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브 Five Dedicated to Ozu〉(2003)를 앞에 두고 끄적인 다섯 개의 노트: 5 온 파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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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하는 중...) 

...누군가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주저 없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주저 없이 〈가배시광(珈琲時光) Café Lumière〉(2003)이라고 말할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도 아니고 왜 〈가배시광〉인가? 그 이유를 여기서 소상히 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 이유를 밝히자면, 〈가배시광〉은 '대만 감독'이 '도쿄 전철'을 집요하게 따라가고, 지켜봄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혹은 찾아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배시광〉은 오즈의 영화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가배시광〉은 허우샤오시엔이 오즈 탄생 100주년에 맞춰 그에 대한 헌정영화로서 만든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허우샤오시엔은 〈가배시광〉 최초 공개를 도쿄의 유라쿠초 아사히 홀에서 오즈의 출생일이자 사망일인 12월 12일에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에 키아로스타미도 오즈에게 바치는 영화를 남겼다. 바로 〈파이브 Five Dedicated to Ozu〉(2003)라는 영화를 말이다. 〈파이브〉는 〈ABC 아프리카 ABC Africa〉(2001)와 〈텐 Ten〉(2002) 다음으로 키아로스타미가 내놓은 영화다. 즉, 〈파이브〉는 키아로스타미의 2000년대 세 번째 영화다...

...키아로스타미가 어떤 영화감독을 위해 헌정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어색하다. 왜냐하면 키아로스타미는 "만약 내 영화와 로셀리니의 영화 간에, 그리고 아마 내 영화와 드레이어, 브레송, 오즈의 영화 간에 유사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 작품의 형식적인 특징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는 그저 같은 각도로 삶을 바라볼 뿐이다."라며 "어느 한 영화감독이 내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말 뒤에 그는 "고다르가 내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잠깐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또 한동안 히치콕을 거장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그의 영화가 너무 인위적이고 허구적이라고 생각한다."라고도 말했었다. 하지만 2003년 오즈에 관해 말하는 심포지엄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오즈는 나의 변호사"라고 말하며 그의 영화가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프레임에서 프레임으로 흐른다는 느낌"을 주기에 그를 "존경하게 됐다."라고 분명히 고백했다. 이에 그는 (오즈의 정신을 이어받아)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라며 "나의 영화 〈달과 연못〉[이 영화는 아마도 〈파이브〉의 마지막 프레임을 지칭하는 것 같다.]을 오즈 감독과 '본다는 것'에 충실한 관객에게 바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키아로스타미를 규정할 수 있는 여러 명사들이 있겠지만, 나는 주로 그를 교육자, 주석가, 혹은 실타래 푸는 자 등으로 규정한다. (실타래? 이는 〈페르시안 카펫 Persian Carpet〉(2007)이라는 옴니버스 영화에 실린 키아로스타미의 6분짜리 단편 ‘다가갈 곳이 있을까?(Is There a Place to Approach?)’를 보면서 떠올린 단어다.) 키아로스타미는 자기 영화를 교재 삼아 마치 교육자, 주석가, 혹은 실타래 푸는 자처럼 다시 영화를 찍었다. 나는 키아로스타미의 이런 유의 영화를 내 식대로 '댓글달기(talking/filming a commentary)' 영화라고 부른다. 키아로스타미의 소위 '댓글달기'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10 온 텐 10 on Ten〉(2004)일 것이다. 〈10 온 텐〉은 IMDb에 키아로스타미 필모그래피 중 한 작품으로 버젓이 올라와 있으며(사실 이 작품은 2004년 제5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에 초청된 바 있다.), 또 하스미 시게히코가 "비디오로 찍은 작품 중에 정말 대단한 작품" 중 하나로 골랐기 때문이다. (참고로 하스미는 두 편을 골랐는데, 나머지 한 작품은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No Quarto da Vanda〉(2000)이다.) 〈10 온 텐〉은 키아로스타미가 자동차 안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에, 주로 운전하면서 자신의 연출방식과 〈텐〉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영화다...

...사실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에도 댓글을 달았다. 이 '댓글달기' 영화는 〈어라운드 파이브 Around Five: Abbas Kiarostami's Reflections on Film and the Making of Five〉(2005)라는 제목으로 〈파이브〉 DVD에 서플먼트로 수록되었다. (〈어라운드 파이브〉는 〈파이브〉 DVD 여러 판본 모두에 수록된 것으로 확인된다.) 나는 〈어라운드 파이브〉를 유튜브에서 8분짜리 발췌본(☞ 링크)으로 처음 접했기에, 원래 러닝타임이 그 정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라운드 파이브〉의 실제 러닝타임은 대략 50분 정도로 거의 본편(75분)에 맞먹는 수준이다...

...그러고 보니 키아로스타미는 이런 '댓글달기' 작업을 카눈 시절부터 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키아로스타미는 70년대 이후에도 카눈 기반으로 영화작업을 했다. 가령,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the Friend's Home?〉(1987), 〈숙제 Homework〉(1989),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Life, and Nothing More...〉(1992)가 모두 카눈 작품이다. (물론 '스크린으로서의 세계: 키아로스타미의 버추얼리티'(21.05.16.)라는 제목의 유운성의 강연에 따르면, 이 세 작품은 카눈뿐만 아니라 다른 제작사로부터 투자를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야말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댓글달기' 영화 아닌가? 또한 (전무후무한 걸작) 〈올리브 나무 사이로 Through the Olive Trees〉(1994)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대댓글달기' 영화 아닌가? 키아로스타미는 정말 실타래를 풀어나가듯이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지속적으로 확장했던 작가였다...

