상화가 진행되어서 이것들은, 베르그송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스스로 확장하고 있다.' <인셉션>으로 치면, 빌딩이 막 날아다니는 것이다. 흐물거리는 것이다. [원뿔이] 무한히 팽창하면, 여기는 우리가 도저히 갈 수 없는 평면이 생긴다. 평면이라는 말은, 베르그송의 용어를 따온 것이다. 신기하게도 쁠랑[plan]이라는 말을 쓰는데, 꿈의 평면, 즉 쁠랑 뒤 헤브[plan du rêve]라는 말을 한다. 쁠랑은 프랑스말로 샷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이 번역을 많이 오독했다. 구도, 기획, 계획 등으로 말이다. 사실은 샷이다. 들뢰즈, 가타리도 그 표현을 쓴다. 쁠랑 드 꽁시스땅스[plan de consistance], 즉 일관성의 샷…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일관성이라는 말은 부족한 것 같다. 모든 것이 하나로… 우주의 모든 것이 다들 참여할 수 있는 공통의 판, 이런 것을 뜻한다. 다 같이 참여하는, 모든 존재자들이 다 같이 참여하는 것이다. 이 무한한 평면이, 원뿔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베르그송은 여기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들뢰즈의 얘기다. 얘네들이[원뿔들이] 하나의 판으로 다 이어졌을 때 이것이[이어진 밑면이] 쁠랑 드 꽁시스땅스이다. 공속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이 든다. 굳이 번역하자면, 공속샷이다. 하나의 롱샷인데, 영화로 표현하면, 하나의 롱샷이 있는데, 거기 있는 모든 존재자들이 공통적으로 속해있는 공속샷이다. 베르그송에게 이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다. 주관적인 극한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튀어나오는 건가 거기에 관심이 있다. (…)

 [원뿔 윗면에] 행동의 평면, 쁠랑 드 락씨옹[plan de l'action]과 [원뿔 밑면에] 꿈의 평면이 있다. 이 꿈은 너무 꿈같아서 나중에 기억도 안 된다. 회상이 안 된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끄집어내지 못한다. 행동의 평면은 기억을 이용하긴 한다. 단, 이용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이용한다. 나한테 필요한 것만 이용한다. [예를 들어,] 길 가다가 첫사랑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한다. 줌인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왜 그럴까? 요즘 내가 외로운 것이다. 필요한 것이다. 첫사랑의 그 모습이.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기억을 소환해낸다. 그것이 회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뿔 밑면에] 순수기억이 있다. 기억이라는 말을 회상이랑 잘 구분하지 않고 썼다. 그것도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나는 이 구분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화이트헤드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원뿔 안에 ‘회상’을 적는다.] 어쨌든 시간은 돌아나가는 지속이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하고자 했던 구도다. 순수기억은 잠재태다. 왜 순수한가? 회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이것이 왜 이쪽으로 못 올라오는 것인지에 대해서 베르그송이 많은 말을 하진 않는다. 정신분석학은 그것이 억압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사회적인 측면에 관심이 없었다.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순수기억이 왜 안 떠오르느냐에 대해선 형이상학적인 답만 내놓는다.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다. 다 형이상학자들이다. 

 지속, 변화, 생성. 왜 생성하는가? 이것 자체가 생성이다. 기억을 쟁이고, 새로운 기억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겠다…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과 (내가 앞으로 할 즉,) 나에게 주어질 시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동, 생성이다. 그것이 하나의 존재의 출현이다. 그것들을 내가 더 적극적으로 할 때, 능동적으로 할 때, 그것을 생명이라고 말한다. 돌멩이에게도 기억이 있는가? 기억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돌멩이는 기억이 없다. 분명히 말한다. 베르그송은. 이것은 생명의 특권이기도 하다.

 내가 화이트헤드를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베르그송을 약 올리는 것인지, 다 반대로 얘기한다. 시간은 소멸이다. 시간은 무엇보다도 소멸이다. (화이트헤드) 자신이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플라톤과 로크로부터 이 테제를 취했는데. 시간은 소멸이다. 시간이 흘렀음을 어떻게 알까? 사진 한 장을 본다. 왜 사진을 보면 우리가 우수에 젖는가? 애도의 시간을 갖는가? 그 존재는 과거로 흘러가버려서다. 그 사진은 그 자체로 현장부재증명 같은 것이다. 지금 이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왜 푸티지 영화들 보면서 애도의 감정을 갖는가? 파운드 푸티지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혹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서 왜 애도를 하는가? 영화 전체가, 혹은 절반이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는. 심지어는 그 플래시백이 하도 빈번하고 과다해서 어디가 현재고... 현재에서 과거로 회상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사람들이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다. 심지어 분장을 안 하고 있을 때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얘기하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님은 세계 최고의 플래시백 작가이다. 그냥 위대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짝코> 같은 것을 보면, 배우들이 나이를 먹은 것을 똑같은 동일 인물이 연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플래시백이 하도 교차, 과다, 빈번해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지 않고, 옷 갈아입고 공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이 사람이 왜 저기 와 있지?’ 이런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그만큼 현재와 과거가 막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임권택 영화의 특수성이다. 80년대 이후를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왜 그런 것을 보면서 애도의 시간을 갖는가? 흘러가 버려서다. 그런 의미에서 소멸이다. 시간은 생성 아닌가? 생성이 맞는데? 소멸도 맞다. 이제 미치고 팔짝 뛰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 얘기를 특히 안 한다. 약간 약 올리려고 하는 것 같이 나는 사실 느껴진다. 개념들이 다 반대로 간다. 지속이 아니라 영원을 얘기하고, 변화가 아니라 불멸을 얘기하고, 생성이 아니라 소멸이다. (이것은 내가 쓰는 단어가 아니라 화이트헤드가 쓰는 말이다.) 불멸, 소멸, 영원.