...이런 식으로 '댓글달기'라는 표현을 광의로 해석한다면, 키아로스타미의 '댓글달기' 영화의 한 정점은 아마도 그가 빅토르 에리세의 영상-편지에 답장의 형식으로 보낸 영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키아로스타미와 에리세 간의 서신교환 작품을 감상하지 못했다.) 다른 정점은 아마도 〈파이브〉의 또 다른 '댓글달기' 영화 〈24 프레임 24 Frames〉(2017)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여러 번 '불완전 영화'를 얘기한 바 있다. 가령, 키아로스타미는 장-뤽 낭시와의 대화에서 “관객이 개입하여 공백(空白)과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미완성되고 불완전한 시네마(cinéma inachevé et incomplet)'를 구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개념을 두고 다미앙 매니블은 "불완전 영화란 상영이 끝난 뒤에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계속 발전되는 그런 영화다."라고 적확하게 지적했다. 결국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믿었던 작가였다. 그렇다면 우리 관객은 키아로스타미의 믿음에 따라 그저 그의 영화를 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키아로스타미 본인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키아로스타미는 자기 영화에 댓글달기를 감행한 것일까...

...키아로스타미는 누구보다 관객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했던 작가였던 것인가? 그래서 '댓글달기'를 통해 관객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해답을 주었던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유운성이 지적한 키아로스타미의 교육학적 전략(pedagogical strategy)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유운성은 키아로스타미의 버추얼리티는 영화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탄로 나도 계속 펼쳐진다고 말했다. 즉, 관객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의 비밀을 알더라도 스크린적 세계의 경계가 끝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키아로스타미의 페다고지이자 버추얼리티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이어받자면, 키아로스타미는 의도적으로 (유운성의 표현인) 보충적 에세이 필름, 즉 '댓글달기' 영화를 제작하여 본편의 비밀을 가감없이 밝혔는데, 이는 우리 관객의 감각을 (재)교육하기 위함이었다. 감각의 (재)교육? 바로 이 (재)교육을 통해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세계의 버추얼리티는 붕괴하지 않고, 오히려 증식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극장의 스크린에서뿐만 아니라 관객의 머릿속에서도 계속 상영되도록 불완전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不完全) 영화'는 '미완(未完)의 영화'나 '저질(低質)의 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타래를 풀고, 그 실을 붙잡을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실타래를 푸는 자는 일차적으로 감독이다. 그 풀어진 실을 붙잡고 미로를 빠져나가는 자는 관객이다. 그런데 이 미로는 계속 증식한다. 기존 형식의 미로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또 다른 미로판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관객은 붙잡고 있던 실을 묶어 자기 실타래를 만든 뒤 그것을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불완전 영화란 관객의 머릿속에서 계속 발전되는 그런 영화다."(매니블)라는 언사를 내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결국 감독의 '실타래풀기' 작업은 관객에게 실을 붙잡을 '기회' 혹은 '장(場)'을 마련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즉,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이나 해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그 미로를 빠져나갈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만들고, 또 그 능력을 스스로 계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타래풀기' 작업은 단순히 영화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풀어진 실을 붙잡고 더듬더듬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세계/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영화에서 다른 영화, 사진, 시 등에 다다르게 된다. 결국 '실타래풀기' 작업의 궁극적 목표는 '영화에서 벗어나 영화(적 체험) 바라보기'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키아로스타미식 교육학적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키아로스타미는 자신만의 교육학적 전략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너머로 (들뢰즈식의) '사유'를 하게 할 뿐 아니라 (발을 딛고 서 있는 물리적) '장(場)'까지도 이동하게끔 인도했던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감독일 뿐만 아니라 사진작가이자 하이쿠 시인이기도 했다. 특히 키아로스타미는 타르코프스키처럼 하이쿠를 즐겼으며, 또 직접 썼다. 그런데 하이쿠란 무엇인가? 각 행마다 5, 7, 5음(총 17음)으로 구성된 일본 정형시의 일종이다. 바쇼에 따르면, "하이쿠는 현재의 일, 눈앞의 일을 읊는 것"이다. 즉, 하이쿠는 통상적인 시조와 달리 자연물을 이념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이쿠는 단순히 암호 해독하듯 해석하는 방식으로 향유되지 않는다. 하이쿠는 아이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하이쿠 향유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독자의 능력이다. 가령, 똑같은 시구를, 아이와 철학자와 물리학자는 각기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하이쿠 세계에서 동일한 시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며, 해석의 함의가 넓으면 넓을수록 대단한 작품이 된다...

...키아로스타미는 자기 영화가 하이쿠가 되기를, 혹은 닮기를 바랐던 것 같다. 물론 이 말은 키아로스타미가 (수사적 의미에서) '시적인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저 말에서 하이쿠는 '시적인 리듬'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하이쿠는, '불완전 영화'를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불완전 시' 정도로 바꿔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독자가 개입하여 공백과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시 말이다. 그런데 하이쿠 독자가 하이쿠를 '해석'하고, 영화 관객이 영화를 '상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독자나 관객이 주체의 자리에 있으면서 하이쿠나 영화를 객체의 자리에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과 '상상'은 하이쿠와 독자가, 영화와 관객이 '공호흡(共呼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의 명증 L'Évidence du film』에서 낭시가 이미 적확하게 지적했다시피 결국 키아로스타미는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영화에 '접촉'하게끔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접촉? 이는 곧 『무위의 공동체 La Communauté Désœuvrée』를 비롯한 낭시의 여러 저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외존(外存; exposition)'이나 '열림'과 같은 개념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용어다. 이 접촉이라는 용어를 나는 내 식으로 '공호흡'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접촉과 공호흡을 여기서 더 상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백하자면, 아직 낭시의 철학에 관한 공부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 대한 개인적 생각은 하이데거와 낭시의 철학을 더 공부한 뒤에 훗날 정리해보고자 한다...

...때때로 나는 21세기 영화의 '제로 이어(zero year)'는 다름 아닌 2003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2003년에 나온 두 편의 영화 〈가배시광〉과 〈파이브〉로부터 출발해서 21세기 영화를 다시 사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오즈는 중요하다. 정확히는, 오즈가 아니라 오즈의 영화가 중요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오즈의 영화에 담긴 "화면 안의 평등한 요소끼리의 조화"(코스타)가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재)사유할 때, 반드시 (오즈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야마나카 사다오(의 영화)를 소환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야마나카는 마르크스로 무장하여 고다르보다 더 일찍이 '필름 소셜리즘'을 꿈꿨던 작가다.) 이쯤에서 앞서 인용한 키아로스타미의 말—"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을 내 식으로 수정할 수 있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보고 듣는 것이다." 〈가배시광〉과 〈파이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향이미지였기 때문이다. (한편, '음향이미지'와 관련하여 즉각 떠오르는 한 감독이 있다. 바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5살 형인 오즈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던 올리베이라가 바로 오즈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토킹 픽처 Um Filme Falado〉(2003)를 내놓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흥미롭게도 2010년대 들어서 허우샤오시엔과 키아로스타미는 모두 음향이미지의 중요성을 각각 〈자객섭은낭(刺客聶隱娘) The Assassin〉(2015)과 〈24 프레임〉을 통해서 드러낸 바 있다. 전자는 '섭은낭(섭(聶):들으면서/은낭(隱娘):숨은 여자)'이라는 이름을 따라 시점이 아닌 청점(聽點) 위주로 전개되는 영화이고, 후자는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에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다. (특히 〈24 프레임〉에서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소리는 바로 다섯 번째 프레임의 '총소리'다. 왜냐하면 스물네 개의 프레임을 관통하는 하나의 모티브가 바로 '사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번째 프레임은 사냥꾼을 그린 그림이지 않았던가...)

...계속 주절주절하다 보니 하마구치 류스케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문득 떠오른다. 하마구치는 자신의 관심이 '이미지'에서 '사운드'로 전이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아피찻퐁의 신작들—〈침묵 Silence〉(2020), 〈메모리아 Memoria〉(2021) 등—을 체험하는 데 있어 집중해서 깨워야 하는 감각은 다름 아닌 '청각'이었다. '듣는다'라는 행위의 의미가 영화에서, 혹은 영화적 체험에서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부터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각적 경험을 텍스트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이것이 심히 고민이 되는데...


[2]


2-(1) 나는 삼수 끝에 2016년 3월 철학 전공으로 학부에 입학했고, 2017년 9월에 불어불문학을 제2전공으로 택했으며, 2022년 2월에 학부를 졸업할 예정이다. 그런데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지난 나날을 되돌아볼 때 '나는 정말 철학과 불어불문학을 공부한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점점 '공부(工夫)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몇 글자 끄적이게 되었다.

2-(2) 저 거창한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현시점에서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은 '공부'라는 용어가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국립국어원이 인용한 자료(박숙희,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 책이있는마을, 2004)에 따르면, '공부'는 원래 불교에서 말하는 '주공부(做工夫)'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공부'란 '불도를 열심히 닦는다'의 의미다. 그렇다면, '공부'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다'의 의미인가? 일면 타당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다음으로 국어사전에 따르면, '공부'는 곧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다. 일단 사전적 뜻을 이어받자면, '공부'에는 두 개의 계기가 함축되어 있다: '무언가를 배운다'가 일차적 계기이고, '배운 것을 익힌다'가 이차적 계기다. 이런 공부의 두 개의 계기의 의미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을 끌어들여 '이성(λόγος)'이나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의 관점에서 따져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여기서의 관심 주제가 아니다.

2-(3) '무언가를 배우고 익힘'의 의미로 '공부'를 이해한다면, 대중적으로 많이 쓰이는 한 언사는 다소 이상하게 느껴진다. 바로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부'는 '잘한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론 이 '잘한다'가 '열심히 한다', 혹은 '집중해서 한다'의 의미라면, '공부'가 '잘한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우리는 '잘한다'를 저런 의미들로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저런 의미들로 사용한다면 대부분 조롱 조인 경우가 많을 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하는 것인가? 복습, 예습을 철저히 하면 잘 배우고 익히는 것인가? 나는 여전히 '공부'가 '잘한다'의 대상이 (대체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4)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는 '공부'의 사전적 뜻과 큰 관련 없이 사용된다. 차라리 '공부를 잘한다'는 일종의 관용어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다.' 떠올려 보면, 보통 우리는 시험에서의 고득점자들, 특히 상대평가 시험에서의 고득점자들을 보고 공부를 잘한다고 말한다. 물론 고득점의 기준은 시험의 종류에 따라 다를 테다. 어떤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아야 1등을 할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시험에서는 30점만 맞아도 1등을 할 것이다. (말하고 보니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다'보다 '높은 등수에 들다'가 좀 더 적합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2-(5) 흥미로운 것은 어학시험이나 자격증시험 같이 절대평가 시험의 경우 누군가 고득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령, 토익, 토플, 델프-달프 등의 어학시험 성적이 높은 사람을 두고 '영어/프랑스어를 잘한다'라고 말하지, '영어/프랑스어 공부를 잘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운전면허시험을 비롯한 여러 합·불(P/F) 시험의 경우 합격했을 때 '특정 분야를 숙지한다'라고 말하지 '그 분야에 관한 공부를 잘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2-(6) 사람들이 상대평가 시험과 절대평가 시험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두 시험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다'라는 시험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두 시험은 동일하다 할 수 있지만, 상대평가 시험에선 누군가를 이겼을 때 유의미하고, 절대평가 시험에선 주최 측에서 제시한 커트라인을 넘겼을 때 유의미하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능력 평가'에 좀 더 집중하는 절대평가 시험이 시험의 본질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상대평가 시험과 절대평가 시험 간에 어떤 위계도 있지 않으며, 오히려 '두 시험 모두 정말 수험생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수단인가'와 같은 물음을 제기하고 싶어진다.