 사실 베르그송이 영화적, 시네마토그래픽끄[cinématographique]라는 말을 쓸 때는 너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라, ‘나쁜 놈아’ 이런 뜻으로 쓰는 것이다. 영화적이라는 말을 언제나 욕처럼 쓴다. 베르그송은. 내가 막말하는 것이긴 하다. 일종의 베르그송이 우리의 사유의 방식이 했던 깡패짓을 얘기할 때 언제나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왜 영화적인가? (아까 말을 했던) 엘레아 학파나 칸트나 경험주의자나 등등이 했던 짓거리. 이 부분들을 쪼개서 합치면 진짜 운동이 나온다는 재구성. 순간을, 부동적인 것을 가지고 운동을 만들어낸다는 이 행패를, 베르그송은 영화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시네마토그래픽끄[cinématographique], 영화적, 영화론적, 번역할 때는 기계론적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실제로 ‘cinématographique’라고 썼다. '영화적'이라는 말은 베르그송이 경멸할 때 쓰는 말이다. 왜 이게 영화적인가? 영화의 필름스트립을 생각하는 것이다. 필름스트립은 어떻게 생겼는가? 베르그송이 바로 혐오하는 그 방식으로 생겨먹었다. 신기한 것이다. 베르그송이 출현할 때, 영화도 함께, 거의 함께 출현했다는 것은, 되게 우연과 필연 중간쯤 되는 운명 같은 것이다. (…) 베르그송이 많이 화가 났다. 우리가 기계론적 사유, 영화적 사유에 사로잡혔다고 봤다. 시간의 공간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바로 요거로부터[필름스트립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선[베르그송] 욕을 먹던 것이 여기선[화이트헤드] 왕이 된다. 필름이 후루룩 지나간다. 테이크 업 쪽으로 계속 잡아당긴다. 이쪽으로, 과거쪽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소멸이다. 하지만 여기 게이트가 있다고 치면, 소멸하는 것은 그냥은 못 죽는다. 어떤 사람도 그렇지만, 그냥은 죽지 않는다.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죽을 때 무슨 제스처라도 하고 죽는다. 피라도 한 번 뿜고 죽는다. 소멸할 때 그냥 죽지 않는다. 필름스트립도 마찬가지다. 잔상이라도 남긴다. 이것을 ‘불멸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정확한 표현은, ‘객체적 불멸성’이라고 부른다. 이 사태를 말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다. 왜 불멸하는가? 이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소멸하는 것은 영원히 불멸한다. 얘가 그다음 포토그램 위에 오버랩, 그러니까 이중노출… 위로 얹어진다면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원히 남는다. 마치 우주의 한 켠에 거대한 서버실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나가 딱 사라지면 계속 챙기는 것이다. 이것이 객체적 불멸성이다. 이것은 현실태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포토그램을 현실적 존재라고 부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태라 생각하면 된다. 이 용어를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화이트헤드의 용어라서이다. 너무 낯설다. (…) 잠재태라는 말은 되게 익숙하다. 이것과 똑같은 뜻으로, 사실은 다르지만, [화이트헤드는] 영원한 객체라는 말을 쓴다. 어색해서 그렇지 읽다 보니 괜찮다. 불멸하는 사태는 하나의 영원한 객체를 꼭 불러들인다. 그것이 잠재태다. 하나의 영원한 객체로서만 간다. 신기한 것이 왜 ‘영원’이라는 말을 쓰는가? 왜 영원한가? 얘는 시간 바깥에 있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애써 설명했는데, 화이트헤드는 바깥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베르그송이 애써 다 만들어 놨더니, 여기 하나 더 있다고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이다. 시간의 바깥을 항상 상정한다. 화이트헤드가 말이다. 화이트헤드 철학의 아직도 플라톤주의의 위대한 계승인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플라톤주의를 막 까고 있지만, 화이트헤드는, 사실은 플라톤주의의 가장 그 초근대적 사유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이 있다면, 시간은 소멸된다면, 소멸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게 영원, 영원한 객체다. 얘는 소멸하지 않는다. 

 퀴즈. A.E. actual entity, 현실적 존재다. 오영환 선생님은 현실적 존재라고 번역했다. 영원한 객체[영원한 대상], E.O. eternal object. 나는 한 50년 뒤에는 죽을 것이다. 나는 현실적 존재다. 소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잘살았다면 이름이 남을 텐데, 이름으로서의 나는 영원한 객체다. 이런 식이다. 별로 어렵지 않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베르그송의 원뿔도식을] 화이트헤드가 변용하는 방식이다. 영원한 객체는 (되게 이상한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러면 굳이 왜 시간 안에 넣지 않고, 원뿔 안에다 넣지 않고, 원뿔 밖으로 왜 자꾸 빼려고 하는가? (…) 순수한 잠재태라는 말을 쓴다. 화이트헤드식으로 영원한 객체도 순수한 잠재태. 단어도 똑같다. 'virtualité[잠재태]'. 그런데 순수하다. 꼭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기한 말을 많이 하는데, 투명하다고 말한다. 물론 진입 방식에 있어서의 투명성이다. 베르그송은 반대로 말한다. 순수기억, 얘는 빛을 쬐도 안 올라오는 놈이다. 한마디로 이쪽으로[원뿔 아래쪽으로] 갈수록 어두워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존재는 빛을 쪼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일종의 계몽주의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다. 이것은 내 표현이 아니다. 빛을 쬔다는 표현은 베르그송 본인의 표현이다. 빛을 쬐어, '너 걸렸어?' 그러면 빛을 쬐는 목적: '내 앞에 대상이 나타나서 첫사랑을 기억해야겠다.' 왜냐하면, '내가 외로우니까.' '나의 첫사랑.' '95년 그날 우린 행복했었지.' 소환해서 [행동의 평면 쪽으로] 착 붙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재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불투명하다. 그런데 내가 혹시 못 보고 지나쳤거나, 내가 너무 나의 일상생활에는 상관이 없어서, 이 불투명성이 너무 어두워지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깜깜이로 파묻히는 것은 결국 소환이 안 된다. <인셉션>에서의 그 수면기계가 발명되지 않는 한. 그런 의미에서 잠재태는 빛난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보면 과장이다. 베르그송이 빛난다고 표현할 때는 순수지각론에서 한정해서만이다. 불투명이다. 빛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가 빛난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빛에 별로 관심이 없다. 투명하다고 말한다. 순수하다. 이런 말을, 이상한 말을 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영원한 객체를 머리에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무한히 떠올려 봐라. 이것은 영원한 객체의 모든 것이라고 떠올려도, 거기에는 항상 남는 여분이 있다. 이런 말도 (있다), '신도 영원한 객체를 창조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영원한 객체의 무한 집합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가 태동할 때, 그것은 무한 공급된다. 물론 여기도 원뿔이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을 가지고 와보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그림대로 화이트헤드를 설명해보는 것이다.

 (…) 베르그송은 [원뿔 윗면에서 중앙, 아래로] 이렇게 와서, 요렇게 잠재태가 계속 세이브하는 것이다. 여기는[화이트헤드는] 세이브의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로딩의 과정이다. 이 로딩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주관적인 극한과는 상관없이, 좀 막말로 해보자면, 우주 저 한 켠에서 무한 공급되고 있다. 막 빨려 들어오는 것이다. 왜 무한 공급이 될 수 있을까? 얘네는 시간 바깥에 있다. 우리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리고 얘네들은 그 각자가 너무 투명해서 그 안에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커피컵을 들고] 빛깔이 이렇게 돈다고 해보자. 여기가 좀 어둡고 여기가 좀 밝다. 영원한 객체를 빛깔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화이트헤드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다. 저 설악산은 천재지변에 의해 무너진다. 영원한 객체는 아니다. 소멸하니까 현실적 존재다. 하지만 설악산의 색깔은 어떤 산에도 나타날 수 있고, 설악산에 지금도 나타나고, 그 설악산을 내가 떠올려도 계속 또 나타난다. 동일한 그 모습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걔는 시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저 뒤에서 신이, 내가 필요하면, 뭘 계속 던져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뒤에서 막 던져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된다. 영원하다는 뜻이 그런 것이다. 여기서 돌면 색깔이 밝은 데서 진한 데로 쫙 움직였다. 이것을 하나의 지속이라고 말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그런데 화이트헤드가 보면, 하나의 지속이 아니라, 무한계의 영원한 객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왜 투명한가? 이 갈색이 변해서 저 갈색이 된 것이 아니다. 변조되지 않는다. 영원한 객체는. 이 갈색은 이 갈색이고, 그 갈색은 그 갈색이고, 진한 갈색은 진한 갈색이고, 옅은 갈색은 옅은 갈색이다. 하나의 지속이 변조되는 게 아니라… (말하기가 진짜 어렵다.) '순간'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순간의 반대다. 원자론의 가장 궁극의 교훈은 마지막 원자는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모든 것을 원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촤라락 바뀌었는데, 그러면 바뀐 수만큼의 원자가 존재하고, 바뀐 수만큼의 영원한 객체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냥 무한이라고 표현한 것이지, 사실 무한도 아니다. 그것을 무한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순간을 상정하게 되고, 순간이라고 말하면 또 다른 고정되어 있는 원자를 상정하게 된다.