2-(7) 결국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는 상대평가 시험에서 누군가를 짓누른 자, 즉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남발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경쟁에서 이기는 것, 그 결과로 소위 명문대를 입학하고 졸업하는 것, 더 나아가 고위직 공무원이 되거나 전문직—특히 '-사'가 붙은 직업들—에 종사하는 것은 '공부'에 관해서 드러내 주는 것, 혹은 증명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은 '시험공부'이지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8) '시험공부'와 '공부'는 다르다. 이 두 항의 관계는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에서 밝힌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사람들 중 대부분은 '시험공부'를 '공부'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시험공부'를 하는 데 쓰면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 '시험공부를 통해 배우고 익힌 것'은 시험이란 수단에 대부분 귀속되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공부를 잘한다'라는 언사에서 '공부'는 사실 '시험공부'를 의미하며, 애초에 저 말은 그 자체에 어폐가 있기에, '공부'를 이해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2-(9) [(2)로 회귀] '공부'의 일차적 계기인 '무언가를 배운다'에서 '무언가'는 일종의 빈칸으로서 이 안에 지식, 삶의 태도 등 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있다. 한편, '배운다'는 '내 것으로 만든다'의 의미다. 그리고 이차적 계기인 '배운 것을 익힌다'에서 '익힌다'는 '내 신체에 각인하다'의 의미다.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배운다'라는 행위다. 무언가를 '배워야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으로 만듦'의 의미로서 '배움'의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보는 방식'과 '듣는 방식'—가 있다. 물론 '감관 일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공부'에 내포된 '배움'의 방식은 '보는 방식'과 '듣는 방식'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부분 텍스트나 이미지를 보면서,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배움을 얻기 때문이다.

2-(10) '공부'의 근본의미는 '보고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배움'이다. 이때 '보고 들음'은 그저 반응(reaction)으로서 '인상(impression)이나 이미지(image) 등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성을 띠는 행위(action)로서 '자기시간경험'이다. '공부'하는 자는 보고 듣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물리적인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일종의 주관적인,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듦을 경험한다. 이 빠져듦의 시간, 즉 몰입의 시간 속에서 '공부'하는 자는 무언가를 배우는데, 이때 무언가의 내용을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무언가에 퇴적된 시간을 배우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무언가의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사유의 흐름(flow)을 배우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자기 기억의 밑면과 그 무언가의 기억의 밑면이 '접촉'하여 형성된 기억의 공동의 평면에서부터 서로의 퇴적된 시간이 상호침투하고 융합되어 새롭게 증축된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증축된 자기만의 시간을, '공부'하는 자는 자기 신체에 각인한다. 결국 '보고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배우고 익힘'인 '공부'는 연쇄적 계기들의 집합으로서, 단순히 고정태적 명사가 아니라 유동태적 동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단어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는 어떤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2-(11) 사실 한자 결합어 '공부'는 원래부터 '시간'을 의미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중국어 사전에서 '工夫(공부)'를 검색해보면 '시간'이 첫 번째 의미로 나온다. 여러 가설 중 하나를 따르면, '공부'는 '장인 공'과 '지아비 부'가 결합한, 즉 대장장이가 망치질하는 형상에서 기인한 단어다. 그래서 한동안 '공부'는 '노역'을 의미했는데, 노역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인지 점차 그 뜻이 변화하여 '시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한자 결합어로서 '시간'을 의미하는 '공부'가 우리나라에선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의 뜻을 갖게 된 것이다.

2-(12) 이제 던져져야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공부에 내재된 시간성을 우리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나라에서 '공부'라는 단어가 '시간'의 의미로 통용되진 않는다. 그런데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의 공부만 하는, 그래서 공부가 현생을 집어삼키는 소위 공부의 나라에서 '공부'에 내재된 시간성을 망각하는 것은 문제다. 이를 곧 '공부망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테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란 삶 그 자체인데, 대다수의 학생은 '공부'가 무엇인지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있다. 이때 공부란 당연하게도 '시험공부'다.

2-(13) 그런데 이런 말을 끄적이고 있는 나도 여전히 '공부'가 무엇인지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있다. 다만, 이 글을 끄적이면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은 (a) '공부'는 '시험공부'와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b) '공부'는 '보고 들음으로써 무언가를 배움'을 근본의미로 갖고 있으면서 '시간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더 나아가기 위해, 즉 '공부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 안에 내재된 '시간성'을 복권하여 논의의 장으로 소환해야 한다.

2-(14) 시간성? 나는 '시간성'을, 하이데거의 용어—'Zeitlichkeit'—를 염두에 두고 쓰고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제1부의 제목을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이라고 정한 뒤 현존재(現存在; Dasein)를 '시간성'으로 환원하여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하이데거에게서 '시간성'이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적 성격을 의미하며, 무엇보다 현존재의 실존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이기상 교수의 글 참조 ☞ 링크)

2-(15)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답하기 위한 예비고찰은 여기까지다. '공부'는 어쩌면 인간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이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ζῷον λόγον ἔχον)'이라는 규정과는 다른 의미다.) 물론 아직 확언할 수 없다. '공부' 안에 내재된 '시간성'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하이데거의 사유의 흐름을, 더 나아가 '시간'에 대한 베르그송(⇢들뢰즈)과 화이트헤드의 상반된 사유의 흐름을 배워야 한다. 결국 '공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또 공부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생기게 되는데...


[3]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배우고 찍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영화연출/기획(제작) 전공이 있는 대학원으로의 진학이다...

...작년에 나는 두 개의 대학원에 지원했었다. 한 곳은 석관동 소재의 K대고, 다른 한 곳은 죽전동 소재의 D대다. K대의 경우 학교가 서울에 있고, 또 학비가 다른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 때문에, D대의 경우 장편영화제작 과정을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고, 또 실제로 장편영화를 연출/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K대와 D대의 입시방식은, 두 학교가 서로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이 글은 두 학교의 입시 과정 전반에 관한 리뷰다. 

먼저 K대는 입시 과정이 크게 '예비심사'와 '1차시험'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예비심사는 사실 서류심사를 뜻하며, 1차시험은 필기시험와 구술시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K대는 서류심사를 통해 지원자의 60% 정도는 탈락시킨다. 따라서 서류심사를 통과한 40% 정도만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을 칠 수 있다. 내가 지원했던 3년제 과정의 예비심사에서 심사하는 서류는 기본서류(졸업예정증명서, 출신대학성적증명서), 자기소개서, 장단편 작품계획서다. 2년제 과정은 여기에 추가로 작품 포트폴리오와 그 해설서를 제출해야 한다. (제출해야 하는 여러 서류 중 기본서류는 말 그대로 참고서류다. 그런데 대학원 입시에서, 기본서류를 통해 드러나는 전적대학 간판과 학점은 단순히 참고자료가 아니라 꽤 유의미하게 성적에 반영된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적어도 서류심사에서 말이다.)

D대도 입시 과정이 크게 '서류전형'과 '면접' 두 개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D대는 기본서류를 제외하고 별도의 서류 제출을 요구하지 않는다. 즉, 졸업예정증명서와 출신대학성적증명서만 내면 되고, 자기소개서, 장단편 작품계획서, 작품 포트폴리오 등은 '공식적으로는' 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행정실에 문의한 결과, 별도의 서류를 제출한다면 교수님이 읽어는 보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자기소개서만 추가로 제출했다. 물론 이렇게 추가로 제출된 별도의 서류는 성적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지원자들은 어떤 필터링 없이 모두 구술시험을 볼 수 있다.

K대와 D대에 공통으로 제출했던 서류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볼까 한다. 그런데 기본서류인 졸업예정증명서와 출신대학성적증명서는 딱히 특기할 것이 없다. 이 두 개의 서류는 재학 중인 학교 행정실이나 포털에서 간단히 출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 학점(평점평균)을 정보 제공 차원에서 공개하자면, 7학기까지를 기준으로 4.5 만점에 4.32였다. 다음으로, K대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와 장단편 작품계획서를 얘기해보자. 이 두 개의 서식은 K대 입학정보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다. 나는 자기소개서와 작품계획서를 작년 9월 초부터 작성하기 시작해서 K대 원서접수 기간인 10월 중순쯤에 완성했다. 거의 한 달 반 정도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것이다. 여담으로, 작년 10월 초중순은, 부산에서 며칠 동안 체류하면서 영화를 보고, 줌(Zoom)으로 학부 수업도 듣고, 자기소개서와 작품계획서를 철학과 친구들과 함께 퇴고하는 데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였기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자기소개서의 경우, K대는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또한 3년제 과정은 분량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다소 자유롭게 내 식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나는 자기소개서의 내용을, '(1) 성장 과정', '(2) 지원 동기', '(3) 대학 재학 중 활동(교내, 교외 구분)', '(4) 관심 영화', '(5) 영화론: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고 싶은가?', '(6) 미래 계획' 총 여섯 개의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채웠다. 특히 힘을 주었던 것은 (4)와 (5)였다. 먼저 (4)의 경우, '영화란 무엇인가'와 '영화에서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에 어떤 답을 주는 영화 네 편을 적었다. 특히 전자의 물음과 관련해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별자리〉(2018)와 〈메모리아〉(2021)를, 후자의 물음과 관련해선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역사 수업〉(1972)과 장-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1988-1998)를(을) 적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K대 영화연출/기획 전공을 지원하면서 자기소개서에 저런 영화들을 적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5)의 경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불완전 영화' 개념을 상술하며, 그런 유의 영화를 지향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감정과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론 중 발화 행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소위 '토킹 픽처'(A Talking Picture)의 방법론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 외에 (1), (2), (3), (6)은 자기소개서 전반적인 톤앤매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영화'라는 주제와 연결 지어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글을 다 쓰고 난 뒤에 확인한 총 글자수는 대략 9,500자 내외였다. 학교가 제공하는 자기소개서 서식의 요구 조건(신명조, 12포인트, 줄 간격 160)을 모두 맞추었을 때 총 페이지수는 7페이지였다. 물론 이는 프로필(학력 사항, 경력 사항, 특기 사항) 한 페이지를 포함한 페이지수다.