 화이트헤드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하나의 원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필름스트립처럼 존재한다. 얘네들은 끝이 없다. 얘네들은 언제나 절단 가능하다. 아니, 절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절단되어 있다. 이미 절단되어 있다. 이것들을 붙이는 게 영원한 객체다. 약간 뚜쟁이 같은 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을 모아서, '우리 잘 미팅해서... 우리 스터디 클래스 하나 만들어볼까?' 계속 객체화시키는 것이다. 얘네들을 뚜쟁이로 해서, 얘네가 모여서 하나의 샷이 나오고, 요렇게 모이면은 그다음 샷이 나오고, 이런 식이다. 우리가 발생하는 존재의 개체 수만큼의 그보다 더 이상의 영원한 객체가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무한 공급되고…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얘가 언제나 잘린 상태로 존재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원자는 잘리지 않는다. 영원히. 그래서 원자다. 그런데 영원에 의해서만 잘린다. 그래서 원자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객체다. 무슨 말인가? 원자들을 결합시키고 헤어지게 하는 것이 다 영원한 객체다. 우리의 능력치대로 우리는 헤어졌다 모였다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영원한 객체는 그런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 어둡지 않다. 투명할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의해] 베르그송주의자들이 슬슬 열 받기 시작한다. 얘기를 다 거꾸로 하니까. 이렇게 설명해야 할 것을 왜 굳이 이렇게 설명하는가? 여기서부터 신기한 이야기가 나타난다. 왜 얘가 바깥에서 계속 오는가? 어떤 원자도 고립되어 있지 않다. 어떤 원자도 항상 옆에 원자가 있고, 자기 안에도 원자가 있다. 라이프니츠를 생각하면 된다. 물론 라이프니츠는… 합성 문제는 굉장히 아직도 골치 아픈 문제이다. 이 원뿔 안에도 원뿔이 있고, 원뿔 옆에 항상 다른 원뿔이 있어야 한다. 원자는 항상, 외로운 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자론을 화이트헤드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진리는 원자론뿐이다.'라고 얘기할 때는, 그 원자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원자론이 아니다. 이 원자론의 가장 핵심 테제는 외로운 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궁극의 원자, 즉 마지막으로 쪼개지지 않는 원자도 없다. 영원한 객체만 나타나면 걔는 쪼개지고 다시 붙는다. 영화랑 비슷하지 않은가? 

 베르그송 구도로 친다면, 원뿔이 다시 있어야 한다. 베르그송은 원뿔 옆에 원뿔은 잘 얘기하지 않는다.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분은 이것을 그냥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퉁친다. 왜 환경이 원뿔로 안 보였을까? 걔네들은 기억하지 않아서다. 화이트헤드는 왜 환경이 원뿔로 보일까? 돌멩이도 기억한다. 이것은 막말이다. 화이트헤드는 진짜 이렇게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를 재해석하는 실재론자들은 그런 말도 한다. 돌멩이도 기억한다. 왜 기억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영원한 객체의 공급은 누구를 가리지 않는다. 평등하게 제공한다. 무한히 공급되고 있고… 그렇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단순 정위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라는 말을 쓴다. 근대적 사유의 가장 큰 오류다. 뭐냐하면 이런 것이다. 뉴턴 공간을 생각하면 된다. 어떤 물체가 저기 있다는 생각, 이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다. 왜 오류인가?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말하자면… 사실 이것도[원뿔도식을 가리키며] 단순 정위의 오류다. 화이트헤드한테는.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원자들로 쫙 조밀하게 차 있는 세계다. 여기에 하나 빈틈이 없다. 빈틈이 있으면 이 세계는 무너진다. 빈틈이 있을 리가 없다. 아직 안 무너졌기 때문이다. 얘네들은 무한히 결합과 분할을 반복하면서 막 우글댄다. 베르그송은 여기에서만[원뿔 아랫면을 가리키며] 우글댄다. 화이트헤드는 이 자체가 우글대고 있다. 왜냐하면 얘[원뿔]도 하나의 원자이기 때문이다. 이 원뿔들은 현실적 존재의 개수만큼 확 펼쳐져 있다. 막 있어야 한다. 단순 정위의 오류는 무엇인가 하면, 얘네들을 사상시켜놓고, 한마디로, 진공을 만들어 놓고 물체가 거기에 딱 있다고 생각, 요 생각의 습관을 단순 정위의 오류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것이, 실체 속성 같은 것이다. 그리고 뉴턴의 공간 같은 것. 막 이런 말을 한다. 아니, 중력으로부터 물체개념을 연역하지도 않고, 그냥 절대 시공간에 놔버렸네. 이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다. 한 마디로, 얘네들이 조밀하게, 언제나 조밀하게 있는 놈들인데, 다 사살시켜놓고, 요놈 하나 잡아 놓고 나서, 추상적인 시공간에 딱 놔두고, 이제부터 이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이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라는 것이다. 근대적 사유의 아주 악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베르그송도 단순 정위의 오류다. 이런말 하면… 위험한 말이긴 하다. 베르그송한테 이렇게 말하진 않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그냥 내 생각이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받아서 하는 생각이다.

 화이트헤드는 원뿔 자체가 여러 개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얘네들이 쭉 붙어 있다. [원뿔 3개(아랫면)를 이어 붙인다.] 얘네들도[원뿔의 꼭짓점끼리] 교류하고 있다. 이런 세계다. 그러다 보니, 얘네들을 사진을 하나씩 찍는다고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영상 47:30 참고.] 이것이 필름스트립이다. 이 사이, 요놈이, 이 밑에 판에서 올라오는 지점인가? 그렇다. 올라오는 지점이다. 그것이 잔상이다. 운동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세계가 말이다. 재밌는 것은, 베르그송은 거꾸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분할이라서 운동이 안 나온더니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가? 이에 베르그송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환영을 보고 좋아하느냐? 바보도 아니고. 정말로 움직였으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그 대답은, 아주 미약하게 대답을 한다. 한 강연록인데, 『사유와 운동』 각주처럼 쓱 지나가는 문장인데, 본인도 막 설명을 하려다가, '좀 그렇네…', '운동은 실재하는데', '운동까지 환영'이라고 해버리면, 스스로 까는 것 같으니까… 이런 말도 한다. 그 운동은 영사기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베르그송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무엇인가? (내가 베르그송을 너무 욕하는 것 같다…) 영화를 이렇게만[(정지된) 필름스트립으로만] 본다. 사실, 얘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얘가 움직일 때는 영사기가 필요하다. 그것을 보는 관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볼 때는 어둠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극장이라는 환경이 필요하다. 극장이라는 환경이. 얘 한 줄만 움직이는가? 한 줄만 움직이는 영화는 없다. 마치 여러 줄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생각해봐라. 과거랑 현재가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임권택 감독님이 너무 가깝다면, 멀리 가도 된다. 영화의 탄생을 알린 <국가의 탄생>을 한번 돌이켜보자. 그리피스. 평행 편집을 드디어 개발했다. 내러티브가 출현한다. 내러티브는 언제나 평행이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내러티브 공식들 말이다. 사적, 공적 플롯의 분위기. 심리와 상황의 분위기. 공공성과 사사성… 영화는 가장 반하버마스적인 매체다. 이 분기는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의 기원을 파고들어가보면, 평행 편집이다. 그리피스의 평행 편집은 무엇인가? 소녀가 막 처형당하려고 한다. 흑인 폭도들한테. KKK가 막 달려간다. 소녀가 처형당하려고 한다. KKK가, 백인 진압단이 막 달려간다. 얘네들이[필름스트립 두 개가] 수렴할수록 얘네들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언제나 필름스트립은 두 개 이상이다. 어떤 영화이건 간에. 