다음으로 장단편 작품계획서의 경우, 자기소개서와 마찬가지로 형식에 제한은 없으나 분량은 제한이 있다. 단편은 트리트먼트를, 장편은 시놉시스를 작성해야 하는데, 특기할 것은 모집요강에 단편은 '1편 이상', 장편은 '1편'이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아이디어와 시간만 있다면 단편은 여러 편의 트리트먼트를 작성해서 제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단편 1편의 트리트먼트와 장편 1편의 시놉시스만 작성했다. 학교가 제공하는 작품계획서 서식은 크게 단편 트리트먼트 파트와 장편 시놉시스 파트로 양분화되어 있다. 전자의 경우 '로그라인(한 문장)', '시놉시스(1/2 페이지 이내)', '트리트먼트(2 페이지 이내)'로 구성되어 있고, 후자의 경우 '로그라인(한 문장)', '기획의도(1/2 페이지 이내)', '시놉시스(2페이지 이내)'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카테고리 중 나는 '시놉시스'를 세분화하여 그곳에 '제목', '등장인물', '줄거리'를 작성했다. 내가 계획한 작품을 여기서 상술할 수는 없겠으나, 한마디만 하자면 장단편 모두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하며 '2014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에 '수험생'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11월 초 발표된 K대 서류심사 결과는 합격이었다. 다음 단계인 1차시험은 11월 중순 즈음에 잡히는 바람에 나는 짧은 시간 동안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사실 나는 영화과 입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에, 서류심사 합격 이후에 짧게나마 잠원동 소재의 영화과 입시학원에 등록해 다니면서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특히 학교 차원에서 필기시험 기출문제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학원을 통해서야 비로소 기출문제 몇 개를 얻어 풀어볼 수 있었다.

기출문제 몇 개를 풀면서 파악해본 결과, K대 필기시험은 크게 두 개의 유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제재 분석을 기반으로 '시놉시스 작성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작성한 시놉시스 중 핵심 장면을 영상 언어로, 즉 시나리오 형식으로 묘사하기'이다. 제재는 보통의 경우 단편영화, 기사지문, 제시어 등의 형태로 제시된다. 그런데 K대는 매년 필기시험 문제를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변형해서 낸다. 가령, 2020년의 필기시험은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들로 구성됐다: '나를 찍은 사진 이미지 그리기'(1번), '이 이미지의 상황 설명하기'(2번), '이 상황이나 장면이 영화화되기 힘든 이유 대기'(3번), '이 장면을 바탕으로 장편 시놉시스 작성하기'(4번) 총 네 문제가 출제됐다.

몇 차례 기출문제를 풀고 첨삭을 받으면서 느꼈던 것은 K대 필기시험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것이다. 사실 제재분석과 이야기구성 문제에 어떤 답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K대 교수들의 입맛에 맞는 답은 분명 있는 것 같았다. 즉, 그들은 고전적인 스토리텔러의 범주 내에서 창의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잘하지도 못했고, 더욱이 K대 교수들이 원하는 '창의성'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느끼기에) 준비가 덜 된 상태로 필기시험을 보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 시험장에서 마주한 문제는 학원에 다니며 준비한 것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적어도 단편영화나 기사지문 같은 분석할 제재가 제시됐다면, 작년에는 그저 IMDb 역대 고평점 영화들 제목 몇 개 나열된 게 끝이었다. 영화들에 관한 상세한 설명도 없었다. 즉, 학교에서 제시한 리스트에서 감상한 영화가 없으면 아예 답을 적을 수 없는 구조로 문제가 출제됐다. (물론 대부분 유명한 영화들이었기에 지원자 중 답을 적지 못한 사람은 없었을 테다.) 

시험의 주제는 '리메이크'였다. 사실 K대는 2010년대 초에 단편영화를 보여 주고, 그 영화를 각색하여 시놉시스를 작성하게 하는 문제를 이미 낸 적이 있기에 리메이크 자체는 낯선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작년에 출제된 리메이크 문제는 기존의 리메이크 문제와 결이 달랐다. 기출문제에선 '자유로운 각색'을 허용했다면, 작년 문제에선 '한국 상업영화로의 리메이크'로 제한을 두었다. 무엇보다 작년엔 통상적인 이야기구성 문제가 출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만들 리메이크 영화에 필요한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한 소속사 대표를 만나 그를 설득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문제가 출제됐다. 이것이 총 세 문제 중 마지막 문제였다. 

나는 리메이크할 작품으로 〈위플래쉬〉(2014)를 골라 나름의 답을 작성했다. 그런데 필기시험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문점들이 여태껏 남아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볼까 한다. 첫째는 '리메이크할 작품들에 대한 의문'이다. 먼저 리메이크할 작품들의 출처 혹은 기준이 왜 'IMDb 역대 고평점 리스트'여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제시한 영화들의 제작국가의 9할 이상이 '미국'인 것도 의문이다. 만약 지원자의 개성, 창의성, 안목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싶다면, 아예 리메이크할 작품을 각자 원하는 국가와 감독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작년에 학교 측에서 분석할 제재를 아예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제목 나열은 제재 제시가 아니다.) 사실 미국영화 말고 한국영화도 리메이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만희의 〈만추〉(1966)는 국내에서만 세 번(김기영, 김수용, 김태용) 리메이크되지 않았던가.

둘째는 '문제의 조건에 대한 의문'이다. 바로 '한국 상업영화로의 리메이크'라는 조건 말이다. K대는 한국에 있는 학교니까 '한국'이란 조건은 당연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상업영화'로 굳이 제한을 걸어두었는지가 의문이다. 영화연출이나 기획(제작) 과정에서 상업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예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운영되는 학교에서 영화에 대한 미학적 사유를 묻지 않고, 대놓고 '상업영화'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힘들다.

셋째는 '마지막 문제(의 출제의도)에 대한 의문'이다. '배우 캐스팅 과정에서 소속사 대표를 만나 그를 설득하는 장면 묘사 문제'는 도대체 왜 출제된 것인가? 사실 내가 지원한 전공은 '영화연출/기획 전공'이다. 따라서 출제자 입장에서 얼마든지 연출의 관점이 아니라 기획의 관점에서 문제를 낼 수 있다. 아마 출제자는 기획의 관점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왜냐하면 세 문제 중 마지막 문제가 가장 많은 글자수의 답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출제자가 핵심이라고 생각하여 고집을 부려 결국 출제된 '기획의 관점에 기반한 문제'가 '리메이크'라는 시험 전체의 주제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각각 '여러 영화 중 하나를 골랐다면, 그 영화를 왜 골랐는지 서술하는 문제'와 '고른 영화를 한국영화로 리메이크할 때 어떤 부분이 달라질 것인지 서술하는 문제'였다.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순서에 따른다면, 세 번째 문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를 종합하는 문제, 즉 '내가 만들 리메이크 영화의 이야기를 시놉시스나 시나리오 형식으로 작성하게 하는 문제'가 되었어야 한다. 사실 기존의 시험 기조대로라면 이야기구성 유형의 문제는 반드시 한 문제 이상 출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출제자도 논술식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에 이어 세 번째에 이야기구성 유형의 문제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출제된 세 번째 문제는 '내가 만들 리메이크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속사 대표를 설득하는 논변'을 기반으로 하는 문제였다. 장면 묘사 형식은 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문제에는 적합하지만, 후자를 기반으로 하는 문제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장면 묘사 문제가 출제됐다면 식상한 문제가 되었을 테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를 기반으로 하는 장면 묘사 문제가 출제된 것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사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지원자가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소속사 대표를 설득하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을 텐데, 그 안에서 얼마나 창의적인 논변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캐릭터의 매력 위주로 설득한다'라는 조건이 있다고 한들 말이다. 게다가 마지막 문제는 세 문제 중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의 답안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자 내외로 써야 했다. 심지어 장면 묘사 형식의 문제에 대한 답은 필수적으로 시나리오 형식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원고지 글자수가 많이 부족하다. 즉, 내 생각을 풍부하게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획의 관점에 기반해서 문제를 낼 것이었다면 장면 묘사 형식이 아니라 다른 형식(가령, 논술식)으로 냈어야 하고, 장면 묘사 형식으로 문제를 낼 것이었다면 기획의 관점이 아니라 연출의 관점에서 문제를 냈어야 한다. 결국 마지막 문제는, '출제자 눈에만 신선해 보이는 기획의 관점에 장면 묘사 형식을 억지로 짜 맞추어 출제된 문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저런 상태의 필기시험이 얼마나 변별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 채 구술시험을 봤다. 그런데 구술시험 역시 내 예상과 다르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선 면접관은 총 세 명(이하 A, B, C교수로 구분하여 지칭한다.)이었다. 총 10분의 면접 시간 중 처음 4-5분 정도는 A교수가 (내가 필기시험 때 고른 영화인) 〈위플래쉬〉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마지막 장면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했다. 어떤 답을 해도 또 다른 답을 요구했다. 그러다 C교수가 필기시험에 대해서 자평해보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문제에 대한 답을 다소 무난하고 아쉽게 적은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가 고쳐 쓴다면 어떻게 할지를 묻길래, 나는 내 답이 아쉬운 이유에 관해 설명한 뒤 이런저런 문제의 요건에 맞춰 고치겠다고 답했다. 면접이 끝날 때까지 C교수가 계속 질문했다. 그는 '영화를 찍어본 경험이 있는지', 또 '상업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 맞는지'를 물어봤다. 면접 거의 마지막 즈음에 C교수는 한국영화감독 중에 롤모델이 누구인지 물었다. 나는 '배용균 감독님'이라고 말하려다가 '상업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 맞는지' 물은 자에게 배용균을 말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결국 '임권택 감독님'이라 말했다. 그러자 그가 임권택 감독님의 어떤 점이 좋은지 묻길래, 나는 한국 근현대사를 길어 올리는 임권택 감독님만의 '시간' 혹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C교수가 임권택 감독님이 훌륭하시지만, 왜 요즘에는 영화를 못 찍으시는지 그 이유를 아는지 물었다.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 그냥 떠오르는 대로 건강과 투자 문제가 있으신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가 롤모델조차 투자를 받지 못하는 상황인데, 지원자 본인은 어떻게 투자를 받아서 영화를 찍을 것인지 물었다. 이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시간을 잠시 달라고 하자, A교수가 시간이 다 되었으니 짧게라도 빨리 대답하라고 했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님처럼 미학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흥행적 요소도 고려하겠다고 얼버무렸는데, 그 순간 면접이 종료되었다. (그제서야 면접 내내 노트북 모니터에 시선을 두던 B교수가 나를 응시했다.) 

K대 구술시험은 필기시험의 연장이었다. 사람마다 받았던 질문이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필기시험과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학교에 제출했던 자기소개서나 장단편 작품계획서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또한 모집요강에 있는 '2021년도 1월부터 9월까지의 월별 박스오피스 1-5위 중 한국영화를 모두 관람할 것'이라는 요구가 무색하게도 박스오피스 순위권 영화 관련 질문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여하간 나는 K대 시험을 만족스럽게 치지 못했다. 그것이 나의 실력 부족 때문인지, 학교가 낸 문제 혹은 학교의 입시방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K대에서 벗어나, 이제 D대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한다. 사실 D대는 입시 과정만 놓고 볼 때 말할 것이 많지 않다. 앞서 말했듯 D대 입시에는 서류심사와 필기시험이 없고 오로지 구술시험만 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D대의 구술시험은 스카이프 화상통화로 진행되었다. 면접은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내가 직접 면접관에게 전화를 걸면 바로 시작되었으며, 일대일로 진행되었다. 면접이 시작되자 면접관은 내가 추가로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잘 읽어보았다며 나름의 소감을 말했다. 그 뒤로 대략 15분 동안 면접이 진행되었다. 면접 분위기는 K대보다 훨씬 부드러웠으며, 면접관은 내 말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면접의 느낌보다는 면접관과 그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면접관의 질문은 내 답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어졌다. 따라서 각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을 적어보자면, '영화 연출해본 경험이 있는지', '지원 동기가 무엇인지', 'D대 출신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이 있는지', '그 영화의 어떤 점이 좋은지',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지', 'K대에도 지원했었는지', '연출 외에 세일즈나 제작에도 관심이 있는지' 등의 질문이 있었다.