 베르그송에게 오류가 있다면, 단순 정위의 오류인데, 정말 이것[필름스트립] 하나만 놓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사실 얘는 옆에 하나씩 더 있어야 한다. (강의 말미에 얘기하려고 했던 것인데) 사실 현대영화는 얘네들이 계속 늘어나는 경향이다. 홍상수 영화 생각해보자. 항상 몇 명의 관점을 교차하기 시작한다. 홍상수 감독이 아주 운명적으로 부뉴엘주의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그분이 리얼리즘인척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차이밍량 영화를 예를 들어보자. 항상 골방에 사람들이 갇혀있다. 그리고 소통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원자화되는 경우는 계속 심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더 이상 소통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조금 이후에 말하도록 하자.) 계속 늘어나는 이 경향만 보더라도 베르그송은, 지금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선생님, 영화 한 편 보러 가시죠.' 하고 싶다. 

 그럼 왜 굳이 원자라는 말을 쓰느냐?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베르그송에게도 다시 물을 수 있다. '선생님, 옆에 이거[다른 원뿔] 진짜 없는 것입니까?' '아냐, 나도 사실 이거 얘기하려고 했지.' 할 수 있다. 왜 굳이 그러면 [베르그송은] 지속이라는 말을 쓰느냐, 그리고 왜 화이트헤드가 원자라는 말을 고수하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왜 잠재태라는 말 대신에 [화이트헤드가] 영원하다는 말을 쓰느냐.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이것이다. 순수기억이 시간의 안쪽에 있는가, 아니면 시간의 바깥쪽에 있는가. 이 차이는 엄청난 차이다. 그리고 이 차이. 이 주관적인 극한이 언제나 존재한다, 베르그송한테. 이것을 뚫을 수는 없다. 얘는 아무리 넓어져도 막혀 있다. 사실, 화이트헤드가 닫음의 철학자라고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베르그송이 닫음의 철학자다. 닫혀 있다. 이것을 뚫을 수 없다. 이걸 뚫으려면, 기억을 복제하는 수밖에 없다. 뚫리지 않는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이미 뚫려있다. 막 무한 공급되는 것 아닌가. 그게 신이든 뭐든 간에 막 공급해서 밀어 넣고 있다. 내가 아무리 본적이 없더라도, '아, 설악산의 색깔‘ 하면 떠오르는 것이다. 설악산의 색깔… 내 기억으로부터 소환되지 않는다. 걔네들은. 그리고 내가 죽어도 걔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내가 죽으면, 잠재태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일종의 소유물이다. 주관의 소유물. 이 순수기억이라는 것은 주관의, 안에 들어가 있는 애들… 한 마디로, 보따리 안에 들어가 있는… (불충분한 표현임을 용서해달라. 왜냐하면 순수기억을 물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에 속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는[화이트헤드에게는] 속해 있지 않다. 영원한 객체가 날아다닌다. 나도 받고, 너도 받고… 그러면서 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주관적인 극한에 얽매이지 않는다. 절대 규정되지 않는다. 막을 수 없다. 개는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가 죽어도 거기 있을 것이고, 내가 죽고, 나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그걸 떠올리면, 거기에 반드시 나타난다. 유령 같은 애다. 화이트헤드가 되게 재밌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영원한 객체는 시간을 빙의시킨다, 이런 표현을 쓴다. 오영환 선생님은, 때의 흐름을 혼백처럼 따라다닌다. 'haunt' 이 단어다. 집 같은 것이 유령 들렸을 때, 'haunt'를 쓴다. 정말 귀신 같은 것이다. 영원한 객체가. 그래서 초시간적이다.

 이게 무슨 소용인가? 소용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항상 선택한다. 내가 볼 때 말이다. 그리고 영화 보는 데 별로 크게 영향은 안 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에 굉장한 영향을 준다. 우리는 시간을 생각하지,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언제나 영원하게 끝난다. 예를 들어,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 영화사가들이 많이 예를 드는데… 선댄스 키드와 부치 캐시디가 총을 들고나오면서 딱 끝난다. 프리즈 프레임을 딱 건다. 탕탕탕 소리가 들리며, ‘아악’ 하며 프리즈 프레임으로 딱 끝난다. 유명한 장면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 발췌 장면 참고.] 그 사람들 죽었는가? 현실적 존재로는 죽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영원한 객체로 살아남는 것이다. 바로 그게 언제나 영화에서 속편이 가능한 이유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다. 이 강의 말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인데, 영화의 대상은 시간적인 대상인가, 영원한 대상인가. 이것은 엄청난 문제이다.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소용없다. 하지만, 당신이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심지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적인 대상인가, 영원한 대상인가. 어쨌든 간에... 내가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볼 수는 있지만, 그림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걸로[베르그송의 원뿔도식] 영화를 얘기할 수 있으려면, 요놈을[필름스트립을] 없는 셈 쳐야 한다. 실제로 들뢰즈도 『시네마』 장 한구석에서 잠깐 요걸 없애고 간다. 되게 얄미운 말인데. 예술의 목적과 수단에 대해서는 두세 줄만 싹 치고 딱 넘어간다. 내 언어로 번역하자면, 자세한 문장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예술에 있어서 수단이 원자론적이라고 해서, 그 목적과 작품 자체가 원자론적이겠냐. 하하하. 아니지.’ 그리고 패스. 딱 넘어갑니다. [필름스트립을] 사상시켰다. 베르그송으로 영화를 얘기하려면, 요걸[필름스트립을] 사상시켜야 한다. 나는 거꾸로 묻고 싶다. 만약 들뢰즈가 그렇게 말한다면, '네. 붓이 그림을 규정합니다.'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모든 예술가들이 도구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라고 거꾸로 말씀드리고 싶다. 영화가 이렇게[필름스트립처럼] 안 생겼다면, 영화도 그렇게 나오지 않을 것이고, 마치 우리 신체가 이렇지 않았다면, 우리 정치 체제가 이랬을까? 마치 우리 눈이 발바닥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 체제를 가졌을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유물론자이다. 이걸로[필름스트립으로] 이렇게 태어났으면, 여기의 구조가 분명히 투영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굴뚝의 구조에 따라서 연기의 색깔이 달라지지, 그 역이 아니다. 연기의 색깔이 달라졌으면, 분명히 굴뚝의 구조에 뭔가 거기에 특이성이 있는 것이다. 나랑 화이트헤드에게 넘어오는 것은 이런 것일 테다. ‘네가 이걸로[필름스트립으로] 설명해봐라.’ 그래서 내가 이 책[『투명기계』]을 쓴 것이다. ‘영원, 불멸, 소멸로 네가 영화사 한번 읊어볼래?’ 그래서 쓰기 시작한 책이다. 

 나는 거꾸로 화이트헤드가 하려던 것, 원자론… 왜 원자론을 그렇게 주창했느냐? 이것은 내 생각인데, 누구보다도 개체화에 미쳐 있던 철학자인 것 같다. 원자는 쪼개질 수 없다. 그 자체로 영원히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오기 전까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에 의해서만 쪼개지는 그놈은, 시간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그 자체인 것이다. 쪼개지지 않는다. 개체다. individual한 것이다. 개인주의의 개체가 아니다. 개인주의의 개체와 완전히 다르다. 개인주의의 개체야말로 단순 정위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들을 다 사상시키고, 개인들의 집합까지만 딱 얘기한다. 전형적인 근대적 사유의 단순 정위의 오류다.

 (...) 아마 개체에 미쳐있던 철학자 같다. 실제로 개체라는 말을 많이 쓰지는 않는데, 되게 재밌는 말을 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얘만[원뿔 하나만] 생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동시적... (동시성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동시성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계층적 도피성[영상 59:45 참고. '계층적' 뒤의 단어가 잘 들리지 않는데, 이 용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찾지 못했다.]이라는 이상한 말을 쓰는데, 얘 생성은 옆에 있는 놈의 생성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 마디로, 독자적인 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동시에, 싱크되어서 일어난다. 번역을 너무 잘했는데, 그것이 '합생'이다. 생성이 아니라 공동생성. 항상... 합생은 전 우주의 개체화다. 이런 말을 한다. 합생이, 모든 것을 쫙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주다. 다 같이 우글대면서 일어나는 사태를 생각하면 된다. 돌멩이도, 지렁이도, 빠짐이 없다. 하나라도 빈틈이 생기면, 하나라도 여기에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우주는 무너진다. 그래서 공리들에 집착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우주를, 공리 몇 개를 설명하는가, 범주들을 설명하고 그러는데... 나는 그쪽까지 전문은 아닙니다. 다른 세계라는 것을 내가 계속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진짜 추상적인 얘기를 저렇게 열심히 얘기하는가. 여러분들도...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건 상관이 없다. 사랑은 열렬히 하면 된다. 사랑의 이유와 근거와 그 방식을 물을 때는 이것은 여러분의 언어와 생각을 너무 지배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영화가 생리론자인가, 원자론자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오래된 아주 쉬운 대답을 하게 된다. 최근 30년 동안 한국의 영화적인 사유, 언어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리얼리즘이다. 툭 까놓고 얘기해보자. 할 말 없으면, 리얼리즘 말하면, 대충 끝난다. (너무 막말하나...) 사실, 그러면 리얼리즘의 리얼이 뭐냐, 거꾸로 물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원자론자라고 한다면, 스피노자주의자보다 라이프니츠주의자고, 베르그송주의자보다 화이트헤드주의자라면, '원자론으로 거꾸로 영화를 설명해라.'에 나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원자론적인 입장에서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내가 이것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안 보이던 영화가 보이고, 모르던 영화가 막 더 재밌어지고,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제이슨 본처럼 재밌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한 마디로, 실용성은 없지만, 실용성 때문에 우리가 책을 분서갱유 해야 한다면, 인류의 한 절반의 책은 분서갱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왜 이 책[『투명기계』]을 쓰게 되었는가, 그 충동에 대해서 얘기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다.

 하여튼, 이 질문에 정말 대답해야 한다. 나는 몇 가지 예를 이 책[『투명기계』]에서 든다. 개체화는 원자화와 같은 뜻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자화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원자화가 아니다. 원자화는 항상 공원자화와 함께 있다. 말도 막 만들어보는 것이다. 원자화는 공원자화를 배제할 수 없다. 맞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 범원자화를 판원자화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영화의 원자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생각보다 영화는 개체화에 미쳐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우리 드디어 몽타주의 태동 시기를 찾아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처음으로 몽타주를 발견해서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는 쿨레쇼프 효과. 물론 그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기록들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안성기 아저씨인 '모주킨[Ivan Mozzhukhin]'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을 딱 짓는다. 옆에 수프, 관에 누워 있는 여자, 마지막 하나는 기술에 따라 다른데, 에로틱한 여자, 혹은 어린 소녀를 놨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쨌든, 무표정이 쫙쫙쫙 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대상에 따라서 말이다. 그래서 소비에트 사람들이 열광을 한 것이다. '아, 샷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고, 그 관계로부터 의미가 나오는 것이구나.' 이렇게 보면 되게 베르그송적이다. 왜냐하면, 이 샷은 이쪽으로 쭉 열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를 보면 '말 걸어보고 싶다.' 수프를 보면 '어, 배고파.' 무표정한 얼굴인데, 의미가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과학자들도 막 달려들어서 그때 한창 논의되었다. 1920년대, 30년대 독일과 프랑스에서 말이다. 관 뚜껑 보면 '슬프다...' 얘[무표정한 얼굴]가 여기에 열린다고 설명하는 것은 굉장히 베르그송적인데, 얘가 이걸 봤을 때 이 표정이 아니고, 왜 이 표정[우리에게 보이는 표정]인지는 사실 닫음의 철학으로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보면[무표정한 표정 샷과 그다음 이어지는 샷이] 이렇게 원자화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얘와 얘는 같이 개체화되는 것이다. 배고픔이라는 영원한 객체가 와서 딱 붙어야 한다. 되게 비견한 예이다. 열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속의 개방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의 목표는 항상 닫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 철학의 가장 정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열림의 조건이자 목적은 닫음이다. 개체화다. 원자화다. 원자화가 안 되면, 이것은 이렇게 될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베르그송이, 단지 개방성으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얘가 달라졌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지, 얘가 꼭 그거여야 되냐는 필연성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 이것은 닫음이다.

 원자의 예를 몇 개 더 들어보자. 그리피스의 평행 편집. 내러티브가... 이제부터 미친 소리가 나올 것이다. '너는 영화가 닫힘의 철학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으시면,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열린 적이 없다. 영화는 열린 적이 없다. 우리는 개방, 지속, 시간을 외치지만, 아무리 누군가 와서 개방, 지속, 차이 외쳐봐도 영화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영화는 닫고, 영원하려고 하고, 개체화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게 장르다. 다른 예술 매체와 다르게 영화는 장르가 있다. 다른 것은 사조와 유파가 있지, 장르가 있지 않다. 왜 장르가 있느냐. 정형성이라는 테두리로 계속 개체화를 하는 것이다. 묶는 것이다. 다른 데, 연극배우에는 스타가 없는데, 영화배우에는 스타가 있다. 그게 개체화다. 범접 못 하는 개체화를 만드는 것이다. 연극배우는 우리가 등장인물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영화배우는 사실 등장인물의 이름 기억 잘 못한다. 하정우가 어디서 무슨 역할을 하든지 간에 하정우는 하정우다. 어떤 영원한 타입을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목표는 영원한 타입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타입이, 아무리 캐릭터의 이름이 변해도, 걔는 그것이다. 우리가 하정우를 부를 때, 강동원을 부를 때, 강동원은 강동원이라고 부르는 게 빠르기 때문에, 강동원이라고 부른다. 강동원이 나왔던 배역들의 이름을 우리는 다 기억하지 못 한다. 하지만 리어왕은 리어왕이다. 햄릿은 햄릿이다. 어떤 배우가 오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그냥 문법적인 것만 좀 더 보면 다음과 같다. 평행 편집. 얘네가 왜 평행한가? 영원히 안 만난다. 그래서 평행선이다. 시간 안에는 얘네들을 타협시킬 중재자가 없다. 여기서부터 내러티브가 발생하는 것인데. 주인공이 있고, 이게 적이든, 공공의 영역이든, 사적인 영역이든 얘네 둘은 통합되지 않는다. 막 싸우면서 가는 것이다.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화해되지 않는다. 타협 불가능하다. 단 전제는, 시간 안에서. 그래서 평행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시간 안에서 타협되지 않으면, 시간 밖에서 타협되는가?' 그렇다. 그래서 평행이다. 무한 원점에서 만난다. 평행선은 무한 원점에서 만난다. 영원히 안 만나기 때문에... 말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기하학자들의 정리들이다. 실제로 영원한 곳에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소비에트랑 미국 평행 몽타주랑 프랑스 가속 몽타주랑 다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국가'하면 미국이랑 소비에트가 탁 나온다. 이것이 고전 몽타주의 아주 큰 전제다. 이 타협될 수 없는 두 평행 테두리를 견인해내는 무한 원점이 존재한다. 한 마디로, 거대한 단일 질량 중심이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에이젠슈테인이 견인이라는 말을 썼을 때는, 이 관념에 대해서 정확한 파악을 하고 있던 것이다. 뭔가 견인을 한다. 뭔가 끌어당긴다. 그게 영원한 객체다. 실제로 화이트헤드는 그런 표현을 쓴다. 영원한 객체는 유혹(lure)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제가 유혹한다고 말한다. 명제는 영원한 객체와 현실적 존재의 결합체이다. 어쨌든...