입시 준비의 측면에서 볼 때, 여러 시험을 치르는 K대 입시에 당연하게도 더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였다. 상대적으로 시험이 간소화되어 있는 D대 입시는, K대 입시를 위해 준비했던 것(가령, 자기소개서나 구술시험 대비 스크립트)을 재정리해서 치렀다. 그렇다고 해서 D대가 K대의 대체 학교였던 것은 아니다. K대와 D대 모두 가고 싶은 학교였으며, 다만 각각 장단점이 뚜렷하여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두 학교 입시가 모두 끝났을 때, 다행스럽게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K대는 최종 불합격했고, D대만 최종 합격했기 때문이다.


[4]


다음은 작년에 내가 지원했던 K대 영화연출/기획 전공 필기시험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복기한 것이다. (단, 내가 썼던 답안은 따로 공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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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Db 역대 고평점영화 250위 중 몇 개를 선정하였다.)
쇼생크 탈출 / 대부(1) / 석양의 무법자 / 좋은 친구들 / 라이언 일병 구하기 / 위플래쉬 / 아마데우스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 다이 하드 / 식스 센스 / 파고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그랜 토리노 / 포드 V 페라리 / 스탠 바이 미 

위 영화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한국 상업영화로 리메이크하려고 한다. 

Q1. 감독 또는 프로듀서인 본인이 해당 영화를 왜 리메이크하고 싶은지를 서술하시오. (100자 내외) 

Q2. 이 영화를 한국영화로 리메이크할 때 어떤 부분이 크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200자 내외) 

Q3. 당신은 리메이크 영화의 주연을 캐스팅하기 위해 톱스타가 소속된 회사의 대표를 만났다. 해당 배우가 이 영화의 주연을 맡아야 하는 이유를 캐릭터의 매력 위주로 설득하는 당신과 이 시나리오를 거절할 이유만 찾고 있는 대표, 두 사람 간의 대화로만 구성된 씬을 서술하시오. (설득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내용으로 답안을 마무리하지 말 것. 1000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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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K대는 학교 차원에서 전문사 과정 기출문제를 공개하지 않는다. 행정실에 전화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지만, 그저 학교 방침 때문이라는 답만 들을 수 있었다. 감히 추측건대, K대는 대학원 정도에 진학할 수준의 사람들에게 기출문제는 굳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수험생 입장에서는 시험을 보러 가는 데 기출문제가 없어 어떤 준비도 할 수 없음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기출문제를 구하려고 이곳저곳을 찾아보지만, 그 누구도 관련 자료를 공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나를 포함한) 몇몇 수험생은 과외나 학원을 알아보게 된다. K대의 기출문제 비공개 방침이 어느 정도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이다. (물론 사교육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결론적으로 나는 K대의 기출문제 비공개 방침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교육적 목적하에서 내가 직접 시험장에서 풀었던 문제를 복기하여 공개한다. (그런데 K대는 매년 필기시험 문제를 변형해서 낸다. 그래서 이 공개가 누군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5]


2021년에 감상했던 영화들을 떠올려 보며, 리스트를 작성한다. (단, 재감상은 제외한다.) 

5-(1) 2019-21년도 영화 
1. 침묵(2020) & 메모리아(2021)_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 미야모토(2019)_마리코 테츠야
3. 우연과 상상(2021) & 드라이브 마이 카(2021)_하마구치 류스케
4. 더블 레이어드 타운(2019)_코모리 하루카 & 세오 나츠미
5. 와일드 투어(2019)_미야케 쇼 
6. 다함께 여름!(2020)_기욤 브락
7. 끝없음에 관하여(2019)_로이 앤더슨
8. 스파이의 아내(2020)_구로사와 기요시
9. 운디네(2020)_크리스티안 페촐트 
10. 입법회 점령사건(2019) & 붉은 벽돌벽 안에서(2020)_홍콩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첨언: 리스트에 없는 영화들 중 미겔 고미쉬와 모린 파젠데이로의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2021)와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루치오를 위하여〉(2021)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정말 똑똑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오야마 신지의 〈구름 위에 살다〉(2020)는 걸작 같은데 아직 의심 중이고, 레오 카락스의 〈아네트〉(2021)는 기대보다 다소 별로였고,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2021)는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한편,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2021년의 발견이라 하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봤던 마리코 테츠야의 〈미야모토〉(2019)다. 나는 아직도 계단 격투 씬을 잊지 못하고 있다.

5-(2) 2019년도 이전 영화
1. 백만 냥의 항아리(1935) & 고우치야마 소슌(1936)_야마나카 사다오
2. 누드모델(1991)_자크 리베트
3. 맨느 오세앙(1986)_자크 로지에
4. 그림자 열차(1997)_호세 루이스 게린
5. 우리들의 사랑스런 8월(2008)_미겔 고미쉬

첨언: 야마나카 사다오, 야마나카 사다오, 야마나카 사다오... (무한 반복) 

5-(3) 한국영화
1. 당신얼굴 앞에서(2021)_홍상수
2. Trans-Continental-Railway(2021)_정재훈
3. 헛발질(2021)_배윤환
4. 인트로덕션(2020)_홍상수
5. 보이스(2021)_김곡 & 김선 

첨언: 처참했던 2021년의 한국 상업영화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은 단연 곡사의 〈보이스〉(2021)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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