 (...) 얘네가 왜 못 만나느냐... 왜 영원에서만 만나야 하는가. 실제로 내러티브는 어떤 영원한 객체가 끌어당기면서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얘네들은 서로에 대해서 닫혀 있다. 얘네들은 열리면 큰일 난다. 내러티브 얘기를 좀 해보자. 내러티브는 닫음의 예술이다. '시간과 개방 아닌가요?' 아니다. (...) 한 고유한 마을이 있다고 해보자. 마을이 있다. 이러면 내러티브가 아니다. 내러티브가 안 생긴다. 고유한 마을이 있다. 뭔가 일어날 것 같다. 그러면 내러티브다. 왜 마을이 있어야 하는가? 한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고유한 마을에 늑대가 나타나 소녀를 잡아갔네? 마을 사람들이 찾는데, 소녀도 죽어 있고, 그걸 구하러 가는 와중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간다. 이것이 전형적인 내러티브다. 그러다 보니까 산에서 길을 헤매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늑대 떼가 마을을 다 휩쓸어 갔다. 한 마디로, 우리가 지키려던 것을 다 잃었다. '이제 포기하자.' '아닙니다. 마지막 한 번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경찰을 불러?' 혹은 '야, 내가 사냥꾼 수렵 협회에 전화번호 있는데, 걔네들 부르자.' 이러면 내러티브가 아니다. 부르려면 진작에 부르지. 닫아 놓고 시작한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를 생각해보자. 모피어스를 구하러 가야 한다. 키아누 리브스가. '내가 구하러 가겠어.' 결단을 한다. 그런데 '나한텐 그 힘이 없어.' '그래도 내가 가겠어.' 이게 영화의 내러티브다. '아, 내가 전화번호를 하나 아는데, 나보다 센 놈이 하나 있어. 걔를 부릅시다.' 이것은 내러티브가 아니다. 이런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되게 신기한 게, 가끔씩 영화판에 있다. 실수로 샐 때가 있다. 영화 보다 깬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이 항상 하는 게, 전문용어로 니주[にじゅう]깔기 한다. 다 매복시켜 놓는다. 한 마디로, 마을이 있다는 그 잠재적 환경 공간에 다 쟁여놓고, 거기서만 뽑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영화 중간에 필연성 없이, 쑥 들어오면, 그건 내러티브가 아니다. 걔가 뚫려서다. 잘 닫아놓고, 닫은 데서 딱 끝내야 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멜로물 중 하나인 <로마의 휴일>을 떠올려보자. 공주가 가다가 걸릴 입장에 놓였다. 왕실에서 파견했다. '너 공주인 것 다 알아.' 그때, '슈퍼맨 도와줘요.' 하면서 슈퍼맨이 왔다. 아니면, 친구한테 전화해서 '어, 나 얘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래. 나 여기에서 구해줘.' 이러면 내러티브가 안 된다. 공주가 자신이 인제까지 가져왔던 가치를 포기하면서 그 로마 안에서 끝장을 내야 한다. 뉴욕이나 밀라노로 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공주가 한 선택은, 가장 말괄량이 짓, 기타로 사람들 머리 때리면서, 가장 공주답지 않은 짓을 하면서 위기를 빠져나간다. 그런 것이다, 내러티브는. 언제나 닫혀있다.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좋아하는 영화 아무것이나 떠올려 봐라. 아니면, 싫어하는 영화 아무것이나 떠올려 봐라. 거기엔 분명히 위장이라는 사태가 있다. 영화의 아주 고유한 사태다. 다른 데는 없다. 사진에도 위장이 있다. 하지만 없는 것이 있다. 위장이 없는 사진이 있다. 보도 사진 같은 경우다. 위장이 없는 연극은 있다. 추상도가 높은 경우. 마임극이나 신체극 같은 것. 위장이 없는 미술도 있다. 위장이 없는 연극도 있고, 위장이 없는 문학도 있다. 내적 독백이 심한 경우. 위장이 없는 다른 예술은 있지만, 위장이 없는 영화는 없다. 하다못해 거짓말이라도 한다, 영화에서는. 하다못해 내숭이라도 한 번 떤다. 어디 숨거나, 숨기거나... 여러분이 좋아하는 영화 아무것이나 떠올려 봐라. 거기엔 변장, 위장, 숨기기라는 사태가 항상 있다. 왜 그럴까? 영화가 닫혀 있고, 그 안에 또 닫힌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하나의 집합] 드러내놓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여기선[다른 집합] 못 드러내놓고 다닌다. 항상 닫힌계가 두 개 이상 겹쳐 있는 것이 영화라는 것이다. 내 생각이다. 열려있지 않다. 잘 닫아 놓는다. 그래서 숨어 다니는 것이다. 닫힌계를 극대화한 것이 공포물이랑 SF이다. (...) 그리고 얘네들을[집합들을] 극단적으로 벌리는 영화적인 경향이 존재한다. 최근의 나타나는 동아시아 영화가, 멀티 내러티브 영화 같은 경우에 많이 나타난다. 1980년대 이후에 굉장히 급속도로 늘어난 사태다. 홍상수, 카우리스마키, 차이밍량 영화 같은 것 보면, 영화의 골방화라 말할 수 있다. 골방에 가둬두고, 못 나간다. 카우리스마키 생각해봐라. 부조리극이다. '잘 잤니.' '밥 먹었다.' 말이 가다 소실된다. 공간 안에서. 진공에서 증발한다. 뭘 표현하는 것인가. 단순 정위의 패러디라고도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적으로 말한다면 말이다. 카우리스마키가 화이트헤드를 읽고 삘 받아서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의 닫힌계를 계속 극단화하는 방법으로 영화는 진행된다는 것이다.

 <인셉션>은? <인셉션>은 겁나 닫았다. 층수도 나눴다. 닫힌계에 말이다. 물론 이게 독특한 생각은 아니다. 부뉴엘이 하고, 펠리니가 하고, 한국 뉴웨이브가 겁나 하던 짓이다. 물론 각기 다른 방식과 다른 목적과 다른 근거로 말이다.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은 펠리니와 부뉴엘 영화다. [<자유의 환영> 발췌 장면 참고.] 어떤 여자애가 놀이터가 앉아 있다. 바바리 맨 같은 사람이 사진을 보여준다. '봐봐. 죽이지 않냐.' 여자애가 막 놀래서 엄마한테 간다. 관객한테 아직 이 사진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봐도 노출증 환자구나, 바바리 맨 같은 사람이라서 포르노 사진을 소녀한테 보여주고, 자기가 성적 쾌락을 느끼고 튀었구나... [라고 생각할 텐데.] 그래서 부모님이 보더니, '너 올라가 있어.' '더러워.' 막 이런다. 그러다 카메라가 딱 넘어가면, 뭐가 있냐면,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 에펠탑, 개선문,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 조형물 사진이 쫙 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포르노처럼 보는가? 어떤 곳에서 포르노인 것은, 어떤 곳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세계인 것이다. 얘[커피컵]는 이 세상에서는 화장실인데, 배설구인데, 이쪽에서는 이게 먹는 것이다. 요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닫힌 세계... 이게 멀티 내러티브의 전통에 아주 강고한 생각이다.

 알트만의 영화를 보면, 사실 각 에피소드 간에 인과법칙이 거의 없다. 여기 인과법칙이 있으면 큰일 난다. 그러면 멀티 내러티브가 아니다. 여기에 인과법칙이 있는 멀티 내러티브 영화는 내가 본 것 중엔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가 없다는 것은 이 사이에 시간이 흐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알트만의 영화나 부뉴엘의 영화에서, 특히 알트만의 영향에서 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감금시켜 놓았는가? 얘네들을 통합할 영원한 객체가 아직 오직 않았다. 그게 이 현대사회의 불행이다. 화이트헤드적으로 말하면, 알트만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불행은 현실적 존재들은 너무 많아지고, 너무 복잡・다양해졌는데, 한 마디로, 우리 삶은 너무 다양해졌는데, 이것들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없네... 쉽게 말하면, 이렇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영화만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가져다 쓴 것은 맞다. 알트만이. 레이먼드 카버도 굉장히 잘 표현한다. 문학 작품 중에 가장 영화적인 문학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이렇게 쪼개서, 편집할 수는 없다, 레이먼드 카버조차. '파편화'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대부분은 파편화로 혼동한다. 모더니즘 비평은 이걸 파편화로 혼동한다. 옛날 모던 시네마로 말하는, 1970년대, 80년대... 모더니즘 비평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무엇인가 하냐면, 이것들이 너무 보기 싫어서, 자기도 싫어하는 것에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모더니즘 비평의 문제다. 옛날 영화하면, 그 사람은 꼰대이다. 한 마디로. 요즘 영화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장르 영화도 분명히 예술 영화 이상의 것이 있다.

 (...) 이게 3부 2장 내용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나도 신기하고, 이 책[『투명기계』]에서 너무 불친절하게 설명한 것 같아서, 이 시간에 꼭 설명하려고 했다. 원뿔로 하겠다. 한 마디로, 내러티브는 하나의 원뿔만 가지고 성립되지 않는다. 언제나 두 개 이상의 원뿔을 필요로 한다. 얘네들은 각각 다른 시간 내에 놓여 있다. 평행 편집을 생각하면 된다. 내러티브가 평행 편집에 의해서 태동되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영화사적 사건이다. 내러티브는, 좀 막말하자면, 영화에만 존재한다. 소설은, 특히 비트[beat] 이후 세대는,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데 오히려 주력했다. 내러티브는 버려도 되는 데다. 문학은. 문학은 내러티브를 버려도 된다. 닫아놓지 않아도 된다. 내적 독백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말하는 내러티브는, 그냥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볼 때, 영화에서 내러티브 이론은 내레이션 이론과 너무 혼동되어 왔다. 내레이션 화자 분류한다고, 내러티브 법칙이 나오지 않는다. 내러티브 법칙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내러티브의 가장 간편한 공리는, 우리나라 고바우 영감 같은 네 컷짜리 보면 바로 나온다. '뭘 막 하려고 한다.' '내가 저 대상을 좇아. 혹은 잃어버렸어.' '저것을 찾아야 해.' '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졌다.' '벌떡 일어나 보니까 우연히 그것이 눈앞에 보여. 혹은 벌떡 일어나는 그 의지가 다시 그것을 나에게 불러왔어.' 요게 내러티브다. 네 컷짜리만 해도 언제나 있다. 한 마디로, 초기 평형이 깨지고, 뭘 하려다가 바닥점을 치고,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우리가 지키려던 목적 다 버리고', '내 영혼 버려', '내 모든 것을 걸어', 내기. 그리고 결단. 클라이맥스. 이런 법칙. 주체는 주체 자신의 소유물, 혹은 자기 자신을 버릴 때 그것을 찾는다는 것. 요게 내러티브의 기본이다. 안 그러면 영화 있으면 대봐라. 모든 영화가 그렇다. 1920년대부터 그랬다. 이 내러티브 법칙은 내레이션으로 다 환원되지도 않거니와... 문학에도, 문학도 하기는 하는데, 그것은 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특히 최근 소설들이 그렇다. 영화화하기 좋게 다 쓴다. 한 마디로, 내가 포기해야 그놈이 온다는 것. 내가 현실적으로 걔를 놓아야 그놈이 알아서 온다는 것. 영화가 가장 총애하는 문학은 『고도를 기다리며』다. 물론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게 영원한 대상의 엿장수 마음이다. 오지 않는다. 내 마음이다.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다. 대부분의 흥행을 노리는 내러티브 영화라면 와야 한다.

 세 점. 초기 평면이 깨지고, 막 그것을 찾으려고 달려가는데, 끝내 못 찾는, 그 과정을 원뿔로 잠깐 설명하자면... [영상 1:24:05 참고. 원뿔 두 개를 꼭짓점끼리 맞붙게 하여 위아래로 붙인다.] 얘랑 얘가 만나야 한다. 꼭짓점 두 개가 만나야 한다. 그런데, 장력이 존재해서, 계속 못 만나게 한다고 생각해봐라. 그것은 아마 영원한 대상의 부재일 것이다. 우리가 뚜쟁이를 아직 못 찾았다. 여기[두 꼭짓점끼리 맞붙기 직전의 부분]는 진공이다. 막 만나게 하려고 하는데, 얘네들이 흔들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요게 우리가 어느 영화에서도 보든, 그 1막이다. 초기 평면에 뭔가 흠집이 나서, '나는 그것을 열렬히 추구하거나 찾는데, 못 찾겠어.' 그게 요것[원뿔 두 개가 맞붙지 않는 상황]이다. 우리가 뭔 짓을 하는가? 막 노력을 하다가, 그냥 꼭 바닥점이 나타난다. 뭘 해도 안 되는 점이 나타난다. 이런 것은 시나리오 잘 쓰기 책에 안 나온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안다. 그 책 안 읽어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화 보면서 그 지점을 항상 통과한다. 되게 재미있는 것은, 언제나 유명한 장면이나 클라이맥스만 기억나지, 이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바닥점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이 책[『투명기계』]에서 2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뭘 해도 헛발질을 하는, 즉 바닥을 쳐서 이제 다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항상 나타난다. 에선 무엇이었는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전거 타는 거밖에. E.T.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장면이 있다. E.T.가 죽었다. 얘를 살리려면, 저기 NASA 그 양반들을 불러야 한다. 와도 아무 말도 못한다. 한 마디로, 다 잃었을 때. <매트릭스>에선 무엇이었는가? 바닥점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이다. '내가 모피어스를 못 구하러 가겠네. 왜냐하면 나는 원[the One]이 안 돼.' 이것이 바닥점이다. 내가 인제까지 추구하던 목표를 다 포기할 때. 한 마디로, '그러면 원이 아닌데, 내가 뭔 짓을 하든 안 된다.' 이 지점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다.

 원뿔로 치면, '에라 모르겠다', 안 맞으니까, '위에 가서 한번 찌그러트릴까?' '그러면 어떻게든 맞겠지.' 찌그러트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얘랑 얘랑 붙는가? [두 개의 꼭짓점이 맞붙지 않아 생긴 진공 상태를] 불연속점이라고 본다면, 불연속점이 점점 더 늘어날 뿐이다. 안 붙었는데 눌러서 그렇다. 눌러도 안 붙는다. 이것이 바닥점이고, 여기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생각을 고친다. '아,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되겠구나. 버려 버려...' 이 현실적인 점[꼭짓점]을 부정한다. '아, 알았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내가 원 아니어도 되니까, 나 모피어스 구하러 가야 해.' 자기가 찾으려고 하던 목적을 내팽개치면, 그다음에 온다. 고도가 와주신다.

 원뿔을 다시 해보면, 이런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모르겠고, 내가 인제까지 하려던 점을 포기하고, 나 자신에게 충실할래.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죽겠다.' 하는 지점. 한 마디로, '나는 여기서 있지 않고, 밑으로[아래 원뿔로] 내려갈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되게 재미있는, 원뿔의 꺾임 현상이 일어난다. 한 마디로, 그때 대상이 온다. '원을 포기할 때, 내가 원을 포기하고 모피어스를 선택했더니 내가 원이 됐어.' 이것을 생각하면 된다. [영상 1:28:03 그림 참고.] 원뿔이 이렇게 된다. 한 마디로, 여기로 통하게 된다. 거꾸로 갔더니, 붙어있으니 이쪽으로 갔다. 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상 쪽에서도 뒤로 갈래, 해서 붙어있기에 돌아온다. 불연속점이 아니라 붙은 점이 된다. 이것이 내가 3부 2장에서 말하는 내러티브의 비유클리드적 변형이다. [한편,] 어디로 가도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 내가 로바체프스키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다른 한편,] 내가 어느 쪽으로 가도 이 점으로 가서, 아까 우리가 만나기 불가능했던 그 점에서 만나게 된다. 그때는 뭘 해도 난 만나게 된다. 이것을 리만 공간이라고 부른 것이다. 내가 멋있으려고 이것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러티브를 이렇게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얘네들이 그래도 닫힌계 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가 얼마나 닫힌 공간 안에서 시작되었고, 두 개의 닫힌 애들, 두 원자가 만나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리고 그것들이 휘고 굽고 할지언정 전혀 지속에 의존하지 않고, 한 마디로, 여기서 시간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시간을 포기할 때 그 시간이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모든 내러티브가 그렇게 생겼다.

 여기서[마지막에 그린 그림에서 만나는 점] 우리를 찾아와주는 대상, 이것은 현실적인 대상인가, 영원한 대상인가. 이것이 가장 궁극적 질문이다. 영화가 맨 처음에 카메라가 생겨서 딱 누군가를 찍었을 때, 머이브릿지가 걸어가는 사람을 찍었을 때, 시간에 속한 대상인가, 시간 바깥에 속한 대상인가. 우리가 영화를 충분히 즐길 때는, 그것이 영원한 대상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영화에는 속편이 가능하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죽지 않았다. 걔네들은 돌아온다. 아직 안 만들어졌는데? 우리가 그 노래를 들으면 기억나는 형태로, 혹은 어느 제작자는 지금도 리메이크 판권을 넣었다 뺐다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걔는 언제나 반복가능하다. 동일자다. 대상에 관련해서만큼은 영화는 차이의 철학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영원한 동일자가 계속 반복된다. 그렇다면, 차이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인가? 대상에 관련해선 그렇다.

 <로마의 휴일>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보자. '가장 이번에 즐거웠던 도시는 어딥니까?' '로마'라고 공주가 대답한다. [<로마의 휴일> 발췌 장면 참고.] 기자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선다. '나는 그녀의 현실태를 잃었지만, 로마는 우리 마음에 남았다.' 그 로마는 영원하다. 그 로마는 다른 로마가 아니다. 이 동일자는 아무리 모습을 바꿔도, 우리는 그게 그것인 줄 안다. 그래서 정말 무서운 놈이다. <첨밀밀>을 예로 들어보자. <첨밀밀>에서 등려군이라는 것은 노래 가사의 목소리로도 나오고, 대사의 이름으로도 나오고, 누구의 친척 관계로도 나온다. 막 나온다. 그런데 길거리에 나왔을 때, 딱 등려군이 그 등려군인지 우리는 다 안다. 그리고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홍콩의 변혁을 같이 견뎠던, 기둥 같던 사람이 저기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등려군이 아니다 실제로. 대역 배우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그게 영화다. 상관이 없다. 진짜 등려군인지 아닌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제까지 말해왔고, 느껴왔던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라는 것이지, 그 등려군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역 배우를 써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제까지 처음 보는 등려군의 형태인데, 소군이 등을 돌리니까 뒤에 등려군이라고 써있네. 거기서 왜 장만옥이 헤딩을 해서 클랙슨을 울리는가? [<첨밀밀> 발췌 장면 참고.]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라서. 그 등려군이 그 등려군이 아니면, 우리는 그렇게 애닳지 않는다. 그 로마는 그 로마고, 그 등려군은 그 등려군이다.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 관람차가 온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을 보여준다. 온 마을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회피하는 아버지도 있다. '시나 쓰자.' 벌집만 연구한다. '합리성으로 어떻게 분해가 안 되나.' '아빠, 괴물이란 뭐야.' '야, 몰라도 돼.' 하지만 프랑켄슈타인 괴물은 온 마을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끝내 그녀는 길을 잃는다. 진짜 프랑켄슈타인 괴물이 나타난다. 명장면이다. [<벌집의 정령> 발췌 장면 참고.] 그 제임스 웨일의 그 <프랑켄슈타인>의 배우가 아니다. 닮지 않았다, 솔직히. 하지만, 그 프랑켄슈타인 괴물이 그 프랑켄슈타인 괴물인 것을 안다. 돌아온 것이다. 영원한 대상은 반드시 돌아온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고도는) 끝내는 등장하지 않게 했지만, 이 고도는 등장해서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이 반복됨에는 차이를 파생시킬지언정 걔 자체는 차이가 없다. 아까 내가 설명한 것처럼, 이 갈색은 뒤의 갈색과 다르다. 이 갈색은 동일하게 이 갈색이고, 저 갈색은 동일하게 저 갈색이다.

 영화의 태초로 올라가보자. 머이브릿지가 맨 처음에… 니엡스가 맨 처음에 8시간짜리 노출 사진[1826년의 "르 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 본 조망"]을 하나 딱 찍었다고 생각해보자. 이것은 영원한 대상인가? 아니다. 스러져가는 어떤 잔상을 찍은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 존재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두 개를 연속해서 찍으면… 머이브릿지의 그 유명한 걸어가는 사람 얘기하는 것이다. 딱 병치되는 순간, 얘가 이쪽으로 걸어가야 된다는 압박을 느낀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설령 뒤에 이것이[두 번째 사진이] 10년 뒤에 찍은 사진이고,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이게[첫 번째 사진의 사람] 이거[두 번째 사진의 사람]라는 우리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배운 적이 없다. 영원한 대상이 반복된다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왜 느낄까? 이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게 영원한 대상이다. 대상은 반복된다. 영원히.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영화는 막 노는 것이다. 굳이 <인셉션>과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을 같이 예를 든 이유는, 여기에 구분 자체는, 예술 영화, 장르 영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는 소기의 목적이 돈을 버느냐, 영화제를 가느냐의 차이… 그런 차이일 뿐이다. 영화에서 영원한 대상을 삭제한다면, 우리는 영화 자체를 파기하는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물어야 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위상이다. [영상 1:35:3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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